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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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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이 한국에 어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꼭 사업체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농사를 짓고 있다거나 주식에 투자를 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벌여놓고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몸은 여기에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한국에 벌여놓은 그 일에 가 있지 않겠어요? 농사를 지어놓고 왔다면 태풍에 피해는 없는지, 일꾼들이 거름을 제때 잘 주고 있는지, 주식에 투자를 했다면 지금 주가동향이 어떠한지 얼마나 마음을 많이 쓰겠어요? 전 재산을 털어 사업을 시작해서 동업자에게 맡겨놓았는데, 이 친구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마음을 놓고 잊어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 재산을 투자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는데, 바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고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한 말을 보면 '하나님이 너희로 하여금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했어요.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 그저 마음에 맞는 몇 사람이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경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에 든다고 교회에 나가고, 교회에 가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니까 안나가고,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리면 교회 일에 열심을 가지고 참여하다가, 속상한다고, 또는 몸이 피곤하다고 교회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섬기는 태도가 아니에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사람들 만나고 안부 묻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클럽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그렇게 세우신 다음 계속 남아서 교회를 관리하고 돌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기고 떠나셨어요.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지요. 그리고는 그 교회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두시겠어요? 두고 온 사업이 망하든지 말든지 내버려둘 수가 있나요? 그럴 수 없지요. 과연 교회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이단이나 비진리에 의해 병들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에 의해 교회가 변질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얼마나 주님께서 관심을 갖고 바라보시겠어요? 오늘 말씀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기 피로 사서 세우신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기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갖고 계시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시작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할 말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교회 하나하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 주사랑교회를 향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무슨 하실 말씀을 가지고 계실까요?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흡족해 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답답한 심정으로 안타까워하고 계실까요? 혹시 노한 음성으로 책망하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먼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의 세 번째 전도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에베소였습니다. 무려 이곳에 3년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아시아 지방의 수도였고, 내륙과 해양의 접촉점으로 무역의 통로였습니다. 또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 때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셔서 마게도냐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렀다가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전도여행에서는 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던 에베소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로 자랐습니다. 사도의 헌신적인 사역이 정말 아름답게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앞으로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이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예상되는 이단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또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행 20:29-30)라고 바울이 경고를 했습니다. 그 후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가 와서 가르쳤고, 또 사도 요한이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았는데, 요한서신을 보면 바울이 예상했던 것처럼 에베소에서 이단의 활동이 얼마나 왕성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의 동역자요 아들이라고까지 불리웠던 디모데가 에베소에 와서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에베소 교회는 바울, 아볼로, 요한, 그리고 디모데 등 기라성같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들을 가졌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로서 정말 큰 축복이었고, 그 결과도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보면, 바울이 염려했던 일들을 잘 이겨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지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 용납하지 않고 제거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또 가짜 사도들이 판을 쳤는데, 그것을 분별해서 그들이 가짜인 것을 드러냈습니다. 흉악한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온 것을 잘 찾아내서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교회를 지켰습니다. 이 정도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야 하겠습니까? 믿음과 지식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좋은 선생을 만났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어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칭찬하시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나 또는 각 사람의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마치 장부에 기록하는 것처럼 보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수고들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망정, 비록 눈에 보이는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은 받지 못했을망정, 우리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인정해 주시고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는 것 아닙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히 11:26). 사도 바울 역시 죽음을 앞두고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딤후 4:8). 물론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주님 앞에 자랑할 수야 없지요. 또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과 수고를 주님이 알아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합니까?

그밖에도 에베소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뎠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핍박과 그로 인한 고난을 참고 견디었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즉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하고 충성스러우며 큰 성취를 이룩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책망받을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이던가요? 초신자들입니까? 깊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아니지요. 초신자들은 오히려 그 처음 사랑을 발견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잃을 것도 없습니다. 믿음이 성숙하고 주님께 인정받을 만큼 수고했던 사람들, 믿은 지 오래 되고 깊은 은혜의 체험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분들이 대체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채 냉랭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듣고 배운 것은 많아서 지식은 많고 말도 잘합니다. 그동안의 수고가 인정받아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상태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썰렁해요. 감동이 없습니다.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헌금, 봉사, 선교활동, 늘 앞장서서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그저 수십년 동안 해 왔던 습관에 의해서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타성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이지요. 움직이는 것이라고 해서 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을 만나도 반갑지 않아요. 늘 보아왔으니까. 말씀을 읽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옛날에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저 무덤덤할 뿐이지요. 교회에 나가지 예배를 않으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수십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교회에 나가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행사에 참석하는 것 이상이 못돼요. 기도를 해도 능력이 없어요.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의 기도가 아니라 녹음기를 틀면 나오는 것처럼 자동으로 술술술 나오는 미사여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새로 믿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같은 죄인을 위해 지셨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던 그 약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생각만 해도 기뻐서 찬송이 나오고 눈을 감으면 천국 가서 뵙게 될 주님의 모습이 떠오르던 순간들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혹시 그렇지 않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큰 일을 했습니까? 얼마나 훌륭한 선생들에게 잘 배웠습니까? 얼마나 지식이 많았겠어요?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싸웠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견뎌냈습니까? 그런데 그 후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 뒤에 남는 것이 경력과 업적이라는 화려한 껍데기뿐이고 정작 중요한 살아 숨쉬는 믿음과 샘솟는 기쁨이 말라버렸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까? 과거의 뜨거웠던 열정이 오늘의 식어버린 믿음을 보상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옛날에 가졌던 처음 사랑을 앞세우며 지금의 초라한 믿음을 변명하거나 감출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 말씀을 '주사랑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렇게 고쳐서 한번 읽어보세요. 과연 주님의 눈에 비쳐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떨어지기 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던 그 때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었는지, 지금의 냉랭한 상태와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돌이켜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전에 없던 모습을 새로 만들어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그 모습, 전에 누리던 기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거예요. 조금만 애쓰면 가능한 일입니다. 처음 가졌던 열심 회복하고 처음 품었던 그 사랑 되찾아 정말 살아있는 믿음, 생동력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 모두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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