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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자의 윤리 (행 0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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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그려 져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믿음이 있고 행위가 있습니다. 믿음에 아름다운 행위가 따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단순한 일개인의 윤리적 행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사회적으로까지 확산 연계되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제 행위까지 신앙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영혼이 구원받고, 생각이 바로서 고, 감정이 바로잡히고, 말과 행실이 바로 되고, 그리고 뺄 수 없는 것으로 경제생활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한 사람이 영위하는 경제생활의 됨됨이는 그 믿음을 가늠하는 데 아주 적절한 바로미터가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경제에 대한 생각, 돈에 대한 자세가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 신앙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돈이 귀해만 보이고, 돈이 하나님보다 더 높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고 있다면, 그 신앙의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이라면 행위는 따르게 마련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누구 할 것 없이 믿는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저마 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뿐더러 사회생활, 경제생활까지 아름다운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랍고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에 시험이 있습니다. 교회가 빠지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관념화입니다. 신앙을 관념적으로 가졌을 뿐이지 실생활에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믿고 생각으로만 믿습니다. 아니,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말일 뿐이요 믿는 자된 생활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감사합니다'하고 집에 가서는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송을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그 입으로 못된 소리합니다.

믿음 생활을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혹은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삽니다. 실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따로 놉니다. 관념적 신앙입니다. 걱정거리요 문젯거리입니다. 신앙의 저러한 관념화야말로 곧 함정인 것입니다.

둘째로, 현실도피 적인 종교의식입니다. 이 또한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 보면 가정생활은 구질구질하고 지옥 같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 좋다고 합니다. 어디 부흥회가 있다 하면 좋다고 참석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이라든지 직장생활이라든지 하는 것은 다 힘들어합니다.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남편 보기 싫고 아내보기 싫고 자식 보기 싫고…… 만사가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기분을 가지고 어떻게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크게 병든 것입니다. 현실 도피적인 종교의식, 이것이 문제입니다.

셋째로, 극단적 개인주의입니다. 내 구원 문제만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은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가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다같이 기도하는데 혼자서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기도 못하게 말입니다. 그럴 때면 권사님들이 나서서 책망합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록 나는 기도를 못할지언정 다른 사람은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 같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문제입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잘못된 신앙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큰 시험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신령한 세계와 내세지향적 신앙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의 생활은 무시합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천당만 바라보느라 현재의 가정생활, 물질생활, 직장생활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함정이요 큰 시험거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볼 수 있는바, 초대교회에는 이같이 잘못된 신앙이 없습니다. 저들의 신앙은 아주 실천적이요 사회적이요 경제적입니다. 정치문제, 사회문제, 가정문제, 경제문제…… 전부가 신앙화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럼으로 아름다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물질을 서로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32절)'-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저 사람에게 주고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샛말로는 이상적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내 것, 내 것이 없습니다. 다함께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보십시오. 세계적으로 따져보면 결코 자원이나 농산물이 모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유통이 안될 뿐입니다. 제대로 나누어 쓰지 못할 뿐입니다. 나눔이 없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잉여농산물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습니다. 쌓여서 썩어나가는 잉여농산물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너무 비대해서 걱정이요, 너무 먹어서 걱정이요, 남아돌아서 걱정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이요, 굶어죽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통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물건을 통용할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둘째로, 저들은 필요에 따라서 분배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35절).' 이것은 자본주의 이론과는 좀 다릅니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닌, 능력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수고에 따라서, 그 능력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필요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많이 벌건 적게 벌건 쓰는데는 똑같습니다. 어디까지나 한낱 이론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이론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에 배운 말 가운데 '철밥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철밥통이란 쇠로 만든 밥통을 말합니다.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든 안 하든 온 국민에게 적당한 식량을 줍니다. 그래서 굶는 자가 없습니다. 시민권만 가지고 있으면 국가로부터 반드시 얼마의 양식은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그 월급이 요 적게 일해도 그 월급입니다. 똑같이 줍니다. 그러니 일을 안 할 수 밖에요. 열심히 일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제도를 고쳤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 년 계약으로 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은 올려주고 열심히 안한 사람은 오히려 낮추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생산성이 증대하고 열심히들 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이론'이란 일은 일대로 하고 분배는 필요에 따라서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좋은 이론입니까? 추운 사람 입히고, 배고픈 사람 먹이고 똑같이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일 안 해도 필요에 따라서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결국, 이 '철밥통'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연변에 갔을 때에 보니 사람들이 이 철밥통을 깨부숴야 나라가 되지, 더는 안되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 안 하는 사람은 굶어야 합니다. 일 안 해도 먹여 주니까 게을러지기만 합니다. 그것이 40년 동안 쌓이다보니 아예 체 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는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는 참으로 이상적 인 사회이기는 합니다.

