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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른 가정교육 (딤후 0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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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된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던 아버지가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며 '다들 그렇게 한단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삼춘이 찾아와 형에게 소득을 속이고 세금을 덜 낼 방법을 의논하면서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한단다.'
아이가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하루는 절도행각으로 정학처분을 받고 집으로 쫓겨왔습니다. 부모는 놀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아이는 고개를 똑바로 들며 말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해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17:25)

서양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한 사형수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고 이제 집행을 당하게 된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를 들은 교도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극악한 사형수라도 역시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찾는 법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수가 만나고 싶어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형수가 마지막 작별키스를 나눌 때 어머니의 혀를 세게 물어뜯어 어머니의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형수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날 사형수가 된 것은 어쩌면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예쁜 장난감을 하나 몰래 집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 뒤 나는 그만 남의 것이지만 내 맘에 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집어오게 되었고 나중에는 남을 헤치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형수의 행동이 올바르다거나, 정당하다고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형수의 비극적인 마지막 고백을 들으면서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성경 속의 인물로 이 사형수의 어머니와 동일한 실수를 범한 유명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에서 수중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의 악행을 알고도 이를 꾸짖고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또 이러한 소식을 들은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4:11-21)

엘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요 제사장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의 가정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문제없는 가정이 있을까 만은 엘리는 가정의 문제점을 바로 해결하지 못해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비극을 가져오고야 만 것입니다. 이제 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가정의 규율이 무너졌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규율이라는 것이 있고 이 규율에 따라서 그 가정의 사회적인 위치와 가치가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에는 규율의 바탕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가정규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합니다. 엘리 가정은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바탕 위에 사사적인 규율, 제사적인 규율과 전통을 세워나가는 가정이어야 하는데 그 가정의 신앙적인 권위와 지도자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가정적인 규율과 방향을 상실했습니다. 이렇게 엘리 가정의 규율이 무너진 이유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 신앙중심이 아니라 의식중심, 말씀중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욕중심으로 이 가정의 규율이 송두리채 무너져 마침내는 그의 아들들은 불량자가 되어 다시 돌이킬 여지가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중심, 신앙중심, 말씀중심의 규율을 바로 세워서 자녀들을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신앙으로 길러야 하겠습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고 귀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짓밟는데도 심상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상 2: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요, 그 자식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분노에 가득찬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전혀 그와 반대입니다.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젖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며 수종 드는 일을 했습니다. 웬만하면 “서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년만 더 데리고 있겠습니다.” 했을 터인데 한나는 젖떨어지자마자 냉정하게 떼어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도 구원했습니다.

둘째, 가정교육의 문제점입니다. 우리 인생의 보금자리가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가정이란 바탕에서 태어나서 가정이라는 환경 속에서 장성하여 생활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가들은 말하기를 가정은 학교중의 학교요 부모는 스승중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은 교육중의 교육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육은 인격을 조성합니다. 문화를 조성합니다.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원동력이요 활력소입니다. 엘리는 가정교육에 무관심하였습니다. 가정교육이 바로 되지 못하는데서 문제아동이 발생됩니다. 그러면 엘리 가정의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삼상2:29절에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의 망령된 행동에 대해서 바로 책망하고 시정하거나 지도하지를 아니한데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는 교육상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보다 자녀들을 더 귀중히 여긴데 잘못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으나 엘리는 하나님께 범죄한 자녀들에게 채찍조차 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 자녀들의 식물을 더 중요시 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영혼보다 저들의 육신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규율이 무너지고 교육에 잘못을 범하게 된 근본원인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첫째는 가정적인 전통을 무시한데 있었고, 둘째는 가정적 사명을 잊어버린 데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정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성과 책임을 잊지 맙시다. 신앙적 규율과 신앙적 교육을 바로 하여 영원히 빛나고 행복한 가정으로 이끌어 갑시다. 그 길만이 바로 사는 길이며 복 받는 길입니다.

