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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믿음으로 (롬 0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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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였었습니다. 바울은 아주 적나라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그들이 제기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 선민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가 되는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받은 민족이라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고 의문에(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유대인들로서 가능한 질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이 이방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질문을 예견하고 거기에 대한 말씀을 3장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제일 중요한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에 유대인의 나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보존하고 전수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때로는 외우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수 하였고, 때로는 일일히 다 베껴 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성실하였으며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점이 이방인과 다른점이며 나은점이라고 바울은 먼저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에서는 유대인들에게서 야기될수 있는 두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 당신 말대로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시겠느뇨? 라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여 우리가 그 언약을 지키는데 신실하지 못했으니 하나님께서도 그 언약을 페하지 아니하시겠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라는 의미는 두가지의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전혀 백안시 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또 한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데 성실하지 못한 불성실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불성실하고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은 다른데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원래 그 속에 거짓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질은 신실하심, 진실하심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변치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변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사변적인 하나님, 궤변의 하나님으로 전락을 시켰습니다. 즉 이들의 세번째 질문이 바로 그것인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드러내게 하는 것이라면 이 불의도 필요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의를 더 풍성히 드러내기 위해서 더욱 악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궤변입니다. 본문 6절에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라고 했고 8절엔 저희가 (궤변을 일삼는 자)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궤변을 구분하는 영안이 있어야 합니다. 궤변은 그럴듯한 달콤한 유혹입니다. 우리가 궤변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은 논쟁이나 사변이 아닙니다. 관념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어&45935;게 나의 삶에 간섭하시고 어&45935;게 나와 함께하시며 내안에서 무슨일을 하시는 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본문 9절부터 18절까지를 가만이 보고있으면 참으로 암담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답답해지고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번 가만히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 이다 치우쳐 한 기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평강의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어떻습니까? 얼마나 무지막지한 죄인들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윤리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푸는 열쇠는 바로 19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함이니라

위의 9-18절 까지의 암담한 상황은 바로 율법아래서의 상황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아래 있는자라는 말과 심판아래 있는 자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말씀은 바로 지옥에 대한 표현이며 지옥의 말씀입니다. 율법아래있는 자들에게 향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의 역할, 율법의 기능을 발견할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 데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중에서 10계명을 대표적인 계명으로 꼽습니다. 주일학교에서는 십계명을 암송시키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는 아직 무엇이 죄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십계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죄인가 하는 점 뿐입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여러분 이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까? 다른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외에 내가 의지하는 모든 대상입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디가지 해야 정말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가 부모에게 잘하고 부모를 잘 공경할수록 우리마음에 드는 생각은 나는 불효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효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상하게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끊임없이 나의 부족한 것을 깨닫고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며 율법아래서 살고 있었고 율법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외의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의는 2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의는 차별이 없는 의입니다. 율법은 차별이 있습니다. 계급이 있고 출신성분을 따지고 지역을 따집니다. 그러나 이 의는 차별이 없는 의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학식이 높은 자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차별이 없는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예외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아래에, 율법 아래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율법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인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가르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선물받듯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값없이 받았지만은 하나님은 가장 귀한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에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외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셨습니까?

느껴보셔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자식을 잃는 슬픔입니다. 자식을 잃는 아픔보다 더 잔인한 아픔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게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값없는 의이지만은 하나님편에서는 가장큰값을 지불하고 사신 구원인 것입니다.

25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제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의 편에서와 하나님의 편에서의 값의 차이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가장 값진 구원의 선물을 가장 비싸게 사서 헐값에 주시는가? 아무 값도 없이 주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 값도 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실때 하나님이 보신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주실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26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서가아니라 예수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아래에서는 구원이 없음은 물론 율법아래에서는 오히려 심판이있고 저주가 있습니다.

그 저주가 바로 본문에서 <의인은 없나니> 로 시작되는 암담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아래서 율법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7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그런즉 자랑할 데가 있느뇨? 있을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여러분도 인정하십니까? 만약에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면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자신들을 자랑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자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의를 드러냈으니 자랑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이 다 뭡니까? 날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고백함과 나의 죄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믿음을 다시 강조하면서 3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29절 이하에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빙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직 우리는 믿음의 법으로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늘 것을 인정하고 또 그렇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이 믿음이 바울의 대작 로마서의 시작이고 로마서의 내용이고 로마서의 마지막입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아래서의 삶에서 믿음아래로의 삶으로 자리를 바꾸어야 할것입니다. 유치원생이 유치원을 졸업하면 국민학교에 입학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율법아래서의 삶에서 믿음의 삶으로, 복음의 삶으로 바뀌어가야만 할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삶이 결코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게 세움니다.

이 말씀은 비로써 율법의 조항을 감사한 마음과 감격한 마음을 가지고 의무로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싶은 열정으로써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복음이가지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갈보리교회성도들의 나음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에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이 우리안에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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