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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보라 (행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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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말씀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구걸을 위하여 미문에 앉아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입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됨으로 성전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극적이고 희한하고 놀라운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를 다시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초대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을 공부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요, 배우는 교회요, 열심히 모이는 교회요, 표적이 있는 교회입니다. 말씀만 있고 세상적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으로 표적으로 나타나는, 많은 이적과 기사가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한 은혜 가운데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림으로 유무 상통하는 교회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서로서로 가진 물건을 나누어 쓰는 교회입니다. 유무상통 함으로 아무도 부족함이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영육적으로 지식적으로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느 모로 보아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주 흡족한 교회입니다.

유무상통 하는 사회라고 하면 혹자는 공산주의를 떠올립니다마는, 그실 공산주의는 여러 면을 고루 생각했던 초대교회와는 달리 균등분배라는 한 면만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로 필요에 따라 평등하게 나누어주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능력이나 계급에 따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평등하게 나누어주는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입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평등은 사랑으로 이루어야 하고, 깊은 데서 오는 자발성, 서로 친교 하는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봉사심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혁명으로, 피로 평등을 이루려 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남을 죽이면서 평등하고자 했습니다. 책임질만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구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 년에 백만 명을 숙청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더는 견디지를 못하고 오늘날과 같이 곤두박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정치 체제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상(理想)은 좋습니다.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 없는 사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근본적 권위가 있고야 그 이상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분배는 약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 없는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지, 얼마나 이상적인 세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이상적인 세계도 자칫하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동기가 되어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윤택해질 때에 사람들은 곧 부의 근원이 되는 영적인 문제는 망각하고 물질의 문제, 평등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근본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멀리하고 물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사건일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시기 위하여 그 능력을 행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병고침 받은 것, 물질에 대한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배는 고프지 않겠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도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비록 초대교회가 은혜 충만한 교회였지만 보십시오. 벌써 물질로 시비가 생겼습니다.

분배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질로 명예를 사려고 하는 등 복잡한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 일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심이요 생명이라고 웅변합니다. 은혜 충만한 초대 교회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이, 그 표본적 사건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 구 시 기도시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의 시간법은 이렇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하고 있습니다. 해가 뜰 무렵이 한 시요, 해가 질 무렵이 열두 시가 됩니다. 따라서 여섯 시는 정오가 됩니다. 이렇게 미루어볼 때에 '제 구 시'는 우리의 시간으로 오후 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제 구 시 기도시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율법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오전 아홉 시와 정오, 그리고 오후 세 시, 이렇게 세 번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루에 세 번이나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일은 언제 하나요? 그래서야 먹고 살 수나 있겠어요?'하고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루에 세 번 모두 성전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한 번만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듯 유대의 율법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에는 잠시 일을 멈추고 기도를 드립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유대사람이 아홉 시 땡하면 기도합니다. 열두 시 땡하면 기도합니다. 세 시 땡하면 기도합니다. 이렇게 저들은 일시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밀레의「만종」이라는 그림이 있지요. 언젠가 밀레가 그 그림의 배경으로 삼았다고 하는 들녘을 직접 가보았습니다. 그가 살던 집에도 한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더군요. 불후의 명화인「만종」이 바로 그 초라한 부엌에서 그려졌다고 합니다. 요즘은 환경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마다 훌륭한 아틀리에를 꾸며놓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도 밀레의 그 그림만큼 훌륭한 작품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밀레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그 생활을 그림에 담은 것입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일을 하다 잠시 멈추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단순히 참 경건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뒤쪽으로 멀리 종탑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그림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들녘에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땡하고 성당의 종소리가 울릴 때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손을 멈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시간입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 구 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를 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믿는 기독교인입니다.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나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유대의 관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그 관습을 행합니다.

물론 나쁠 것은 없습니다. 좋은 관습은 계속 지켜야지요. 성전에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하고, 회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좋은 관습이기에 비록 유대의 관습일지라도 그들은 계속 지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구 시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독교인이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더 경건한 유대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교회를 더 엄격하게 지켜나가고자 노력합니다. 때문에 비록 갈릴리사람들이지만 기도시간인 제 구 시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 미문에는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구걸하기 위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구걸밖에는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성전 입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예배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이 좀 경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문간에 앉아 있으면 그럭저럭 얻고 먹고 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에 그를 메어와 성전 미문에 앉혀놓았다가 저녁에 다시 메고 갑니다. 이렇듯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해서 먹고사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앉은뱅이의 나이가 사십 세였다고 합니다(행 4:22). 여기서 사십 세라는 것을 굳이 밝히는 것은 뒤에 가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나이는 사십 세요, 구걸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십 년 동안 얻어먹고 살다보니 이제 이 사람은 완전히 얻어먹는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성전 미문에 떡하니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상상해보십시오. 그는 성전 안에서 무엇을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설교를 하는지,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장은 몇 명인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입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나는 축복 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제 더는 그것이 조상 탓인지 내 탓인지도 관심 없다, 어쨌든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들 다 들어가 예배드려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일에는 전혀 관계없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에 보면 교회 앞에 구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분도 여기 같이 들어와서 예배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마음속 한구석으로 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의 마음이 감동되어 스스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은 우리의 예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으면 몇푼 적선해주십시오,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그러니 그냥 지나치지는 마십시오.