어느 집에 귀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그를 받들고 위해 주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점점 크면서 동네 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때려서 곧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고민하는데,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라고 나섰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같이 놀던 친구를 별 이유 없이 심하게 때렸고, 이것을 본 청년은 그를 불러 사정없이 몇 대 때렸습니다. 그 아이는 비록 친구를 때렸지만, 이 청년에게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얻어맞았으니 억울하고 분하고 아프기도 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줄은 몰랐어요. 지금까지 남을 때리기만 했지 맞아보기는 처음이니 맞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 느꼈어요'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친구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을 때릴 줄만 알면 어찌합니까? 맞아서 아픈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가 부러지는 것으로 연결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방법을 보면 자식이 어릴 때는 매를 사용하되, 장성하게 되면 매를 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매로 키우고, 점점 자라면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아이의 수준에 따라서 사랑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정적으로 이것을 하지 말라. 저 것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훈계하고, 일단 자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에 따라서 표현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의 부정적인 표현일 뿐 내용은 같다는 말입니다. 새끼를 낳아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동물의 관계를 어미와 새끼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미와 새끼라 하지 않고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데에는 먹고사는 방법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뮬러 목사님이, 어느 날 어떤 청년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는데 나를 잘못 초청한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23년 전 아홉 살 때였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과일 가계에 서 먹음직한 사과하나를 훔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의 따귀를 호되게 때렸습니다. 돌아보니 바로 뮬러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제 팔 계명을 모르느냐?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잘못을 깨우쳐주시고 교육시켜주신 것이 고마워서 오늘 이렇게 초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예쁘고 착하다고 버려 두는 부모가 되지 말고 조지 뮬러 처럼 채찍을 들어서라도 잘못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훈과 지혜로 자란 자식은 나중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몫을 감당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해갈 것이고, 부모들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가정의 꽃은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못 다한 일을 하려고 세상에 온 대타자가 아닙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모는 이것을 발견하여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녀 양육의 의무입니다. 자녀의 인격 교육에 있어서는 신앙을 확립시켜주고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라 훈련시켜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그 또래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인격적 체력을 강화시켜주어야 합니다.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녀를 여러 명 낳아 길렀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자랐고 공부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일도, 성경을 읽는 일도, 기도를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모두 결혼하였고 얼마 후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위로를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을 깨닫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이제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녀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자기의 가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가정을 이루었고 자녀들을 길렀습니다.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신앙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제 자식들에게 가서 교회에 나가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식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을 세우지 않고 자식들을 길렀던 것이 얼마나 실수였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시기 원하십니까?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십시오. 기도하는 부모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법입니다. 유명한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어떻게 하면 청소년 자녀를 잘 가르칠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1.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것
2. 부모가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
3.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지침을 마련해줄 것
4. 다채로운 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할 것
5. 아이들을 주안에서 따끔하게 훈계할 것
6.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칠 것

성경에“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127:3-5) 하였으며, 자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명언들을 찾아보면 '만일 당신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자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라.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의 공로는 결국 당신에게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몽테스키외)
'교육의 가장 큰 비결은 항상 어린아이들을 불멸의 존재로 인정하는데 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이 세상에서만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교육 과정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을 세속적인 존재들로 만들 수밖에 없다.'(페르시아 경전)
'어린아이들의 영원한 삶을 위해 가르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영혼은 결국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 것이다.'(멜빌) 등이 있습니다.

'도대체 자녀교육은 언제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요?' 한 여성이 교육가인 프랜시스 웨이랜드 파커에게 물었습니다. '꼬마 나이가 몇 살이지요?' '다섯 살입니다' '아이고 맙소사! 부인, 시간 낭비할 틈이 없어요, 서두르세요, 벌써 가장 중요한 5년의 시기를 놓쳤습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이들로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지혜는 물론, 부모의 영광이 되는 자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 근심과 고통이 되는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교육을 위해 좋은 참고가 될 미국의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발리스키라는 부부의 가정은 10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그들 가운데 6명은 선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갔고, 4명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선교활동을 도왔습니다. 발리스키 가정의 맏아들인 랄프는 부모로부터 강렬한 신앙적 영향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
첫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둘째, 그들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힘들고 귀찮은 일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셋째, 아버지는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허물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셨지만 결코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의 결정은 대법원의 판결과 같았습니다.
넷째,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공평무사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벌을 받았고, 잘했을 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과 삶이 일치하셨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우리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다 성장하여 중년이 된 자녀들의 기억 속에 이와 같은 인상과 추억이 깊게 남을 수 있다면 그 부모는 경건한 부모로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끝으로 다함께 따라 읽기 바랍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아무쪼록 올바른 가정 교육과 바른 교훈을 할 수 있는 부모, 우리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하고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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