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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기둥들 (갈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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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기도의 기둥과 믿음의 기둥을 야고보와 베드로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에 윤활유를 붓는 것이며, 우리의 신앙의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에 기도하는 기둥들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매사에 믿음으로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못한다고 말하면 나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못하게 가로 막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른 그 어떠한 것도 믿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믿음의 기둥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나머지 세 분을 통하여 교회의 기둥은 어떠한 기둥이 있어야 하겠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할 것입니다.

3. 사랑의 기둥 / 요한
교회의 세번째 기둥은 사랑의 기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사랑의 기둥이었습니다. 요한이 쓴 5권의 성경은 그 주제의 핵심 언어가 바로 사랑임을 우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께 부탁하여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나란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성격이 급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려고 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면서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요한이 즉각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가는 곳마다 사랑을 외치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을 대단히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도 있어야 하고 믿음의 기둥도 있어야 하지만 사랑의 기둥이 많아야 합니다. 꼬치꼬치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가식이요 위선이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노랫말마다 다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그토록 갈망하면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결핍으로 상처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혹 사랑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랑도 모두가 조건이 없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조건이 다 붙어 있는 사랑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남녀간에 결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을 따지면서 거래를 하는 것이 오늘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사랑이 결핍되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되기 시작하니까 사회전체가 불신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진정한 사랑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도의 교제가 거룩한 사랑의 교제가 아니라 거래와 같은 교제가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으로 형제와 자매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여러가지 범죄나 질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가 병드는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이 외친대로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평강교회에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 속에서 사랑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사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기둥이 되기를 원합니다.

4. 진리와 전도의 기둥
여기의 또 하나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기둥입니까? 바울은 진리와 전도의 기둥입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반가량을 집필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진리의 기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오직 전도하는 일에만 일생을 바친 전도의 기둥이었습니다. 우리는 맡은 직분은 달라고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전도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드렸던습니다.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기둥은 전도의 기둥입니다. 사람들이 선교는 말하면서 전도는 말하지 않는 기현상에 빠져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수억 원씩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내 민족과 동포를 구하는 전도하는데 에는 인색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선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장차의 선교의 일군들이 될 하나님의 자녀들을 전도하여 양성하지 않고 선교에만 열을 올린 오늘날 미국의 교회들은 점차로 비어가면서 선교사로 보낼 인재가 없어서 한탄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전도는 해도 그만 한해도 그만인 선택이 아니라 전도는 반드시 해야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전도는 은사를 받은 특정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전도를 해야 하는 의무사항입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전도는 지옥으로 달려가는 가는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고귀한 사랑인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오직 한 길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막1:1:38에서 자신이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인기를 대단했습니다. 병들이 예수님에게 가기만 하면 나았습니다. 죽을 병에 든 사람들이나 조금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다 버리고 새벽에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추적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숫제 예수님을 수색해 나섰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주를 찾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들은 표적을 보고 병고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시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이해한 바울은 전도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한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로 세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도로 우리 가정이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도로 우리 학교와 직장과 이웃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하게 되면 본인에게는 신앙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신앙 성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전도의 기둥들이 많이 나와서 우리 교회가 크게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5. 화평의 기둥 / 바나바
마지막으로 여기 중요한 기둥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인데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권위자란 뜻입니다. 즉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위로의 사람이었으며 화평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소중한 화평의 기둥이었습니다. 교회에는 이 화평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잔멸하려고 다메섹에 까지 자신하여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즉각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슴니다. 그 때에 주님은 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눈을 치료하시고 그에게 이방인을 위한 전도의 대사명을 주시게 됩니다. 이 사명을 받은 러자 사울은 즉각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울이 자신이 받은 복음을 가지고 여러 사도들을 만나고자 했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개종했다고 하지만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위장하여 개종하고 사도들을 몽땅 다 잡으려는 속셈인 줄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해가 사라지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또 과격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치면서 유대교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는 할례를 폐지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오해가 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을 베드로에게 소개하여 만나게 하고 그의 사역을 인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서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만날 수가 없어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화해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은 서로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해서 그들이 화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서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합하여 복음 전도에 함께 노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로 이러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너무나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출발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계층간에 갈등이 심각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황해도 분들이 피난와서 개척을 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을 반드시 황해도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차로 이제 나이가 많아지니까 목사님을 모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소문 끝에 목사님의 부모님이 황해도 출신이시고, 그 목사님도 해방 전이라서 되었다고 해서 결정을 하고서 장로님들과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저녁은 이제 부임의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저녁 식사를 하다가 한 장로님께서 '목사님도 황해도에서 태어나셨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아무런 생각이 없이 '아니요, 저는 이미 해방 전에 부모님이 서울에 오셔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주에 당회를 열어서 그 목사님 청빙건은 없던 것으로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없어져야 할 병폐가 바로 이 지역주의입니다. 그리고 서로 계층간의 화합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말씀하기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 Maker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분쟁과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싸움이 있는 곳에 내가 들어감으로써 평화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서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 Maker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헐어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들도 이제는 이 화평의 기둥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험악해 져 가고 갈수록 많은 문제를 안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들 모두가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로 인하여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게 되고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화평의 사람들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내가 우리 교회의 화평의 기둥이 되어서 정말 이 삭막한 세상에 아름다운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출발한 교회입니다. 정말 우리교회에 이와 같은 기둥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둥 같은 일군들을 찾으십니다. 그 기둥은 바로 야고보와 같은 기도의 기둥,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기둥, 요한과 같은 사랑의 기둥, 바울과 같은 진리와 전도의 기둥, 바나바와 같은 화평의 기둥이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각자의 성격과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에 알맞게 교회의 한 기둥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기둥으로서 교회를 잘 받드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둥이 튼튼한 집이 잘 지어지고 튼튼한 집입니다. 교회가 튼튼하고 아름다우려면 기둥들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기도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전도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같은 화평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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