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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계 10:1-11:19)

첨부 1


'요한계시록' 전부를 크게 둘로 나누어, 1,2부로 분류해서 읽으면 지루하지도 않고 그 뜻도 일관되게 풀이됩니다. 1부는 1-11장까지
인데 사실 이 계시록을 기록했던 요한은 11:15-18의 내용으로써 전체의 끝을 맺어도 이의가 없도록 일단 결론적인 말씀을 수록합니다. 그리고 2부는 12-22장까지인데 1부와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전개됩니다. 이러한 서술 전개 방법을 '교차대구법'(交次對句法,chiasmus)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내용을 설명할 때 첫째 문장은 끝 문장과, 둘째 문장은 끝에서 둘째 문장과, 셋째 문장은 끝에서 셋째 문장과 서로 대조시켜 가면서(이런 식으로 계속 전개함으로써) 그 내용을 보다 깊고 다양하게 표현해내려고 하는 일종의 성서 문학적인 기교라 하겠습니다(이러한 표현법이 신구약 성서에 두루 쓰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창6-9, 잠3:10, 사6:10, 요6:36-40에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이렇게 교차대구법의 형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분해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N.W.Lund,Chiasmus in the N.T.(1942) 와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Supp. Vol. p.145와 박수암 '요한계시록'p.160 참조).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교회의 박해'라는 대주제를 놓고 네차례(넉장)에 걸쳐서 설명해 가는데 그들중 전반부 곧 1부의 마감격인 10장과 11장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같은 주제로 후반부 곧 2부의 시작이 되는 12장과 13장은 다음에 다루게 됩니다.
 
작은 책을 먹다
 
10장 첫 대목에 나오는 '힘센 다른 천사'는 마치 그리스도의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지만(계시록1:16,4:3,시편104:3,출13:12f.),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이러한 묘사는 그만큼 중요한 임무를 띤 천사장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작은 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게시록 5:1 이하에 나오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기록자가 본 이런 작은 책에 관한 영상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4절). 왜 그럴까요?
 
그 까닭은 8절 이하에서 저절로 밝혀집니다. 이따금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다가 전혀 모를 대복이 나오는데 그럴때 당장 알려고 서두루지 말고 때에 따라서는 그냥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가면 그 다음 대목에서 해명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도 그랬던 대목이라 봅니다.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져다가 '먹어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하늘의 음성은 그 작은 책이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9절)고 자세한 설명까지 해줍니다. 도대체 책을 왜 먹으라고 하며, 또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는 것이 무슨 듯일까.
 
책을 먹으라는 명령은 에스겔 2:8-3:3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묵시적 또는 환상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내용을 읽어서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지 말고 직접 체험해서 깨달은 내용을 전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책이 네 입에는 달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은 입에 달다'는 표현이 성서에 자주 나왔던 것에 근거합니다(시편119:103, 예레미야15:16). 그렇지만 여기 '네 배에는 쓰다'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으로서 아마 교회의 수난과 박해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더구나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것을 대적해서 싸워야 하는 고난이 닥칠터인데 그것을 계시한 책은 배속 깊이 쓰게 마련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언된 바대로 이루리라
 
10장 5-7절은 삽입된 보충계시 가운데 다시 삽입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비밀이 선지자들에게 예언된 바대로 장차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11:15-18에 명기됩니다. 이것은 이미 아모스 선지자에게도 일러주셨던 내용이라 사려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3:7).
 
10장 맨끝절도 앞의 내용처럼 재삽입된 계시인데 여기서는 11장의 예고처럼 들립니다. '네가.... 다시 예언하리라'는 그 내용은 곧 이어서 11:1-13에 나옵니다. 독자들에게는 순서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게시록에 기록된대로 내용을 설명해가려고 합니다.
 
두 증인은 누구일까?
 
