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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앙은 회개를 촉구함이라 (계 0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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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에서 환난과 재앙은 일곱 인에서 일곱 나팔로, 그리고 일곱 나팔에서 일곱 대립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강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섯째 인에서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삽입된 보충 계시는 일곱째인에서 벌어질 크나큰 재앙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긴장 가운데 막상 일곱째 인을 떼고 나니 하늘에는 뜻밖에 반시 동안이나 고요가 흐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고요할 수 만은 없는 순간이기에 오히려 그 고요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폭풍 전야의 그 음산한 고요함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재앙과 환난이 폭풍처럼 몰아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요의 순간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성찰과 참회의 기회를 주시는 순간일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여섯째 인이 떼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몰려오는 환난과 재앙을 견뎌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고요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며 참회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환난 대신에 반시 동안의 고요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아버지 하나님다운 멋있는 접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시 동안의 고요가 우리들의 회개와 기도를 위한 순간이라는 해석을 뒷받침 해주는 구절이 8장 3절에 나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여기에서 '많은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8장 5절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 응답이 어찌나 우렁차고 엄위로운지 마치 번개가 치고 지진이 일어날 때처럼 세상을 뒤흔든다고 계시록 기록자 요한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천재지변은 실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일곱째 인은 그렇게 지나가고 일곱 나팔을 불기 위해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데(8:2), 그들은 일곱 천사장, 즉 라파엘, 라구엘, 미카엘, 사라카엘, 우리엘, 가브리엘, 레미엘일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일곱 나팔 심판은 일곱 인의 심판보다 더 구체적이며 집중적입니다. 일곱 인의 심판은 일반적이고 초자연적인 심판에 대한 것으로 서론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일곱 나팔 심판은 보다 격렬하고 결정적입니다.
 
첫째 나팔에서 넷째 나팔까지는 자연계에 쏟아지는 재난입니다. 다섯째 나팔에서 일곱째 나팔까지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재앙입니다.
 
첫째 나팔은 땅에 쏟아지는 재난으로, 땅의 삼분의 일과 수목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어집니다. 둘째 나팔은 바다에 내려지는 재난입니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집니다. 셋째 나팔은 강에 내려지는 재난입니다.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과 여러 물샘의 삼분의 일이 오염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넷째 나팔은 천체계에 대한 재난으로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해를 받아 어둡게 됩니다. 즉 낮과 밤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땅, 바다, 강, 하늘에 두루 떨어지는 이 재난은 가히 입체적입니다. 또 너무 엄청나서 실제로 우리에게 닥치지는 않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런 사실들이 적잖게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이태리의 폼페이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타락한 휴양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AD 79년에 인근에 있던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뒤덮히는 바람에 거의 1천 9백년 동안이나 매몰되었다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생존의 순간 그대로 화석이 된 흥미있는 모습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1977년에 하와이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연기와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어 며칠 동안이나 해를 가린 것을 보았습니다. '해, 달,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8:12)라는 표현도 사실은 우리가 가끔 듣는 말입니다. 몇 년에 한번씩 우주 과학자들은 혜성이 지구나 별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는 것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결정적이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원자력입니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핵 폭발은 자연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이 그리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기를 구할만큼 괴로운 재앙?
 
넷째 나팔의 재난이 지나고 난 후 독수리가 하늘을 날매 땅에 거하는 자들, 즉 세상 일밖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의 세 나팔이 불려질 때 인간에게 '삼중의 화'가 내려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독수리는 성서적인 날짐승입니다. 우리는 이 독수리로써 호세아서 8장 1절에 나오는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라는 말을 상기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이것으로 이사야 40장 31절에 나오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는 말을 연상할까요. 이 경우에서는 독수리를 어느 한가지 상징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밧모섬까지 날라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독수리를 요한이 바라보고 있을 때 큰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것은 마치 전시에 공습경보를 알리는 정찰기 같은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적군에는 위협이요 아군에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다섯째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보이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라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로, 그 천사는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예비해 둔 천사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밑바닥이 없다고 할 만큼 깊고 깊은 무저갱의 열쇠를 여니 그 구덩이에서 황충이 나타납니다.
 
황충은 메뚜기떼로서 성경에 메뚜기떼의 출몰이 이따금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같습니다. 그리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다'고 하였습니다(9:7-9).
 
실제로 1886년, 알지에르에 메뚜기떼가 몰려들어 20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메뚜기떼가 풀을 갉아먹는 소리가 초원에 불이 나서 숲을 태우는 소리 같았고 그들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엄청난 소나기가 숲 속에 퍼붓는 소리 같았다는데 날아오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사람들이 피할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황충에게는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는데 그것에 쏘인 사람들은 어찌나 괴로운지 차라리 '죽기를 구할만큼'(9:6)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황충을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황충에게 오직 '이마에 인 맞지 않는 사람들'을 해할 권세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 맞지 않은 사람들은 황충이 번성하는 다섯달 동안 그런 괴로움을 당하면서 차라리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죽이지는 말고 괴롭게만 하라'(9:4)고 하셨기 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죽는 것이 백번 나을 것 같은 끔찍한 괴로움, 그것이 바로 '첫째 화'입니다.
 
여섯째 나팔은 이만만(2억)의 마병대에 의해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는 끔찍한 환상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 말은 힘이 입과 꼬리에 있습니다.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고 꼬리는 뱀같으면서도 또 그 끝에 머리까지 달려 있어서 그것으로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무서운 동물은 모두 그 힘이 앞에만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황충이나 말은 그 힘이 앞에 뿐 아니라 뒤에까지 있어서 도저히 피할 수 없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말들과 말 탄 자들이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다'(9:17)는 묘사는 현대의 탱크 부대를 연상케 합니다. 탱크에 칠해진 빛깔이 그렇고 빙글빙글 돌며 앞뒤 없이 쏘아대는 그 괴력이 그렇습니다. 불과 30여년 전 일어났던 월남전쟁의 그 수많은 탱크 부대 또한 이 묘사와 무관하지 않게 생각됩니다.
 
재앙속에서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엿보여
 
그 무서운 재앙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죄인들 중에서 구별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서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것(육체적인 죄)과 예배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배한 것(영적인 죄), 그리고 (마음속으로)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한 것(정신적인 죄)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회개가 다만 육체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까지 통틀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살려두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못내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책의 인을 하나씩 떼어 낼 때마다, 그리고 여섯 나팔이 차례로 불려질 그 때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주기를 간곡히 바라고 계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과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재난과 재앙을 내리시는 참 뜻은 결코 인간들을 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흡사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회초리를 들 때 정작 그들에게 매를 치지는 못하고 책상 언저리만을 내리쳐 자녀로 하여금 무서워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뉘우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만큼 사악한 피조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 사람만은 그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볼 때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을 회개하게 하는 것은 준엄한 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그 사랑으로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재앙은 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들 각자에게 자기 성찰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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