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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밝고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자 (딤전 05: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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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Fromm은 건강치 못한 사회를 세 가지로 특징지어서 정의합니다.
첫째는 적의입니다. 원수 맺는 일이 많아집니다. 모든 사람들을 평안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원수처럼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신입니다. 사람은 서로 믿고 살게 되어 있는데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사람도 병들었고 사회도 병들었습니다.

공자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해서 수제자 10명이 있었습니다. 그 수제자중 자공이 공자에게 질문했습니다. “나라가 잘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족식(足食) 족병(足兵) 신(信)이니라” '족식'은 생활의 안정이고, '족병'은 자주국방이며, '신'은 국가의 공신력을 말한다. “그 세 가지 중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병을 버리겠다” “남은 두 가지 중하나를 더 버려야 하신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식을 버리겠다”

그 이유는 나라는 경제력이 없어도 살고 군대가 없어도 살 수 있으나 신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삶의 철학인 것입니다. 삶에서 신(信)은 이렇게 중요한 정신이고 질서이고 철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라에는 신이 없습니다. 신의도, 정의도, 공의도 없습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믿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나라가 서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부정부패와 친척 비리라는 스캔들 속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불행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셋째는 도구화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 듭니다. 상대방을 수단화 합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생산의 도구로, 향락의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진정한 친절이 아니라 장삿속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 많아서 장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이런 생각을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수단화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찬 병든 세상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로 뱀이 되게 했을 때에 애굽의 술객들도 지팡이로 뱀이 되게 했습니다. 애굽에는 당시에 뱀에게 최면을 걸어 지팡이처럼 빳빳하게 만드는 요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뱀을 지팡이처럼 가지고 다니다 다시 움직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결국 모든 술수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요술이라는 것도 사람의 눈을 순간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진리와 비 진리가 혼돈된 사회입니다. 가짜와 진짜가 혼돈된 사회입니다. 언뜻 봐서는 구분이 안 되는 사회입니다. 참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회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이런 사회를 꼬집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케 하리라”

