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능력과 성령과 확신 (살전 01:5-8)

첨부 1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1장 5절을 다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 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 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 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말로만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보 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미 배운 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너무 괴로워서 없애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점이 많습 니다. 기도의 횟수도 세 차례였고 기도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 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육체의 가시를 없이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응답도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고난의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을 주셔서 능히 그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답도 같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여기 내 능력 이란 말은 주님의 능력을 의 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집니다. 약한데서 라 는 말은 인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약할 때, 인간이 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다시 말 하면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고통이나 질병이나 슬픔이나 고독이나 환난 같은 것들로 인해서 인간 이 약해지고 그 약함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자체는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능력이 인간 가운데 온 전히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할 때 그 약한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주의 능력 이 온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 온전히 나타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흙이 굳을 때는 토기장이의 기술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심령이 상처를 입을 때, 상한 갈대처럼 약해질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의 가시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해질 때 하나 님을 사모하게 되고 그 심령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멀리 외국에 갔다가 흉년을 만나 극도의 궁핍에 빠지고 고독하게 될 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심 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심령이 약해질 때 자연히 그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이렇게 인간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가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시는 주님의 능력이 온전 히 나타나게 되는 기회가 됩니다. 검은 구름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름이 있어야 일곱가 지 색의 영롱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검은 구름을 통해서 태양의 찬란한 빛이 온전히 나 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약한 데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 히려 그의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왜요? 주님의 능력이 이런 때에 우리에게 머 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할 그때에 주님의 능력이 강해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중한 병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신 분도 계십니다. 심한 고통 속에서 주님의 능 력을 체험하신 분, 큰 슬픔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신 분이 계십니다. 주님의 능력은 약한 데 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시지요? 진주패라는 조개가 있습니다. 그 조개가 바닷속으로 기어다니는데 모래알이 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람이 진주조 개 속에 모래알을 넣어 주지요. 그러면 조개가 말은 못하나 그 부드러운 살 속에 모래가 들어가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나 이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는데 1년, 2년, 5년 감싸면 마지막에는 진주가 됩니다. 고통의 가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주 안에서 옳게 받으면 이것이야말로 진주와 같은 믿음, 진주와 같은 은혜, 진주와 같 은 보배로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 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의 도 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말합니다.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 이 복음은 하나인데 이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종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많지만 이 모든 사람을 간단 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경에 구원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방면으로 기록한 곳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보면 구원을 얻었다 했고 구원을 받는다 는 현재로 기록한 곳도 있도 다른 곳은 구원을 얻겠다 고 미래로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그 런데 이 세 가지 표현이 다 옳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 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구원 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리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다 구원 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미래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으나 육신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육신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온전히 변화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중에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멸망 중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멸 망 중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과 정반대의 형편입니다. 그 영혼이 점점 죽어가 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영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점점 고침을 받아서 구원의 자리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점점 중한 병이 심해져서 멸망의 자리로 내려가든지 우리의 심령은 그 두 가지 형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하나인데,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보입니다. 멸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보입니다. 멸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게 들립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왜요? 십자가는 본래 로마에서 노예 나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할 때 사용한 형기가 아닙니까?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무서 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박히는 이런 데 처형을 받은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복음은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너무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 학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쌓아서 구원을 얻는다면 모르 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야? 그거야 덕이 없는 사람들,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하면서 복음을 비웃었 습니다. 복음이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더구나 대속한다 는 진리가 많은 사람에게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 당당한 사람이야 자기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미련하게 들렸고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멸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복음이 미련하 게 들리면 그 사람의 영혼이 멸망의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해가 쨍쨍 빛나는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이렇게 어둡냐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단순히 눈에 병이 들어 그럽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 다면 그 심령의 상태가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후 서 2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향기입니다. 