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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중의 인내와 믿음 (살후 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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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땅에서는 나지 않고 바다에서 '아빌퀼리테'라고 하는 조개의 몸속에서 만들어지는 보석인데 그 조개의 몸속에 모래가 들어가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아빌퀼리테'의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조개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몸속에 모래알이 들어온다는 것은 큰 고통이며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모래알이 준 이 아픔에 대해서 조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진주를 만들어 내느냐? 아니면 썩어 죽느냐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진주가 되려고 하면 '라카'라고 하는 특수한 물질을 몸에서 발산하면서 그 모래알을 감싸 안고 모래의 거칠한 부분을 점점 부드러운 조갯살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들어 갑니다. 문제는'라카'를 낼 때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참아 이겨내면서'라카'를 만들어 대처해 나갈 때 모래알은 비로소 진주가 되어가고 그 조개는 진주조개가 되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썩는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모래알이 들어와 몸에 상처를 내어도 무시하고, 몸을 썩게 해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결국 썩어서 냄새나는 죽은 조개, 즉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치는커녕 오히려 다른 생물들의 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경과 어려움이 올 때 당당히 맞서는 '라카'를 발산해서 진주를 만드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역경이 올 때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살며 현실을 도피하며 살다가 썩는 조개처럼 파멸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는 아픔은 누구나 다 겪게 마련인데 문제는 우리 인생에도, 우리의 삶에도 모래알을 진주로 만드는 이러한 '라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라카'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십니다. 때로는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러기에 참 신앙인은 모래알과 같은 아픔이 다가올 때에 그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가를 찾고 기다리며 주어진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그 속에서 모래알을 진주로, 고통을 축복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이라는 말은 내가 그 일을 감당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성경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소개하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찾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43091;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할만하고 다른 교회에 자랑할만한 교회라는 이유는 어려움 중에 믿음이 더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려움 당할 때에 믿음이 더 자랐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랐다는 것은 그 믿음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핍박과 시련이 올 때에 원망이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도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모래알을 진주로 만들어 갈까? 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는 신앙이 자라나는 신앙입니다.

대부분 핍박이 오고 환란이 오면 믿음이 자라는 사람보다 믿음을 잃고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본 바울에게는 감사하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 따라 살아가는 길에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긴다든지 핍박이 온다고 해서 중단하거나 믿음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에게 복이 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키심과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쓰셨고, 믿음이 있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는 것도 믿음이요, 능력을 행함도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상에 귀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이고, 중요하고 보배로운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떤 시험과 환난이 있어도 잃어버리거나 떠나서는 안 됩니다. 능력 있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나 복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욥23장에 보면 동방의 의인 욥이 고통중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러므로 내 발의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애썼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배나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하시면서 그 믿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43090;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43091;라고 말씀했습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라나는 믿음이며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두 번째 순종의 표시는 서로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뢰의 표시지만 사랑은 믿음의 표시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 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2차대전대 영국이 독일의 폭격을 맞았을 때 영국의 모든 신문들은 폭격에 대해서 대서특필을 했습니다. 정부와 군대를 비난하는 글들로 어지러웠습니다. 그 신문들을 보는 순간 온 국민들은 절망감에 휩싸여 폭격 한번으로 전쟁에 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신문기자들을 불러 놓고 얘기했습니다.'우리가 지금 정부와 군대의 잘못으로 폭격을 맞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비판만 하면 우리의 민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은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을 기사화해서 국민들이 신문을 보면서 희망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지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도 틀리지 않지만 낙관적인 것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합의를 했고 그 다음날부터 신문 기사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실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군대에 가는 젊은이들의 모습, 민족을 위해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모습,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남은 가족들은 저녁마다 예배당에 보여서 예배드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들, 전쟁에 승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실었습니다. 이러한 신문들은 보는 순간 영국의 국민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그리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결과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 고통의 때일수록 미래의 소망을 현실의 소망을 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려울 때 고통의 모래알을 향해 '라카'를 뿜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진주를 만드는 일입니다.

환난과 핍박은 주님을 닮게 하고 굳건히 서게 한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모욕, 멸시, 따돌림을 '핍박'이라고 합니다. 이런 환난과 핍박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고난당하는 것, 핍박당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냐'고 답답한 마음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려움, 환난과 핍박은 그것을 통해 주님을 닮게 하고(살전1:6),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합니다(살전3:3).

