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 (행 02:22-36)

첨부 1


오늘의 본문말씀은 베드로 설교의 끝부분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부분이면서, 동시에 결론적인 말씀을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베드로 설교말씀의 주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문제를 대략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실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그대로 설명할 뿐입니다. 마치 신문기자가 어떤 사건을 보고 육하원칙에 의해서 기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이 문제를 사건적으로 말씀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성경을 들어 말씀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오랫동안 예언해왔고 예표적으로 말씀해왔던 그 사건들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본문말씀에 나오는 바 다윗의 하는 말씀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베드로는 이처럼 성경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와 온 인류, 특별히 구원받는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단순히 어느 싯점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문제는 우주적인 사건일 뿐더러 우리 생명과 관계가 있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주적으로, 동시에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실존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결론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문제를 먼저 십자가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를 믿는 데에 걸림돌이 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한번 살펴보면, 그 첫째는 가룟 유다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에게 팔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굉장히 못마땅한 일입니다. 석연치 않은 일입니다.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자기 제자에게 팔릴 수 있느냐, 그것도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의 하나 가룟 유다에게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학급에서도 40명씩 되는 학생 중에 못된 아이가 하나 있어보십시오. 대번에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러나 하고 그 선생을 탓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식이 다섯이 아니라 열이라도 그 하나가 요샛말로 문제아다 싶으면 당장 그 부모에게 질책이 돌아갑니다.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런 불량배가 나왔을꼬, 부모가 신통치 못한가보구먼 하고 흉을 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 창녀를 딸로 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전공이 교육학입니다 마는, 딸이 엇나간 탓에 자녀교육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자녀는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라고 말하려 하면 자신의 딸이 걸리거든요, 마치 교인들이 '제 딸이나 잘 가르치지' 하고 손가락질할 것만 같거든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으셨습니다. 삼 년 동안 무엇을 가르쳤기에 제자에게 팔렸나, 많지도 않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저 모양이니 예수는 신통치 않은가 보다 하는 부정적인 반응이 따를 밖에요. 가룟 유다, 큰 걸림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고난과 더불어 큰 비난도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가룟 유다의 사건을 극복하지 못하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를 두고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을 앞에 놓고 처음 입을 열어 '가룟 유다는 성경말씀대로 제 갈 곳으로 갔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가룟 유다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불쾌한 기억이 다시는 떠오르지 않도록 열두 제자의 자리를 맛디아로 채웁니다. 열 한 사도만으로는 그 빈자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룟 유다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 빈자리를 맛디아로 메꾸게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신앙적으로 성서적으로 극복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에 맛디아를 선출해서 열두 사도의 반열에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시절에 되어진 일입니다.

