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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로의 부르심 (고전 0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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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후,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언급한다. 분열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항상 존재해 온 문제이며, 신약성경 기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한 논제(論題)로 취금하거나 다양한 방법들로 언급합니다. 열두 사도들조차도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영광이 되리라! 그러나 성도를 그저 알기만 하고 저급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관한 삶이리라! 1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이 바로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1:10-13) 바울의 이 말은 매우 기괴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나누다”(divide)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할되어 이 사람들에게는 이 조각, 저 사람들에게는 저 조각이 주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저 사람에게는 아볼로를, 또 다른 사람에게 베드로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구주도 한 분이시요. 복음도 하나뿐입니다(갈1:6-9).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이렇게 네 파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까! 또 그들이 분쟁(논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고린도 시는 교사와 철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어 자신들이 지닌 지혜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던 곳이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그 본질상 인간 지도자를 따르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도와주고, 또 이해하기 쉽고 쉽게 응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일수록 영적 능력이 풍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말씀의 멧세지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하는 사역자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그 대신 주님의 종들에게로 그 초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에는 결코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3장에서 지적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들을 서로 비교한다거나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인간의 제자를 좇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개인을 숭상하는 사교(邪敎)”적인 풍조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장 드러나 보이는 분이어야 합니다(골1:18).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몇 개의 핵심적인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형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한 가족 속에 속해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말은 신체의 각 기관이 서로 긴밀하게 직조(織造)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의학 용어입니다. 즉, 그들은 한 몸의 지체로서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인된 한 신분(身分)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 그들이 모두 똑같은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바, “글로에의 집”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매우 존중할 만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들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고 올바른 해결자인 바울을 용감히 찾아왔습니다. 그런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것이 자신들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음모극(陰謀劇)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행동은 문제를 호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 악화시킬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역자였으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해 회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의 동역자로(행18:24-28).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9장5절을 통해 흐미하게 추측해 볼 뿐입니다. 바울, 베드로, 아볼로, 이 사람덜은 각각 개성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 역시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였습니다(3:3-8/4:6).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1:13-17)
세례는 신약 교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명심합시다.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는 옛 생활의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로 인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요4:1-2)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베드로(행10:48)도 자신의 동역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직접 세례를 주기도 했으나 세례를 주는 것이 바울의 주된 사역은 아니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세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히의 사람들이 세례으 의미를 너무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잘못된 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985172;아! 그래요, 그렇지만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지요&985173;라고 공공연히 뽑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받은 것을 확언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교회 분열이 비롯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사에게 어떤 물을 사용해서(대개는 요단 강에서 길어온 물) 어떤 특별한 날에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러한 것들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들은 자랑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교회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보다는 사람을 높이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리스보는 고린도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장이었습니다(행18:8). 가이오는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롬16:23). “스데바나 집 사람”은 고린도전서 16장 15-18절에 언급된 자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들의 명단을 지니고 다닌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너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뇨?”(1:18-25)
17절에서 십자가를 언급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지닌 약점을 복음의 능력과 대조하고 있는 이 긴 단락의 도입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어떤 접근방식을 썼는가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의 접근 방법은 세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설명했습니다.
즉, 구주도 한 분이시며 그 몸인 교회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세례받은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세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로 들어가는 영적 세례를 받았다는 증표입니다(12:13)

셋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매우 끔찍한 죽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 예의 와 법도가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형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식탁에 앉아서 개스실이나 전기 의자의 잔인성등을 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용어는 &985172;지혜&985173;입ㅈ니다. &985172;지혜&985173;란 단어는 이 단락에서 여덟번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멧세지에 감히 인간의 지혜가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지혜를 주제로 하고 있는 본 단락(1:17-2:16)에서 바울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지혜를 여러 번 대조시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로 계시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계시된 그 지혜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세 가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그릇 이해함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표적을 중요시했는데, 십자가는 너무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적적인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유대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예수께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에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강력한 정복자로서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은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했던 질문은 유대인들이 이 소망을 얼마나 강하게 갖고 있었는는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그와 동시에, 유대의 서기관들은 메시야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 간파해 내었습니다.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이 그 대표적인 것들로 유댕니들의 메시야관과는 아주 상이한 메시야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 학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의 메시야의 모습을 조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께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24:13-35참조). 또한 장차의 메시야 왕국이 교회 시대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영광되고 전능하신 메시야를 갈망했기 때문에 비천한 십자가를 보고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해 빠진 범죄자의 하나로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나사렛 출신의 할일 없는 목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십자가는 연&54673;함의 표상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의 도구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연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1:25)

둘째. 십자가를 비웃움
이것은 헬라인들이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헬라 철학자들의 심오한 저서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에서 아무런 지혜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인간적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면, 그들은 위대한 구원 계획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나타나 있음을 분별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증거자로 언급하니, 그들은 곧 “지혜있는자”, “선비” 및 “변사” 등입니다.(20절). 바울은 이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인간의 지혜를 언구함으로 해서 각각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바울의 이 질문에 그들은 &65378;아니요&65379;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십자가를 비웃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멸망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18절)

바울은 19절에서 이사야서 29장 14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의 큰 글씨로 “○점!” 이라는 점수를 주셨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에서, 헬라와 로마의 역사는 한갓 “알지 못하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과감히 단언했습니다.(행17:30).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헬라 철하자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사상가들에게도 어떤 업적이 있음을 바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을 체험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능력과 지헤를 믿음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의 내용을 절대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 그는 동일한 내용의 멧세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1:21)이라는 말은 전도 행위가 미련하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선포되는 것의 미련한 것을 통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은(살후2:13-14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심을 깨닫습니다. 즉, 말구유의 예수님, 성전의 예수님, 또는 장터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인간 지혜의 미련함과 인간 능력의 연약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부름받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는 영적 연합을 위한 얼마나 놀라운 토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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