평상시에, 편안할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참으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어려움이 닥치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듣지 않을 소리를 듣고 믿음을 흔드는 일을 당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엎드려 기도하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마침내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과 핍박이 오면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3종류의 신자
교회 안에는 3종류의 신자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알곡신자입니다.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기 위해 이름 없이 빛없이 누가 알아주던지 알아주지 않던지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쭉정이 신자입니다. 쭉정이는 빈 껍질이라 열매도 없으면서 목에 힘주고 머리를 세웁니다. 논에 나가보면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쭉정이와 피입니다. 그러나 알곡은 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쭉정이 신자는 열매 맺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바람에 따라 날려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싸라기 신자입니다.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는 그나마 구별이 잘 됩니다. 그러나 알곡도 아니고 쭉정이도 아닌 신자가 있습니다. '싸라기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싸라기'는 '절미'라고 하는 '부스러진 쌀알'을 말하는데 정미소에서 정미하고 알곡과 싸라기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기 전에는 이 싸라기도 알곡 틈에 끼어 있습니다. 반쪽짜리 쌀이지만 알곡 틈에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해 보면 온전한 알곡이 아닙니다. 반쪽짜리 쌀알 같은 신자들은 예수를 믿어도 온전히 믿지 않고,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 하고 복에만 관심이 있고 예수이름으로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핍박당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온전한 알곡 같이 여겨지나 그 속에 금이 가서 반이 잘렸습니다.

마음의 반은 다른 곳에 또는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 금이 간 틈으로 새나오는 소리는 불평, 불만, 시기, 질투이고 분쟁을 일으키고 온전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체면 때문에 혹은 얼떨결에 맡은 직분 때문에 갈라진 마음을 숨기고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사실 그런 신자는 싸라기 신자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은 타당한 이유로 투덜대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 판단이 옳다는 교만이 가득한 채로 불평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교회 행정이나 목사의 목회 스타일이나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낙담을 주는 신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교회가 이래야 되지 않느냐, 저래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은 잘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남의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풍성함으로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통해 교회의 정체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심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고 이런 곳에 진주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표시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함이 풍성한 그런 믿음 속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성도들이 모이는 그 모임을 말합니다. 결코 한 건물을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암교회가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든 분들이 믿음이 자라나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풍성해야 하고, 어떠한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간직하는 인내와 믿음이 있어야 하며,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고 감사하는 것은 이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지녀야 할 본질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면 인간의 사교 모임은 되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칭찬을 받고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려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는 있어야 합니다.

그 첫째는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행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 굳게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진리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와 6.25한국전쟁 때 북한의 공산당에 맞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머금고 그 힘으로 자라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여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믿음이 자라야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으로 자라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랑이 풍성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어느 몇 사람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인간입니다. 으르렁대면서 잡아먹을 듯이 사는 것은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야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계셔야 합니다. 집안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속사정까지도 다 털어놓고 함께 기도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 오실 때마다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인내하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로마 행정부나 당시 사회로부터 이단 사교로 몰리고 있었으며, 공인 받은 종교가 아니라고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핍박 중에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믿음을 굳게 하는 길이요, 인내로서 참아야 하는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 교회는 누가 핍박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시험을 받고, 먹고 살아가는 생활로 인하여 신앙생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실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인내심이 아니고는 수십 년 함께 신앙생활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인내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신문에 가치가 있는 기사가 한 번 난 적이 있습니다. 한 어린이가 설날에 세배하러 가다가 길에서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는 새해 첫 날에 생긴 좋은 징조라고 좋아하였으며 이런 행운이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 아이는 길에 돈이 떨어져 있지는 않나 하고 길을 걸을 때마다 땅 아래만 보고 다녔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복도나 운동장에 동전이 떨어져 있지는 않나 하는 데만 정신이 쏠렸습니다. 그는 그게 버릇이 되어 죽는 날까지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 다녔습니다.

그 덕에 그는 평생 5백 원짜리 동전 수천 개를 주었습니다. 임자 없는 100 원짜리도 수없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굽어들었고, 한번도 높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이기적이었고, 외곬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비가 갠 다음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무지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녁 해지는 장엄한 저녁노을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새들의 즐거운 노래 소리도 듣지 못하였고, 붉게 타오르는 단풍도 바라보지 못하였으며,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소녀들의 활짝 핀 웃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한 교회, 완벽한 목회자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는 허점이 없고 허물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어떤 세대에도 완전한 교회와 완벽한 목회자는 없었습니다. 영국의 스펄젼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주십시오. 교회마다 돌아 다녀 보아도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이 '젊은이, 그런 교회를 한번 찾아보시오. 찾게 되면 저에게 꼭 연락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그 교회에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에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다시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기준으로도 완벽한 교회가 없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교회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보시기에 우리 영암교회는 완전한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대로 살려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는 우리를 흔드는 일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한다
봄에 돋은 보리 싹은 밟아 주면 더 든든히 자라고 줄기가 강해져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나 죽은 보리씨는 밟아 주면 땅속에 묻혀 썩어 버립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환난 중에 믿음이 더욱 자랐다고 했습니다. 낙심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우리를 어렵게 하고 흔드는 사람들이 있어도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인생의 목표를 잘못 설정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리고 허망하게 인생을 끝내기가 싶습니다. 우리는 판에 박은 일에 얽매여서 인생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살기 싶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목표도 더 높이 잡고, 우리의 이상을 더 높이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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