지금, 성전 미문에는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 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았으면서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지나가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큰 사람이건 작은 사람이건, 제사장이건 죄인이건, 세리건 마태건 베드로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손 내밀고 앉았다가 그저 몇 푼이라도 주면 고맙고, 안주면 그만이지요.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주면 주는가보다, 안주면 안주는 가보다 할뿐입니다. 주면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한마디하겠지요. 그것으로 끝입니다. 적선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죄인인지 의인인지, 예수를 믿는지 유대교를 믿는지 알 바 아닙니다. 오로지 그는 자기 손에 주어지는 동전에만, 그 구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철저하게 소외당한 사람이요 마음이 다친 사람이요 물질만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은혜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은혜를 받았으면 돈이나 한푼 주시오, 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들어섭니다. 그들을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는 지나가는 사람이 베드로인지 요한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손을 내밀 뿐입니다. 적선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베드로가 본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오늘에야 처음으로 봤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마 전일에는 돈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돈이 있을 때에는 한푼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불쌍한 생각에 잔돈이 있으면 주기도 했을 것이요, 큰돈밖에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이 하는 대로 '어쩌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을꼬? 하나님 불쌍하게 여기소서'하는 정도의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 보던 꼭 같은 앉은뱅이지만 그 마음이 달라집니다. 보는 순간 불쌍히 여겨질 뿐더러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작동할 때에 저 사람을 고쳐주어야겠다, 일으켜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이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에만 앉아 있느냐 하고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치실 분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예수님입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역사 함으로 베드로는 '그냥 지나가면 안되지, 고쳐주어야겠다'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동기, 그 통찰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제는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옛날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을 지닌, 새로운 마음으로 볼 줄 아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앉은뱅이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를 보라.' 참으로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합니다. 주목(注目)은 다른 데를 보지 않고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이렇게 눈과 눈이, 마음과 마음이 마주칠 때에 베드로가 말문을 엽니다. '우리를 보라'고. 이제, 베드로가 이적을 행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따라서, 그 모범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으니 제자도 마땅히 고쳐야지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으니 제자도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지요.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흉내내야 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 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고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도구로, 그릇으로 사용하시어 앉은뱅이를 만나시고 계십니다. 지금 베드로는 쓰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속에 불쌍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거든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열렸던 신학 세미나에 참가한 일이 있습니다. 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한 천 명 정도 모여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꽤 많은 신학자와 목사님이 참석했었는데, 그 때에 제가 두 시간 여에 걸쳐서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강연을 하고 났더니 운집한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더군요. 그런데 박수 끝에 사회자가 쓸데없이 '이 모임을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여비며 숙식이며 많은 비용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망교회의 곽목사님이 일만 달러나 헌금해주셨습니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러자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내려오다 말고 한마디를 더했지요. '그것은 제 돈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박수를 더 크게 쳐주더군요. 그래서 세 번이나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제 돈입니까? 소망교회 돈이지요.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의 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으로, 그것은 제 돈도 아니요 여러분의 돈도 아닙니다. 소망교회의 돈도 아닙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박수 받을 것도 없고, 내게 고마워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박수를 받고 앉았을 수 있습니까?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언제든지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손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내 몸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내 지식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내 입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일 뿐,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을 받들어 섬기고 순종하는 사람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좀더 영적인, 본질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살아 계셔서 교회를 통하여 지금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고용되어 은혜의 방편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이 현장에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눈이 서로 마주치는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저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 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그 모습을 본문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절)'-무엇을 얻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베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밖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보라' 했으니 당연히 무엇을 주려나 하고 바라볼 밖에요. 돈을 줄 것인가, 금붙이를 줄 것인가 하고 기대감을 가지고 쳐다봅니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인가보다, 무슨 큰 것을 하나 주려나 보다, 하고 좋아서 쳐다보는데 엉뚱한 말이 나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앉은뱅이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쓸데없는 사람이 별 소리를 다하네, 없으면 그냥 지나갈 일이지 자기를 쳐다 보라 마라는 왜 해'-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앉은뱅이는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이어서 아주 의외의 말이 나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굉장한 순간입니다. 