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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본분을 회복하자 (행 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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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베드로가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왜 옥상에 올라가 기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는지, 혹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찾아간 곳이 옥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가 마침 점심때였어요. 제6시는 열두 시입니다. 아래층에서는 한창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찌개를 끓였는지 고기를 구웠는지 모르겠지만, 음식 냄새가 옥상까지 살살 올라왔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이제 기도를 마치고 내려가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거예요. 머리 속에는 온통 먹을 것 생각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어요. 하늘에서 밥상이 내려온 것입니다. 아이쿠,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서 기도도 안되고 먹을 것 생각밖에 안 나는데, 하늘에서 밥상이 내려오다니, 이게 웬 떡입니까?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야, 배고프지? 네 맘대로 잡아먹어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먹으려고 보니, 이게 먹을 게 아니에요. 뱀도 있고, 뱀장어, 미꾸라지, 오징어, 돼지, 토끼, 까마귀, 박쥐... 이런 것들뿐이에요.
'아니 하나님, 먹을 것을 주셔야 먹지 이런 것을 어떻게 먹습니까?'
'괜찮다, 먹어도 된다.'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더러운 것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더러운 것으로 나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 옛날에는 내가 이런 것들을 더러운 것이라고 정해 놓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이런 것들도 깨끗한 것으로 정했다. 그러니 염려 말고 먹어라.'
'안됩니다. 이런 것은 절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해 놓고는 왜 먹으라고 하십니까?'
'그래, 먹지 말라고 한 것도 나고, 먹으라고 한 것도 나 아니냐? 그러니까 먹어라.'
'싫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런 더러운 것들은 손대기도 싫습니다.'
'이놈아! 내가 다 깨끗하게 했다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
그리고는 그 밥상이 다시 하늘로 스르르 올라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중요한 계시를 주신 것이 분명한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거든요. 베드로는 아마 밥 먹을 생각도 잊어버리고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먹으라고 하시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로 그때 밖에서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누굽니까? 가이사랴에서 고넬료라는 로마군대의 장교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군대의 장교가 예수를 믿겠다고, 베드로를 모셔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고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아까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 베드로의 환상은 기독교의 전파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 됩니다. 옛날에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라는 과학자가 나타나서 그것이 아니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태양이고 그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말했어요. 그 정도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단 말이죠. 무슨 얘기인가 하면요, 이때만 해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 아닌 다른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생각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상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그 말씀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죠.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베드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시키십니다. 이 사도행전 10장의 사건 이전에 사도행전 9장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울의 회심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래서 바울이라는 출중한 전도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바울을 예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인 베드로를 통해서 이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사람도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세계적 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변화에는 저항이 수반됩니다. 하물며 이러한 커다란 변화와 전환에는 얼마나 커다란 저항이 있었겠습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베드로도 그렇게 저항했지 않습니까? 물론 순수하고 또 충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저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 즉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라고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을 위한 충성의 표시였겠지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으셨어요. 우리가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때로 이러한 일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변화에 직면하게 되고, 그 도전 앞에서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충분히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와 핑계를 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과거의 기득권이나 습성에 안주하게 되면, 그 조직이나 개인은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거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게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시 베드로에게는 뱀이나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변화하기를 거부했더라면 이 교회 역시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하고 또 하나의 유대교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정확히 깨닫고 그 사명에 전념함으로써 교회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본분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잘 운영해 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했는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그대로 유지시키셨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교회를 무너뜨리셨어요. 교회는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운동이 결코 아닙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하면서 자기들만의 교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 불릴 수 없게 됩니다. 이단의 한 가지 특징이 바로 그런 폐쇄적인 속성이지요.

자기들끼리 잘 지내고 있던 교회를 무너뜨리신 하나님은 그 교회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셨어요. 그렇게 흩어진 교회는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고, 이 베드로의 환상을 통한 계시 이후에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본분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우리 교회만 알고 우리 교회만 살찌우려고 할 때 그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결국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냉철하게 판단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본분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존재하고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게 될 것인가, 아니면 본분을 착각하고 있다가 그만 무너지게 될 것인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모습이 안으로만 향하는 것이었다면 과감하게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밖을 향해야 합니다. 그렇게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습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경제적일 수도 있고, 낭비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교회의 본분이라고 할 때, 그 중의 한 부분을 우리는 선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하는 일에 주력하게 될 때 우리는 그 교회가 본분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본분입니다. 그만큼 선교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90년대에 들어와서 선교에 큰 열심을 나타냈습니다. 어느 정도 액세서리로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90년대 말에 들어와 IMF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액세서리로 달려있던 선교는 모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이제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말 본분으로서의 선교에 매진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두고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부분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본분을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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