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롬 03:1-8)

첨부 1


지난시간 우리는 율법은 장신구가 아니라 지켜질 때에 비로소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율법을 마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로 수행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구지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구분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단지 특권이상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했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로 부터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유럽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이 직무유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돌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통하여 많은 인간들에게 돌세례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돌봐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무수히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왜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번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날것을 명령하시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 여호와가 항상 함께할 것이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오직 그 말씀만 의지하여 과감히 지금까지의 모든 기득권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수천년이지난 초대교회 시대에 이르기 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약속을 변치 않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혹 우리들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가 어떠한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 항상 최고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믿는자 안믿는자에 관계하지 않으시고 햇빛과 비를 골고루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동안 무수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무던히도 많이 뱉아놓고서는 자신의 갈길로 떠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도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거나 말거나였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말씀은 &65378;어떤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65379;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혹 당신을 중심으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당신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해 놓으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분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중심으로, 진실로 찾는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은혜를 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잊어버리고 제갈길로 가고있는 그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다시 당신앞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더욱 그들을 사랑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분 입니다.
그분은 거짓이 없으시며 항상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것을 포기하실 준비까지도 해놓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전혀 감수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대인들의 외적인 모습을 바라보고서는 하나님을 불의의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를 배반한다 할지라도 나는 나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행위에 관계없이 항상 동일한 분으로 우뚝서 계신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죽음은 그것을 필요로하는 사람에게나 그것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에게 항상 유효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뿐이요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를 향해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박해로 신음하고있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바라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 백성을 해방시킬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 동족들이 너를 누가 보냈냐고 물을 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65378;나는 여호와라 스스로 있는자&65379;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65378;나는 나다&65379;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65378;나는 나다&65379;라는 말이 과연 어떤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첫째는 인간들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으 영원전 부터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항상 변하지않는 존재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나를 잊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너희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있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제나 오늘도 또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순간에도 바로 나를 지켜주고,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비록 나는 생활에 바빠서, 삶의 짐이 너무 버거워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속에 휩쓸려 살고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까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호해주셨으며 우리가 가장 어려움속에 처해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자비와 상랑과 능력의 팔을 내미시고 구원을 갈구하는 우리의 손을 내미시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은 모두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참되신 분이십니다.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어찌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냐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를 미혹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역시 똑같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모르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실 수 있으며, 심판을 하실 수 있겠는가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지상천국을 만드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따로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심판하실 수 밖에 없고 죄에대한 댓가를 올바로 지불해 주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요, 정의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바울은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고 우리의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참되심이더욱 빛나게 된다고 기록합니다. 다시말해서 우리 잘못에 대한 정당한 댓가만이 참으로 올바른 의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즈음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 혹은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중에 상당히 재미있는 모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흔히 분배의 정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분배의 정의라는 말이 양적 균등분배를 의미하느냐 아니면 질적인 균등분배를 주장하느냐에 상당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양적인 균등분배를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나 그 일의 질에 관계없이 똑같이 분배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상당한 논리적 모순이 숨어있습니다. 다시말한다면 누구든지 어렵고 힘들고 고질의 노동력은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제공한 노동력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받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와같은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제 비생산성과 경제적 가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때문에 진정한 정의는 자신의 노력의 댓가만큼의 보수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그 행위에 상응하게 댓가를 치러주는 것이 바로 정의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당연한 결과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사랑을 불의로 주장하고 그분께 돌을 던지는 그 인간들의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정의로운 분으로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직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망쳐놓게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기전에 한가지 소원을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법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사형수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상례여서 그 어머니를 아들에게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희한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별의 키스를 하던 아들이 어머니의 혀를 물어뜯어 잘라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어머니의 혀 때문에 자신이 죽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형수는 어린시절 우연히 길가에 놓여져있는 핸드백을 줍게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머니에게간 아들이 핸드백을 어머니에게 건네자 어머니는 그 속에 돈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아들을 잘했다고 칭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칭찬을 들은 이 아들은 결국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싶을 때마다 아예 남의 물건을 훔쳐 집으로 들어가게끔되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형무소에 갖히게 되었고 점점 죄악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적도 해주고 깨닫게도 하고 때로는 감싸주기도하며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때로는 따끔한 충고도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징계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그의 불의로 돌리려는 것은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 사고방식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항상 우리곁에서 때로는 감싸안아주시면, 때로는 충고해주시고, 때로는 이런 저런방법으로 깨닫게도 해주시며, 때로는 약간의 징계를 통해 우리를 올바른길로가도록 항상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나만 미워하실까? 생각하지 말고 바로 나를 올바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섭리임을 깨닫고 올바로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지막까지도 자신들의 사고방식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려는 교만한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면 자신들이 악을 더 행하여서 하나님을 더 의롭게 하자고 떠드는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이없고 교만한 발상입니까?
죄를 더 많이 짓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값진것이 될 수 있지 않냐는 발상이며,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일단은 죄를 많이 짓고 보자는 그런 생각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구원된다고 주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더욱 빈정대며 이렇게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65378;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말을 한다고 하니&6537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죄값이 크면 그 구속의 은총이나 속죄의 감격이 무한히 커질것은 당연하겠죠? 그렇다고 이쑤시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 100년생 소나무 한그루를 모두 깎아버리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범한 모든 행위들은 결국 그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그 죄과가 없어져야만 할까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해 한 선량한 청년을 선생을 팔아넘기는 철면피로 만들어 놓으시고 각본대로 팔게 하신 하나님께서 악독한 감독이요, 불의한 하나님이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을 완성해 놓으셨을 겁니다. 또한 죄는 어디까지나 죄입니다. 그 결과가 엄청난 이익을 가져왔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죄인은 죄인이요, 죄는 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도 우리를 향해 한없이 참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을 한업시 배반하고 멀어지려하는 우리를 향해 한없는 인내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올바로 세우시기 위해 열심을 다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관계없이 나와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뿌리위에 놓여진 도끼자루를 잡는것을 미루시고 이제나 저제나 우리를 통해 나타날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혹시 오늘 예배에 나올 때 정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또 망치를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물론 안가져 나오셨겠죠?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가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 인생의 비석에 묘비명을 각인하려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큰 대리석에 묘비명을 각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먼저 살다간 많은 선진들의 묘비명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묘비명에는 무엇이라 쓰여있습니까?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지금까지 각인해온 나의 묘비명을 읽어봅시다. 어떤이들은 아직도 써야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이미 그 대리석이 자잘한 글씨로 &44876; 차가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묘비명에는 어떤글이 각인되어 있습니까? 지금까지 못되고, 하나님을 떠나살려고 발버둥치던 기록들로 메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새롭게 묘비명을 각인하여 나갑시다. 지금까지 어떤글로 채워졌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부더 남아있는 부분에 어떻게 채워지는 가가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라고 써야하겠습니까?
우리의 아들 그아들의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먼 훗날 나의 묘비명을 읽을 때 과연 어떻게 각인된 내용을 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렇게 각인합시다.
&65378;평생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다가 모든이들의 빛나는 신앙의 별이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을 받고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며, 참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 품에 안긴사람&65379;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