도대체 베드로의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린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에게 어떻게 감히 손을 대고 일으키려 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요즘 보면 여기저기서 이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만, 직접 가서 확인해보기 전에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소문은 원래 무성한 법입니다. 그저 속병 정도 낫고, 신경이 다소 부드러워진 것을 가지고 이적이라고 떠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정말로 그런 이적에 있다면 아마도 며칠 동안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용기가 대단합니다. 그 믿음이 대단합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볼 때면 김익두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아주 오래 전, 김익두 목사님이 앉은뱅이를 고친 일이 있습니다. 처음 그를 고치려고 할 때에 먼저 누가 보나 안보나 하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소리쳤답니다. 그랬더니 그 앉은뱅이가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뭐요?' 하더랍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의 약한 믿음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며칠 동안을 기도하고 금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김익두 목사님은 능력의 종으로 평생을 일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것은 본인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을까요? '혹시나 안 일어나면 어떡하나, 일어서면 다행이지만 만일 안 일어난다면 그 망신을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대체로 이런 정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성전 미문 앞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은사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말을 들은 앉은뱅이의 마음에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을 때에 '내가 무슨 보통 앉은뱅인 줄 아쇼? 40년 앉은뱅이오, 이 사람아'하고는 힘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어나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쳐다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농담하는 거요, 아니면 사람을 업신여기는 거요?'하고는 어쩌면 꿈쩍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려고 애썼습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믿음인 것입니다. 그가 베드로를 언제 보기나 했습니까? 처음 만나는 베드로로부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듣습니다. 놀라운 소식-이것이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을 더해주기 위하여 잡아 일으키는 순간에 그가 힘을 내면서 벌떡 일어섭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수용입니다. 바른 응답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얻기 위하여 그는 지금까지 가졌던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사십 년 동안의 그 고정관념과 자기집착을 일시에 다 버립니다. 어쩌면 그 시각, 그는 자신이 앉은뱅이라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일어나라' 하니 벌떡 일어납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일어나라' 했을 때에 '일어나려고 노력해봐야 소용없습니다'하고 아예 순종할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희망사항으로 남을 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나는 앉은뱅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권능이요 치유의 은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세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은 말씀의 증거입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걸으라'하는 말씀이 '걸을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라'하신 말씀이 '건너갈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과거에 건너갔느냐, 건너가지 못했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건너가라'하신 말씀에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말씀이 권능으로, 능력으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또한, 이것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말씀에는 이런 유명한 전설이 따릅니다. 프란체스코 걸식성단(乞食聖團)을 만들어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하여 교황청에 들어갔습니다. 걸식성단은 가진 것 없이 그저 얻어먹으면서 떼를 지어 전도하고 다니는 단체입니다. 그 단체를 인가 받으려고 하는데 아마도 교황에게는 그것을 좀 비웃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교황이 그에게 많은 보화가 쌓여 있는 창고를 보여주면서 '이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제법 으스대며 말합니다. 그랬더니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말할 능력도 없게 된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합니다. 여기에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말을 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한번 보십시오. 성전 비문에 앉아 있는 그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십 년 도안 한번도 걸어보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이 사십 년이라는 기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이 사십 년은 오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은혜에 대하여 말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은혜는 받지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은혜의 역사가 왔다갔다할 뿐, 그것이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개인적인 중생을, 중생의 체험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에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개인적으로 직선적으로 주는 말씀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말씀을 헬라 원문에서 살펴보면 조금 엄격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향하여 걸으라'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밖에는 달리 능력이 없습니다. 의지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목적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계시적인 말씀입니다.

나아가 이 기적은 마술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기적의 능력 가운데는 상당한 신앙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디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말씀을 할 수 있는 위인이 못됩니다. 의심도 많고 비겁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지금 이 시간에 이렇듯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믿음이 역사 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순종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신앙사건이 기적사건으로 나타남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마지막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걷게 된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문간에 앉아서 얻어먹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걸어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문간에만 사십 년 있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성전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이야기로 알던 성전이 이제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됩니다. 성전에 들어가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가 앉은뱅이였음을 알아본 사람들이 눈앞에서 그의 뛰고 걷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놀랍니다.

여러분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베드로의 이적으로 사십 년만에 처음 걷게 된 그는 베드로에게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나타난 사건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잘살게 됐다, 자유 하게 됐다, 소원성취 하게 됐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적의 목적이요 구원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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