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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을 지키라 (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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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는데 그 첫번째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일곱 교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일곱 교회는 주님이 지명하신 대로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말합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일곱이란 숫자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완전수를 상징했던 만큼 일곱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의 모든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들은 그 교회들이 가진 역사적 환경과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지적과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들은 자기 교회에 보내온 편지만 읽고 만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까지 서로 돌려가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비단 그 일곱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때 있었던 모든 교회에 해당된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그 말씀은 그 시대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니 이후로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세세토록 전해질 계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믿음의 공동체
 
요한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입니다. 여기에서 '별'은 교회의 사역자, 또는 봉사자를 말하고 '촛대'는 교회를 뜻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그리스도의 손에 사로 잡혀서 일한다'고 고백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은 바로 이 구절을 상기시킵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온 지상의 교회 사이 사이를 두루 살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지상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의 보호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정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교회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앙의 공동체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유독 자기 교회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교회로 신도를 인도하는 것이 전도라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게 됩니다.
 
또 흔히들 '교회에 충성한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학적으로는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그 자체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성령께 교회를 통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점을 잊고 교회 그 자체에 밀착하기 때문에 교회가 특정한 개인의 왕국을 이루는 경우까지 있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인정해 주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첫번째로 하신 말씀은 칭찬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내했느지를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말을 듣는 것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것은 곧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래 남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삽니까? 또 학생은 선생에게, 아랫사람은 위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과정이 서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정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차원을 더 높여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날 인정해 주신다고 믿게 될 때 그는 어느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을 때 생기는 능력, 그 힘이 곧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소상히 알고 계셨습니다. 악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거짓 사도들의 사이비 교리와 악한 가르침을 정확히 분별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은 것, 많은 외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충성한 것을 다 아시고 그들의 훌륭함을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이 대목에서 얼마나 감격하고 힘을 얻었을지는 짐작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의 잘못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꾸지람이 없고 칭찬만 하는 관계는 참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나 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망의 내용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간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는 사이에 맨 처음에 가졌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을 모두 잃어버리고 영적으로는 메마른 상태에 놓이고 만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의 말씀은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게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고 누구든지 붙잡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배겼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그 열심과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책망은 사랑하는 연고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 속에는 또 다른 의미의 책망도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면서 자연히 옆사람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그 사랑을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어 못견디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갑자기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결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 넘칠 때 그 사랑이 자연스레 남에게 미쳐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책망하시기를 길게 하지 않으시고 곧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고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2:5)고 일러 주십니다.
 
우선 어디서부터 그렇게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차근차근히 짚어서 '생각하고' 생각이 나면 얼른 그것에서 돌이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처음 행위' 즉 그 순수했던 시절의 처음 사랑을 가지라고 충고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이렇게까지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극진하신 사랑은 '자상한 처방'보다는 '따끔한 꾸짖음'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인간 관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진정 관심이 없는 상대에게는 잘못을 빨리 보면서도 충고는 하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 보다는 뒤에서 흉을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그의 잘못이 드러날 때 그것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따금한 책망은 곧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생의 승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자상한 처방을 주신 후 이런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이 경고의 말씀은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종내는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것은 나 개인에게도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내가 회개치 않으면 나에게서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만 내가 받드는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 진의를 알고 보면 이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교회가 빛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입니다. 교회에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은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신앙 생활 뿐 아닙니다. 나의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나의 사업도, 가정 생활도 제대로 해 나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이 험한 인생길에서 주님이 내 앞에서 빛으로 인도하시지 않으면 나는 길을 잃고 헤멜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제외된 신앙인은 지옥의 삶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된 실례로 주님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니골라는 사도행전 6장 5절에 언급된 일곱 안수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경에 쓰인 것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거꾸로 뒤집혀서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성도들을 나쁜 길로 미혹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촛대가 거두어 지면 바로 그런 인물처럼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되찾은 승리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 두려움을 일시에 걷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그 옛날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에덴 동산의 과실을 꿈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생의 승리자는 회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성공하고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노정에서 실패하고 잘못 갈 수 있는데 그때 그것에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승리의 길,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길목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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