11장 1절의 '지팡이 같은 갈대'는 측량 때 쓰는 자입니다. 여기서 '척량하다'는 말의 뜻은 건축이나 수리 또는 철거를 위해서가 아니고 보전을 위해 측량해두라는 것입니다. 보전의 대상은 주를 경배하는 자들에 한합니다. '성전 밖 마당'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오히려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2절)는 것입니다. 앞으로 마흔 두달 동안 교회 핍박이 있을터인데 그 기간을 날짜로 환산하면 1,260일입니다(3절). 이 기간은 햇수로 3년 반이 됩니다. 7년간의 환난중 전반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말씀은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 예언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앞에서도 밝혔지만 계속 읽어가노라면 성서 본문이 스스로 설명해 줍니다. 그는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하였습니다(4절). 두 감람나무는 아마도 성전 앞에 세워진 나무인 듯 싶고, 두 촛대는 교회안 십자가 아래 놓여진 촛대인 듯합니다. 여전히 이 두 증인이 누구인가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계시록을 읽어 내려가십시다.
 
첫 암시는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이고, 둘째 암시는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고'입니다. 전자는 열왕기하 17:1에, 후자는 출애굽기 7: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쯤되면 그 두 증인은 누구인지 짐작되실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귀한 하나님의 계시는 율법과 예언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서와 예언서가 성경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은 모세요. 예언자 중의 예언자는 엘리야였습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웠습니다. 그들이 권세를 받아 증언하다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서 죽게 되고 그 시체가 사흘 반 동안 방치해 둘만큼 수모를 당합니다. 여기서 '소돔'은 타락한 도시를 가리키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나라들을 가리키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나라들을 일커릅니다. 요한은 교회가 이러한 도시들과 나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인양, 묵시적인 표현과 역사적인 사건을 혼합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일 반 후에 하나님게로부터 생기가 저희(두 증인)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11:11)는 것이며, 또 '저희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2)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37:10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갔을 대 다시 살아나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아니면 부활이후 예수님의 승천 장면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역시 모세와 엘리야(왕하2:11)를 연상하면서 씌어졌으리라고 보며, 다만 이것을 요한은 신약시대 이후 교회의 모습으로 투사시켰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처음은 수난과 핍박을 받으나 장차 주의 영광스런 이름을 힘입어 승리하리라는 계시라 사려됩니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다
 
드디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온 세계에 울려퍼집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롯 하시리라'(11:15).
 
이 말씀은 성서 전체의 끝맺음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끝없이 노력하셨던 것 전부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을 이룩하려고 하셨던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이 세상이 주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에서 '되어'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되었다'라고 명시된 점입니다. 성서에는 이따금 미래의 일을 표시할 때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고 또 기필코 이루어질 확실한 일일 때는 서슴치 않고 단순 과거로 쓰인다고 합니다.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일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와서 닿았던 일이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끄트머리였습니다. 무한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끄트머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 곧 그의 사랑이 세상에 전염병균처럼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의 전파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길 힘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이미 그 사랑으로써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미 성서를 통해서도 여러차례 이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를 쳐부실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31-45). 스가랴는 주게서 '모든 세계의 왕'이 되실 날이 오고 있음을 예언했습니다(14: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 나라 점령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마4:8-10)
 
예수님께서 이룩하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사랑의 실현' 그 자체였을 뿐 입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외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체적으로 답사하셨고 그 현실을 체험하셨기에 그 길도 아셨으며, 그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주께서 왕노릇 하시리로다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는 말씀은, 그가 세상의 왕이 되시겠다는 듯에 앞서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그를 주님으로 영접해드려 그들의 생활 속에서 중심 역할(Christ-centered life)을 하시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내 생활 안에 구체적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먼저 주관하실 때 나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지, 세상 나라들처럼 세상을 강권으로 점령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메시야적 승리와 그 주권 행사는 십자가의 고난으로써 이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지, 결코 철권으로 때려 부수거나 전제 군주의 통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집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강권으로 역사해서 이 세상을 이기리라고 기대했다가는 영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진정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면, 비록 험한 이 세상을 살고 있을지라도 이 세상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인양 의식하면서, 곧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세상과 더불어 동시에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써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살아가는 승리의 길입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려 교회를 향해 나갈때, 저는 단잠에서 깨어나면서 이 세상 고통을 통감했으며, 아침 공기를 들여마시며 새벽을 뚫고 거침없이 달려 주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이것이 하늘 나라지'하는 희열에 전율하였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수시로 이 세상에 당겨다가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1장의 그 다음 구절들은 앞에서 밝힌 신앙고백적인 틀에 대입시키면 저절로 풀리리라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감사의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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