셋째로,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34절)……' 가난한 자, 배고픈 자, 헐벗은 자가 없는 사회-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입니까? 이렇듯 바람직한 사회가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회라 할 때에 우리는 그 결과 만 생각하지, 그것을 이루는 데에 바탕이 된 동력이나 그 원인에 대 해서는 잊고 지나갑니다. 그 원인이 더욱 중요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지 못합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공산주의자들이 저들의 이론대로 이상적 사회를 이루기까지는 혁명이 그 기반이 되었습니다. 부르즈와를 숙청해가면서,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숙청은 더욱 무서운 사회를 만들뿐이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제도에 의해서 이러한 사회를 이룩해나갔습니다. 강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과 양심과 자발성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비인간화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빼앗고 죽이고 숙청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습니다. 정확한 통계랄 수는 없지만 소련의 책임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소련은 일 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해나갔다고 합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그 권력 하에서, 그 제도 하에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바른 제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듯 저들은 생각만 있었지 그대로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이상적 사회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룬 아름다운 사회는 인간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신앙적 사건입니다. 사람들의 제도 에 의한 것도 아니요 권력에 의한 것도 아니요 힘에 의한 것도 아니 요 혁명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적 혁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사회인 것입니다. 본문 32절은 말씀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여기서 핵심은 '믿는 무리'입니다. '믿는 무리'란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을 믿고 재림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습니다. 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철저한 믿음이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한마음 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나아가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바 아름다운 사회는 사도들의 계속적 증거가 따랐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번의 믿음으로 이러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계속 말씀을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부활신앙을 증거 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은혜의 세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저들에게 힘을 공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증거 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33절)'-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믿음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번 중생한 믿음가운데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증거를 보는 가운데서 은혜생활을 계속함으로 저들은 한마음이 되고 한뜻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말씀과 같은 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단순한 개인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됨으로써 저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지체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나는 손이요 저는 발이요, 나는 눈이요 저는 입이요…… 이렇듯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프면 저 사람이 아프고, 저 사람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배고프면 저 사람이 배고프고, 저 사람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픕니다. 이런 마음을 지님으로 저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하나님 아버지 아래서 형제가 됩니다. 여 기서 우리는 믿음이 형제애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가정에 한 권속이 되었습니다. 이젠 절대로 남남일 수 없습니다. 큰 가정-교회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안 믿는 친척보다야 믿는 교인이 낫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더 가깝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세상 떠날 때에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줄 사람은 교인밖에 없습니다. 지금 그렇듯 애지중지하는 자식들도 그 때에는 유산이나 더 챙기려고 눈이 벌개서 모여들걸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주고 애써줄 사람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살았을 때 에 잘하세요. 미리 잘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한 이 말씀 허투루 들을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누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좀 찾아가서 위로해주고 해야 하는데 남 죽는 것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아프대도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장례식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세상 떠나면 누가 가겠습니까? 장례식에 가보면 그 사람의 덕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한 하나님 가정의 권속이다, 식구다 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 가정 의식이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정애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사도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입니다. 이 계속적 교육이 저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능력도 보고 말씀도 듣고 믿음이 새로워질 때에 저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말씀을 받으면서 저들은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은혜는 곧 선물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내가 죄 사함 받은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도 하나님 의 선물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은혜에 대한 확실한 감각을 가지게 될 때에 저들은 자발적으로 헌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물질도 내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듯 내 소유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다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치게 됩니다.

그럼으로 필요에 따라서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아주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기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욕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동안 내 것이라고 하던 것이 이제 더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 것입니까? 우리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동소유의 개념을 가지게 됩니다. 물질은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개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 운 생각입니까?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내 것이라고 하는 개념 이 너무 강합니다. 그저 내 것, 내 자식, 내 집…… 항상 이런 것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충만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개인주의적인 소유욕이 깨지고야 아름다운 이상적 사회를 이루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으로 받은 바 은혜가 큽니다. 물질적으로 받은 바 은혜도 큽니다. 내가 사는 순간 순간이 전부 은혜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받기만 했을 뿐 갚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받았지요, 이웃으로부터 받았지요, 형제로부터 받았지요, 교회로부터 받았지요…… 받은 것은 너무 많은데 갚은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이제 더는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다 내어놓습니다.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기적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을 꽉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처럼 불쌍한 노릇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 그 많은 것 가지고도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납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구제나 선교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합니다마는, 그것을 하기 위하여 있는 돈 없는 돈 모으려고 얼마나 애씁니까? 그러나 다른 나라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큰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을 전부 교인들이 헌납한 유산으로 한 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죽을 때에 자신의 재산을 다 내놓고 죽습니다. 아니면 죽기 전에 이제 앞으로 얼마 정도 살겠다 생각하고 그 동안 쓸 것만 남겨두고 미리 바칩니다. 그래서 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프린스턴신학교도 보니까 그 많은 학생들 전부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나느냐 하면 전부가 유산입니다.

인천에 드나드는 선박 가운데 '프린스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더군요. 그것 역시 어느 개인이 가지고 있던 배를 죽을 때에 학교에 다 헌납한 것입니다. 그렇듯 유산을 통해서 나오는 수익으로 장학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잘 믿는 것 같은데 유산처리 하는 데는 영 엉망입니다. 유산처리에서 결정적으로 잘못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집에 들어가서 유서를 쓰십시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유산처리 잘못하면 신앙생활 부도나고 마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내 자식 필요 없습니다. 유산 쥐어 줘 가지고 되는 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자식에게 재산 많이 줘서 좋은 대우받는 부모 없습니다. 유산을 물려줌으로 오히려 불효자를 만듭니다.