최근에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사회적인 비리에 얼룩진 뉴스를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통일이 시급한 우리 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말과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북한과 교류를 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권력형 부정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는 아직도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비애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공의가 상실되고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는가? 우리는 대개 세 가지 면에서 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폴 틸리는 말하기를 죄의 결과는 불안과 갈등과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습니다. 불안이란 자아를 파괴하고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에서 오는 갈등은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관계, 신뢰성을 깨뜨리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이번 대북 관계에서 4000억 북한송금사건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얼마나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남북통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밑뿌리까지 흔들리는 도덕성의 상실, 윤리적인 타락이 온통 나라안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란 자신을 파멸케 할 뿐 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너무나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에덴동산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뱀의 꾀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했을 때에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불안과 수치심, 저주받은 삶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뿌리는 아담과 해와의 아들들, 가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이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성경에 보면, 다윗 임금이 죄를 짓고도 죄 인줄 모르다가 나단 선지가 그의 죄를 고발하자 다윗은 자기의 죄과를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아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나이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편6편)
죄란 어떤 규범을 깨뜨리는 것이요, 진리를 거슬리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나라의 법을 어기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 하여도 방법과 수단이 옳지 않으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만일 대북 송금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쟁무기를 확보하는데 사용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된 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불신과 갈등을 겪게 하고, 종국에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인격을 파괴시킵니다.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인간의 영혼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합니다. 죄는 뼈의 진액을 말리고, 인간의 삶을 수척하게 만들고, 날마다 탄식하고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진리를 깨닫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 사회가 타락하는 원인은 공의가 상실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신학자 떼야르드 샤르뎅은 말하기를 '인간의 역사는 불의에 의해서 의가 시달려 온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성공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정의감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면서 악을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세상에서 불의한 사람은 성공을 거두고, 의롭고 선한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가? 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선하고 착한 사람은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공의와 불의를 구별하여 바르게 하는 것은 법률입니다. 검찰과 재판부가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잘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고 심판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8.15 해방 이후에 격변하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법률이 공의롭게 적용되지를 못했습니다.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법률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엄연히 실정법을 어긴 사건에 대하여 대통령이 사법 처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을 한 것은 국민들을 경악하게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검찰은 모든 수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비극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1-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의는 꼭 심판을 받게 되고, 공의는 영원하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짓고도 무서운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잠21:6)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공의가 상실되어 가고 있는 이 때에 금번 사건을 통하여 공의로운 사회 분위기로 반전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전화위복되는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셋째는 인간 사회가 타락하는 원인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항상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할 때에 그 역사는 진보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추진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 의식이 희박한 사회는 항상 퇴폐적이고, 부정과 부패가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 카릴 지브란은 그의 '무덤들의 외침'이란 글에서 살인범의 무덤 위에 칼을 꽂는 여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무덤 위에 꽂힌 칼! 그것은 정의의 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은혜를 받은 파스칼은 그의 수상록 '팡세'를 통하여 '나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사람이 낳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인생은 잠간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며, 이후에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행 한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가장 이성적인 학자로서 수학자요, 물리학자입니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삶을 바르게 하고, 선을 행하며,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죄의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심판을 전제로 한 삶은 절대로 어리석은 범죄를 마구 저지를 수 없습니다. 죄악은 반드시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깨달아 불의로운 사회 풍조가 의롭고 공의를 행하는 사회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요즘에 우리 사회는 가치관이 전도(顚倒)되어 죄악을 행하고도 죄책감도 없고, 불의를 행하고도 뉘우침이 없고, 악을 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가 타락하고 범죄가 날로 성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절대로 죄를 함부로 짓지는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천국과 지옥의 장면을 본 사람이 간증한 말씀을 테이프를 통하여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불신자였고, 예수는 물론 교회도 전혀 다녀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한 관계로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사시는 전라도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밤에 비몽사몽간에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생생하고도 상세하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너무도 놀라서 자기 스스로 교회에 나와서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고, 자기가 끔찍한 살인사건을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을 털어놓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죽어서 자기가 본 지옥에 간다면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몸서리칠 정도로 두려움을 가지고 이제는 정말 바르게, 선하고 착하게, 의롭고 깨끗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바르게, 깨끗하게,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가치관을 분명히 가져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는데, 그 날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애써 잡은 택시의 기사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도 없는데 신호등에 걸리면 마냥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이 타서 자기도 모르게 택시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길 건너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지나갑시다. 제가 너무 급해서요.” 그러자 택시 기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손님, 사람은 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이 한 마디에 그 목사님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택시 기사와 같은 자세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이 법을 지키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너, 그거 하면 안 돼” 하고 말하면 열 명중의 아홉은 세상이 다 그렇게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한다고 뭐가 잘못이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소련의 대문호 솔제니친은 “세상 돌아가는 대로 이것도 선이요 저것도 선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한 의인으로서 제 구실을 감당한다면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소망이 없어 보여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거짓으로 물들었던 우리의 영이 정직한 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 사회를 치료하여 살맛 나는 사회로 만들 능력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 서부이촌동 중산 아파트에서 불이 나 많은 사상자가 있었습니다. 불이 나자 30여명의 주민들은 불길을 피해 난간으로 나와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베란다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마치 최근 우리나라의 시국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버티지 못하고 추락한 주민처럼 그렇게 나라도 추락할 것인가. 정국혼란과 경기침체, 높은 실업률. 일부 계층의 과소비와 정신적인 공황….
대한민국의 살길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뿐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전주 예수 병원의 100년 사를 회고한 설대위 박사의 저서 ‘백년 전 사랑으로’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습니다. “1963년 어느 날,아홉 살 된 여자 아이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예수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아이의 배를 열어보니 기생충 덩어리가 소장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를 끄집어내니 그 숫자가 무려 1063마리에 이르렀습니다.
기생충들은 제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창자가 썩어서 회생하지 못했습니다. 좀더 일찍 손을 썼더라면 살수도 있었던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분개한 구바울 선교사는 이 일을 신문에 냈습니다. 그 기사는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급기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기생충 박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우리 국민의 기생충 감염률은 95%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이 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기생충 감염률이 3%로 떨어졌습니다. 세계적인 기록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날마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의 부정 부패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30여 년전 장폐색(腸閉塞)으로 세상을 떠난 그 소녀를 생각해봅니다. 어느 시대나 부정부패는 있었지만 근래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는 마치 기생충들이 소화기관을 틀어막고 있는 것을 연상케 한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도 부정 부패라는 기생충들이 나라의 소화기관을 꽉 막고 있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된 뇌물수수, 불의한 관행들을 ‘박멸’할 수 있는 묘약은 없을까요.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 곳곳에 성도들이 없는 곳이 없지만 캄캄한 사회는 도무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결국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삶을 예배의 일부로,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하며 구별된 삶을 살려고 결심하지 않으면 사회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만 ‘복용’하고 실천한다면 신약과 구약은 회충약과 비교할 수 없는 효능이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사는 것 따로, 믿는 것 따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목회 뿐 아니라 다른 직업들도 소명이고 또한 소명이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부디 더 늦어 소생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우리 사회의 ‘장폐색’이 치료되기를, 그리고 그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전위(前衛)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독일에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독일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히 눈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주택가를 지나다보면 집 앞의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집 앞만 아니라 자기 집이 위치해 있는 넓이만큼 연장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까지 치웁니다. 눈이 계속 오고 있으면 치워도 금방 쌓이니까 눈이 그친 다음에 한꺼번에 치우면 될 듯한데 중간 중간에 나와서 눈을 치우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참 남을 깊게 배려하는 사람들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았습니다. 자기 집 앞길을 치우지 않아서 지나던 사람이 미끄러져 다치면 집주인에게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참 법적인 정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아름다워지려면 두 가지 변화가 필요합니다. 심령의 변화와 제도의 변화입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남을 배려하는 제도가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남자 수백 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남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살맛 나는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제일 신나고 살맛 나는 때는 아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이고 두 번째는 직장에서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 안에는 격려와 칭찬이 부족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고 때리기도 하고, 여야가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하려고 하고, 목사와 성도들이 서로 잘못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칭찬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칭찬하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멸시와 미움을 받던 로마인 백부장을 칭찬했습니다. 최고로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열 두해 혈루증으로 앓던 저주받은 여자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격려하며 축복했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부도덕한 죄인인 한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하며 격려했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칭찬 받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칭찬은 참 좋은 것입니다. 칭찬은 받아도 좋고 칭찬은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칭찬을 받으려면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백부장이나 혈루증 앓던 여자나 죄인인 한 여자는 모두 겸손히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사람은 칭찬을 받는 만큼 달라집니다. 착하다고 칭찬하면 착해지고 예쁘다고 칭찬하면 예뻐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칭찬해야 하는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칭찬할 때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을 칭찬할 때 그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이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또한 칭찬으로 돌아옵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고와집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칭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보다 밝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만듭시다./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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