두 번째 걸림돌은 십자가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으셔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희생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본디 십자가는 끔찍한 죄를 범한 사람을 길가에 발가벗겨서 매달아놓고 처형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설교 가운데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우리가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는 복음은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 일에 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로마를 향해서 쓴 편지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제자된 것,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기독교인이란 누구인가 하고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십자가의 그 뜻을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구원의 유일한 길로 여기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이 좋고, 예수님의 덕성이 좋고, 예수님의 철학이 좋아서 나는 예수님처럼 살랍니다, 하고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는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제사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십자가 안에서 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인홀트 니버(Niebuhr, Reinhold)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 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일리 있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어찌 보면 처형당한 죄수의 모습이요 가장 부끄러운 이야기요 가장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를 가장 귀중하게, 가장 영광되게, 가장 놀라운 기적으로 능력으로 한번 받아들여보십시오. 그 때에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영화롭게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십자가로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명하는 십자가를 한번 자세히 보십시다. 십자가는 accident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 속에, plan속에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베드로의 논조입니다. 본문 23절과 3장 18절, 4장 28절, 13장 29절에서 거듭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님을,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되어 내려오던 것이 오늘에 성취된 것이다, 오랫동안 예표로 내려오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체가 나타난 것이다-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십자가는 우주 중심에 있는 사건이요, 성경 중심에 있는 사건이요, 모든 복음의 초점이 되는 사건이다, 라고 설명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23절)'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이것은 한마디로 예정(豫定) 혹은 예지(豫知)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 예지-미리 정하신 바요 미리 아신 바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하고 율법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요, 지키지 아니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를 한번 보십시오. 개인적인 상해에 관한 율법, 재산 피해에 관한 율법, 백성의 종교적 사회적 책임에 관한 율법, 안식일과 절기에 관한 율법, 번제&8228;소제&8228;화목제&8228;속죄제&8228;속건죄와 같은 제사에 관한 율법…… 이렇듯 지켜야 할 수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대부분은 제사가 차지합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를 지었거든 어떠한 방법으로 어떤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제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 앞에 있을 십자가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요 prototype입니다. 예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에 십자가사건이 없었다면 제사는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체 없는 그림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사건을 오랫동안 예언되어 내려오던 것이 오늘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정, 예지 가운데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 따라서 십자가는 절대 실패가 아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망가려 하시다 잡힌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피할 도리가 없어서 그만 올무에 걸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니 어떤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교단에서는 '예수는 정치운동 하다가 제자에게 팔리는 바람에 그만 서른 셋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예수는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한다'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고 나서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작품입니다. 온전한 것이요 계획된 것이요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데서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베드로 설교말씀의 주제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십자가에 나타나 있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희생적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사랑의 질을 말로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깊이는 자기희생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랑한다'라는 말이 아주 흔하게 사용됩니다. 마주 보기만 하면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쉽게 내뱉습니다. 하루에 수천 번씩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던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랑과 함께 자기희생을 얼마나 하느냐에 있습니다. 자기희생이 얼마나 가능합니까,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그것이 사랑의 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한다고 하면서 전혀 자기희생이 없습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은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이 있는 사랑만이 참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의를 위하여 내 의를 희생합니다. 상대방을 옳은 사람 만들기 위하여 내가 죄인 됩니다. 상대방을 온전한 사람 만들기 위하여 내가 무능한 사람이 되고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실, 진정으로 사랑을 해보십시오. 나의 희생쯤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부끄럼 당하는 것, 고생하는 것, 죄인 되는 것, 누명쓰는 것이 조금도 가슴아프지 않습니다. 이렇듯 자기가 완전히 소멸될 때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자기사랑, 자기희생을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한다'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의 계시-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있음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설교말씀의 두 번째 주제는 부활입니다. 부활의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거친 바다를 잔잔케도 하시고…… 여러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한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가 하나님이다, 메시야다, 위대한 분이다, 우리 구주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적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저가 우리의 구주 되신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셨다고 강하게 지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부활사건 안에서만 이적기사가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부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적사건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봤댔자 하루 지나면 다시 배고플 것을, 장님 눈뜨게 해봤댔자 좀 있으면 죽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마도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번 죽기도 힘든데 나사로는 두 번씩이나 죽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장례비용도 만만찮게 들었을 테니까요. 사실 살아봤댔자 별것 아닙니다. 그러니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하고 봉사하셨다고 아주 추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찾아다니시면서 먹을 것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성경 안 읽어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제한 일이 없으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환자를 고치셨다고 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난 환자만 환자랍니까? 정말 고치시려거든 유대의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치실 일이지, 몇 사람 고치신 것 가지고 되겠어요? 하실 양이면 80세까지 사셔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셔야지 3년 가지고 되겠어요? 이러한 이적이나 구제로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는 데에 역부족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만이 그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없이는 예수님의 이적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사건이 중요합니다. 부활사건이 사망권세를 이김으로, 그것이 예수님 자신만의 사건이 아니라 내 죽음, 내 부활로 직결됩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죄 사함 받고, 그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부활합니다. 그럼으로 내가 예수 믿게 됩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우리의 구주 되심을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주 되심의 증거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따라서 그 죄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베드로는 거듭 강조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32절).'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모든 죄인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제가 어렸을 때에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이미 회개했지만, 다시 한번 회개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시골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좀 출출해지면 고구마 밭으로 들어갑니다. 고구마 밭을 직접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고구마가 땅속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 땅은 봉긋하게 솟아 균열되어 있습니다. 땅이 갈라질 정도로 그 속에 고구마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간 갈라진 땅을 손으로 파서 고구마 하나를 따먹습니다. 하나쯤 먹는다고 해서 주인이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쉽게 따먹겠다고 고구마줄기를 잡아당깁니다. 그 줄기에 붙은 고구마는 크건 작건 간에 다 딸려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따먹고는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 짓을 많이 했습니다. 고구나 하나만 따면 되는 것을 줄기 채 뽑아서는 하나만 먹고 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려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망권세에 매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려 하시는데, 여기에 딸려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을 증거 하다 죽은 사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단 말입니다. 별수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까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설교의 세 번째 주제는 증인입니다. 본문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하지 않고는 증인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야 증인될 것이 아닙니까? 체험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책을 통해서 얻은 간접경험으로는 안됩니다. 생활 자체가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좋은 약이 있다 하더라고 그것은 내가 먼저 먹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먹어보고 건강해진 연후에야 좋은 약이라 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먹어보지도 않은 채 좋은 약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내가 체험한 연후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증인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 하는 성경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서 격동시켜야 합니다. 그럼으로 믿어지고 이해되고 불이 붙고, 나아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할 충성이 있어야 증인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과 함께 핍박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증인될 수 있습니다. 요즘 보면 범죄현장을 목격하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증인 좀 되어달라고 하면 모른다고 발뺌하기 일쑤입니다. 손해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 성령을 받음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문도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겉보기에는 간단한 한마디의 말에 지나지 않지만, 그실 무척이나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이 아직은 시퍼렇게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정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보십시오. 로마가,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의인이신 고로 사망에 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증인이 됩니다. 그럼으로 저들은 '내가 증인이로다' 하고 목숨을 걸고 나섭니다. 저들은 예수님처럼 죽는 것까지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담대하게 말할 수 있노니(29절)' 합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 담력 가운데는 성경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다윗이 어떻고, 시편이 어떻고 하면서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 받은 것만으로는 담력이 충분치 못합니다.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확신이 설 때에 비로소 담력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예수는 한 사람의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자신들을 위하여 오신 메시야입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야로 족합니다. 그러나 이방사람들에게 메시야라는 말은 문화적으로 별로 반갑지 않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개념이 있었기에 메시야라는 말 쓰기를 별로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대신 주와 그리스도를 함께 썼습니다. 사도행전적 신앙고백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전에는 메시야라는 말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많이 나왔지만, 사도행전 이후부터는 주로 '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방사람들에게는 '주'라는 말이 더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마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주'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본디 하나님의 이름은 따로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할 때에는 반드시 '주'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노예입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주인입니다, 하는 뜻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말이 '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로 '큐리어스'라고 하는 '주'는 '여호와'의 대칭(對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도나이'의 대칭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분히 히브리적입니다. 그러나 헬라적으로나 이방적으로 볼 때에 '주'라는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가장 바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라는 고백은 세계적 고백이요 우주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을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이 증거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