오늘의 본문은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넘치게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마음이 다 없어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을 빌면 '은혜가 넘쳐 흘러나온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로 '은혜'를 '까베'라고 합니다. '사명'은 아우프 까베'로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독일어에서는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둘 다 '까베'로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명' 곧 '아우프 까베'는 '에프터(after)까베'라는 말로 선물 뒤에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거기에 따르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입니다. 그 감사가 생활로 나타나면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입니까? 우리는 '까베'에서 '아우프 까베'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받았다면서 거기에 뒤따르는 생활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은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혜 받은 자의 윤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서 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 5)'-하나님 말씀만 듣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산다면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부하다고 절대로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 눈에 가난한 자가 안보여야 합니다. 내 주위에 가난한 자 가 없어야 합니다. 내 친척 가운데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고통 당하는 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복 받은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복이라 는 것은 나 하나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다함께 복을 받고 더불어 행복할 때에 비로소 진정 복 받은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날 이 공동체사회 속에서 교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교제-코이노니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한번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이 교제는 사도적 권위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使徒)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 사도들의 능력과 권세를 전적으로 믿고, 그 권세 하에서 저렇듯 귀한 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들의 지시를 따르고, 사도들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들은 믿음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룬 아름다운 이상적 사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이 사회는 자발적으로 이룬 것입니다. 강제적으로 혹은 혁명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가 자원해서 이룬 일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은혜라는 것은 자발성을 가져야 합니다. 봉사, 사랑, 희생…… 전부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인격은 자발성을 요구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어디 좀 다녀오너라'하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그럴 때에 '예'하고 벌떡 일어서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심부름을 시켜도 대답을 하지 않는 자식이 있습니다. 거듭 '갈 거야 안갈 거야?' 하고 다그쳐야 간신히 볼멘소리로 '가면 되잖아요'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그만두라고 합니다. 억지로 하는 순종 바라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지로 드리는 예물 반갑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가 무슨 의미 있겠습니까? 모든 행위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전부가 자발적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목회지침으로 늘 자발성을 강조합니다. 우리 가 하는 모든 일은 자발적이고 자원적이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억 지로 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또 한 가지, 임의성을 강조합니다. 임의성이란 규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는 일주일에 얼마를 헌금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모든 교인들에게 주정헌금(週定獻金)을 하라고 해보았습니다. 일년을 정해놓고 매주일 얼마씩 똑같이 내 게 해보았습니다. 그 때에 가만히 지켜보니 두 주일 지날 때까지는 그런 대로 자발적이었는데 석 주일 지나고부터는 규제성이 나타나더군요. 돈 없을 때에는 조금만 헌금하면 좋을 것을 하는 생각이 나니,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이렇듯 얼마를 헌금하겠노라 정해놓은 중간 중간에 억지가, 규제가 개입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는 헌금이 헌금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망교회를 시작할 때에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월정헌금도 주정헌금도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헌금은 임의적으로 해야 합니다. 한번 헌금 약속해놓고 그것을 지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듭니까? 처음에는 자발적이었는데 한참 하다보면 규제를 받게 되고 억지가 되고 합니다. 나중에는 헌금을 외상으로 사기까지 합니다. 몇 주일 지난 다음에 합 쳐서 가져다가 냅니다. 이렇게 되면 헌금이 아니라 빚 갚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초대교회의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이 아름다운 모습은 임의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있는 사람은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 앞에 가져다 바칩니다. 모두가 해야 한다, 얼마를 해야 한다, 일 주일에 얼마를 바쳐야 한다-이렇게 제도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가져다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조직하고 맹세하고 지키고 하다보면 어느 사이에 임의성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모름지기 은혜에는 이런 임의성이 따라야 합니다. 목회활동을 하다보니 거지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백 원씩 줄 때에 저는 그들에게 천 원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거지가 찾아왔는데 마침 돈이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이 백 원 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것만 주었더니 '왜 오늘은 이 백 원밖에 안 줍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 이 백 원마저도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요. 매번 천 원씩 주니까 그것이 벌써 규제화한 것입니다. 으레 그래야 하는 줄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규제를 넘어서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처 음 가진 그 마음으로, 항상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은혜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기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봉사와 구제를 해야 합니다.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의 모든 행위는 기쁨과 감사가 항상 같이해야 합니다. 즐겁지 않은 일은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즐겁지 않은 일 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영성(靈性)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분위기가 물질적인 사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물질로써 저렇듯 아름다운 사회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보니 내가 가진 물질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님 앞에 가면 죄송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가 넘치게 물질을 유무 상통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신앙, 주님을 만나는 마음, 종말론적인 신앙,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 이렇듯 신령한 믿음이 확실해질 때에 저들의 물질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아름다운 사회를 이룰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교인상, 아름다운 신앙형태, 아름다운 교회생활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은혜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가 생활이요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에 은혜의 윤리성이 있습니다. 사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격,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초대교인이 가졌던 바로 그 마음, 그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있을 때에 그 사회, 그 교회가 또한 초대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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