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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하라 (계 0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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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에 소개된 주님의 모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었습니다. 즉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여기 버가모 교회에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요? 여기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매우 위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입니다.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전투력은 화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얼마나 성능이 좋은 무기로 무장을 했느냐에 따라 큰 위협이 될 수도 있고, 무시해도 좋을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갖고 계신 좌우에 날선 검이라는 것은 매우 성능이 좋은 무기라는 뜻입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이 검은 자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양쪽에 그런 날이 있으니 훨씬 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니까 이 좌우에 날선 검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주님의 입에 있어요. 칼이 옆구리에 있는 칼집에 들어있어야 할 것인데, 이 칼은 주님의 입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이 칼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처럼 매우 성능이 좋은 강력한 무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말합니다(히 4:12).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을 때, 주님이 사탄을 대적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처럼 사탄을 물리치는 데 무기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논리 정연한 말주변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낙심하고 지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좌우에 날이 섰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쪽으로도 칠 수 있고, 저쪽으로도 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하자면 다목적 무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능이 뛰어나고 다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를 우리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용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다룰 줄을 몰라요. 아무리 우수한 성능의 무기라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무거운 짐일 뿐이지요. 전쟁이 한창인데 최첨단 무기를 가진 병사가 쫓아와서는, '소대장님, 뭘 눌러야 총알이 나갑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 성능좋은 무기를 겨우 막대기처럼 사용한다면 또 얼마나 답답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용할 줄 아십니까? 또 어느 정도까지 사용하십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매우 절망에 처했거나 또는 아주 속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합니까? 1번, 친한 친구를 만나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고 충고를 듣는다. 2번, 믿지 않는 사람처럼 술을 마신다. 3번, 조용히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3번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다른 무엇보다 훨씬 강력한 치료방법이지요? 그러나 가장 시행이 안되는 방법이 바로 3번이에요.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고 삽니까? 얼마나 성경을 읽으세요? 저는 올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경 한번 읽는 것을 목표로 삼고 모두가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한번 통독하고 나면 여러분의 믿음이 훨씬 성장할 것이라고 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참여하도록 매주 분량을 정해서 주보에 싣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몇 명이나 여기에 참여했습니까?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을 여유가 없다면,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만 자리에 앉아 성경 읽을 시간을 낼 수가 없던가요?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할 일이 많다 해도 일주일에 두 시간 하나님 말씀 읽을 시간을 낼 수가 없단 말입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일주일에 두 시간 성경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예수 제대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시간이 없다는 것은 100% 거짓말이에요.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 한번 듣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자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렇게만 살다 보니 필요한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고 늘 영양실조에 걸려 비틀거릴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의 삶이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복종시키지 않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삶이 늘 말씀으로 점검되지 않고서는 입술의 아름다운 열매와 행실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항상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했던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사탄의 위가 있는 곳입니다.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탄의 권세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사탄의 위협이 상주하고 있는 곳에서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버가모의 성도들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삶의 정황입니다.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추종자들이 많지 않지만, 19세기만 해도 후천년설이 상당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이 땅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지요. 천년왕국 이후에(post-millenium)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후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도와 구조가 개선되면서 이 사회는 점점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었습니다. 도덕적인 발전으로 결국 죄악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이 편만하게 시행되는 단계가 도래하고 그렇게 해서 천년왕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낙관론은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사회가 도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점점 발전해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은 미래에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회가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은 타락과 부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1세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대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2-5)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 확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쉽던가요, 어렵던가요? '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 하는 분들은 날마다 죽는 삶을 통해서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이 몸에 배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그 둘 다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후천년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천년왕국이 조금씩 이루어져가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더 포악해지고 더 더러워지고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위가 있는 곳,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다스리고 사탄의 법이 통용되고 있는 곳에서 사탄의 지배를 거부하고 사탄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살려고 하니 어려울 수밖에요. 그 사탄의 법과 정반대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살기가 쉽겠어요? 이 세상나라의 가치를 거부하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반대나 조롱이 우리를 향해 쏟아지겠습니까?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권세가 시행되는 곳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어렵고 힘겨운 삶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큰 칭찬거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당하고 조롱을 받으면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는 모습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칭찬을 받은 버가모 교회였지만, 또한 책망받을 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올무가 되었던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가 살그머니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네게 임하여 그 좌우에 날선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지요? 교회 안에 생겨난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은 다른 것으로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일입니다. 무슨 정치적인 공세로 몰아부쳐서 될 일도 아니고 투표로 결정할 일도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류를 지적하고 진리를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시는데,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 자신이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회개를 해야 할 주체와 주님이 싸우시겠다고 하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아요. 버가모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버가모 교회와 싸우시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즉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싸우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누가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벌받을 일은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인데, 회개는 버가모 교회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공동체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죄악이 있을 때, 회개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필요가 없어요. 우선 내가 회개를 해야 합니다. 내가 그 죄악과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아니에요. 뿐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죄를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단 9:20). 다니엘이 자기 죄를 회개하면 됐지 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까지 회개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니엘이 이스라엘 백성 중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누가 하는지 보세요. 회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구원받은 성도만 회개할 수가 있어요. 한국이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후, 한국교회가 그동안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것을 회개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옥에 갇히고 고초를 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으니까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반면에 신사참배에 앞장서서 꼭 회개를 했어야 하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어요. 회개는 성도에게 주어진 책임이며 동시에 특권인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를 하는지 안하는지를 보고도 구원받은 성도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회개를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가룟유다는 회개를 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만큼 회개는 우리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 촉구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장 가서 그들과 싸우겠다.' 우리가 회개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것이 없다는 분 있습니까? 나 자신의 죄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령 나에게는 회개할 죄악이 없다 할지라도 내 민족의 죄악을 부둥켜안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죄악을 찾아내서 눈물이 마르도록 회개하는 그런 성도들을 주님은 찾으십니다. 내 가족과 이웃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늘 애통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하고 애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싸우러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회개에는 능력이 따릅니다. 회개할 때 변화가 일어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1907년에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부흥의 역사는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블레셋의 위협에 민족의 존속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사무엘이 미스바에 온 이스라엘을 모아놓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싸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회개의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입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강단에서 회개가 선포되고 교인들이 모이면 늘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분들이 지금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랬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회개의 눈물, 그것은 주님이 기뻐 받으실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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