향기는 사람 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상쾌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간 심령은 성결한 심령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입술은 성결해집니다. 입술 뿐만 아니라 전 생활이 정화되고 사랑으로 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 그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그리 스도의 복음이 어떤 사회에 들어갈 때 그 사회가 변화되고 그 국가가 새로워집니다. 주님의 복음에 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 라 새 것이 되었도다 초대 교회 때를 보세요. 몇 사람 안되는 촌부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 갈 때 변해서 새 사람이 되고 세상을 뒤집어 엎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 력입니다.복음의 능력은 개인을 변화시킵니다.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일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잡아당기는 힘, 능력이 있습니다. 봄 동산에 아름다운 꽃이 필 때 벌과 나비들이 사방 에서 모여옵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 속에 향 기가 있어서 그 아름다운 꽃에서 향기가 방사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잡아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 힘에 끌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 습니다. 야고보도 그랬고, 요한도 그랬고,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오순절에 회개 한 삼천명도 그랬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복음의 인력에 의해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남녀의 구별이 없고, 노소의 차가 없고, 빈부나 귀천의 벽이 없고, 교육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 고 그의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권능이 있어서 모든 사람을 그리 스도에게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복음의 능력에 이끌림을 받아서 이 자리에 왔고 구원을 얻 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이렇게 사람들을 끌기도 하지만 물리치기도 합니다. 벌과 나비같이 아 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봉첩은 향기가 이끌지만 어떤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곤충은 향기가 물리칩니 다. 향을 피우면 모기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향기는 모기를 물리칩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아도 그 리스도의 복음의 향기가 나타날 때 많은 사람이 향기로 말미암아 이끌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 람에게는 물리치는 능력이 있어서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죄를 더 짓고, 짓다가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세상에 임할 때 빛을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옵니다. 그러나 어두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좋아하고 불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더 죄를 짓고 더 교회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합니 다. 이런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두 파로 나누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동경해서 나오는 사람과, 더러운 것을 찾아 그리로 나가고 오히려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맙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데 그 능력이 어디서 어떻게 옵니까?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 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했습니다. 이 능력은 성령에 의해서 얻 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말 씀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주 님이 분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 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 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능력있게 전파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는 사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능력까지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부족함을 느껴서 자신이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하면서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담대하게 신앙을 간증한 것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임했습니까? 가장 뚜렷한 것은 오순절 때 다락방에 같이 모여 힘써 기도하는 예수 님의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혀와 같 은 불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과 같이 그때에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성령의 임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한 사도뿐만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새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탄생하였 습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로부터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 보다도 내가 내 신을 만 민에게 부어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나타난 동사는 현재 분사입니다. 시대성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오순절 때 뿐만 아니라 오늘도 임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성 령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축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외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령에 이름과 같이 그 배 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고 했습 니다. 라일(J. C. Ryle)감독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금 글자로 인쇄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말씀 이 그 중에 하나라 고 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그 심령은 다시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 생 수의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어떤 표가 나타납니까? 열매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했습니다. 이 아홉 가지 열매 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면 우리 생활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주님께 노래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시와 찬미의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 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 따라다니던 때와 성령 충만한 때 는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 면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식 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사람에게 나눠주시니라 고 했습니다.

한 성령이나 사람에 따라서 받는 은사는 각각 다릅니 다. 끝으로 큰 확신입니다. 확신은 인간의 위대한 힘의 근원입니다.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모두가 큰 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람에게 아무런 확신이 없을 때 회의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되 어 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대업을 성취하기 원합니까? 큰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 다. 예수님도 네 믿음대로 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 교육은 우리 머릿속에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절대로 큰 힘이 생기지 아니합니다. 우리 가 슴에 큰 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우리는 큰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공은 확신의 산물입 니다. 확신은 우리에게 기적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확신은 산도 움직인다. 는 영국 격 언이 있습니다. 나태와 방심과 안일을 일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절대로 확신이 생길 수가 없습니 다. 정신을 한 목표에 집중시키고 집념과 정성과 열의를 기울일 때 우리 마음 속에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질 때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고 할 수 없다는 단념과 회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합니다. 우리는 확신의 위력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은 나를 움직이고 남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확신으로 무장할 때 모험을 시도하고, 도전을 감행하고, 칠전팔 기의 지구력을 발휘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확신한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큰 확신 가지고 믿음의 반석에 굳게 서서 씩씩하게 인생을 살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2005-05-09 04:27)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