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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사람들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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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우리는 '교회' 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이 많이 있지만 교회라는 이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 자연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교회도 역시 하나님에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인간구원의 대 사역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인간의 모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임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성전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의 근원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외로운 나그네 인생 길에 좌절하고 실망하게 될 때에, 교회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위로해 주고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 귀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으로 들리는 교회를, 세상은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순간부터 세상 사람들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았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집단으로 오해되어 수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하였고 많은 전도자들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황제를 신으로 섬기던 로마정부는 교회를 가리켜 염병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전염병인 장티푸스와 같은 존재로 교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사자 밥으로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교회와 기독교는 하나의 미신으로 생각되어졌고, 그후에 일어난 군국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반 국가단체로 여겨 탄압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2천년 교회의 역사는 세상사람들에 의해 항상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쳐져 왔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얼마나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마침 그곳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답니다. 하루는 어떤 분이 찾아와서 '우리가 그동안 20여명씩 모여 예배를 드려 왔는데 목사님이 안 계셔서 걱정을 하던 차입니다. 마침 좋은 목사님이 이곳에 오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가능하면 매주일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두 번을 가서 예배를 인도했는데, 세 번째 주일 아침에 그 지역의 교민회 임원들이 찾아왔더랍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목사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까지만 예배를 드리시고 다음부터는 오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우리 한인사회가 이렇게 평안하고 단합이 잘되는데,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면 우리 한인사회가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드리는 부탁입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오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들 뿐 아니라, 많은 이민 교회들이 이러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진정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려면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중에 아름다운 교회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안디옥교회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선지자이고 누가 교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바울,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란 영감본위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어느 날 문득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교사는 이성적인 지도자입니다. 성경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와 교사는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 마음이 되어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또한 안디옥교회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구레네'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구레네는 오늘 날 아프리카 리비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안디옥교회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사람들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에서 각종 인종이 모여서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도 있었고, 천대받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 교회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모시고 한 형제자매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여기에 안디옥교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디옥 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든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잘 위로하는 사람이었는지 그 이름을 바나바, 즉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울이라는 사람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게되었습니다. 그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 사귀려고 했지만 모두 두려워하며 아무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을 때에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와서 그를 데리고 제자들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하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노력으로 인해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한번은 전도여행을 하는데 마가라는 젊은이가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바울은 마가를 용납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를 용서하여 다시 함께 일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중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한번 실수한 것 때문에 영원히 잊혀질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어 큰 일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나바는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관용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바나바는 믿어주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실수한 사람, 한번 실패한 사람이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윌리엄 제이 레일리라는 사람이 쓴 '성공적인 인간관계'라는 책에 보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폐쇄적인 사람입니다.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이야기를 듣든,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이러면서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남의 말 다 듣고 나서 '웃기고 있네.' 이러는 분이 계시면 여기에 해당되는 분입니다.

두 번째는, 증거제시형입니다. 남의 말을 듣기는 듣는데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길에서 누구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면 되는데 꼭 '어디 가세요? 누구 만나러 가세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냥 좋아하면 되는데 꼭 '왜 사랑하는데?' 이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되시는 분은 증거를 요구하는 증거제시형에 속하는 분입니다.

세 번째는, 타당성 요구형입니다. 이 사람은 상당히 협조적이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타당성이 있기를 요구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에 사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왜 그것이 너에게 필요한지 타당성 있는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네 번째는, 신앙형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면 나는 뭐든지 다 좋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다 진실이다. 당신이 콩을 팥이라고 하면 그것은 팥이 될 것이고, 해를 달이라고 우기면 달이 될 것이다. 당신은 말하는 것은 무조건 다 옳다.' 이런 사람입니다. 여기에 해당되시는 분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네 가지 유형 중에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부부관계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편이 전화 한 통화 없이 새벽 두 시에 들어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남자 분들은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신하고는 끝이야, 당신 변명도 들을 필요 없어.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이러면 첫 번째 경우인 폐쇄형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론을 다 내리는 경우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고 다닌 거예요? 어디 가서 뭘 하다 왔어요?' 이렇게 경찰이 범인 심문하듯이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두 번째 경우인 증거제시형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당신 회사에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군요. 이렇게 고생을 시키면서도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다니, 내가 사장에게 전화해서 월급 좀 올려달라고 해야겠어요.' 이러는 사람은 세 번째 경우인 타당성 요구형입니다.

'피곤하겠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뭘 좀 차려 내올까요?' 이러는 분은 네 번째 경우인 신앙형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하고 같이 살고 싶으십니까?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참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참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언제나 지켜오고 있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저를 찾아와서는 아무개는 이렇고 아무개는 저렇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저는 '아, 그래요.' 그러고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 공연히 저를 찾아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저는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 이외에는 듣지 않습니다. 본인이 저에게 와서 '이것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죄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몇 사람이 모여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아무개는 이런 사람이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것이 싫으면 여러분들도 남에게 들은 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무서운 죄를 짓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진실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나를 믿어주기를 바란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주고 그 사람의 진실을 인정해 주십시오.

인간관계란 참 어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만 와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는 안보고 싶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 평생동안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살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테레사 수녀가 신입 수녀들을 선발할 때 세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잘 먹을 것'입니다. 잘 먹어야 건강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자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잘 잘 것'입니다. 잘 자는 사람은 염려와 근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베개에 머리가 닿는 순간 잠이 오는 사람, 이런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까지도 꽤 자신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잘 웃을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잘 웃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2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지금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관용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다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믿어주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교회, 점점 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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