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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을 입으라 (엡 0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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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우리는 '개혁(改革)'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습니다. 개혁이란 '새롭게 고친다.' 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정권이 바뀐 이래 지난 몇 년 동안 금융개혁, 의료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 등등 개혁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단어를 잘못 사용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이라는 단어는 '고칠 개(改)' '가죽 혁(革)'입니다. '가죽을 고친다.' 즉 껍데기만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껍데기만 바꾸다 보니 변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라는 말 대신에 '개심(改心)'이라는 말을 쓰면 제대로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의료개심' '교육개심' '언론개심'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청와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가전제품을 사도 새로 나온 신제품을 사려고 하고, 구두 한 켤레를 사도 금년에 새로 나온 유행을 따라 사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먹는 것도 '퓨젼 음식'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음식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것도 그냥 이 모습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생각뿐이고, 새로운 삶에 도전을 해봐야지 하면서도 역시 생각뿐입니다. 새로워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연속극을 열심히 보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연속극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봐야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집을 떠나 여행도 하고, 산 속에 들어가 도도 닦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같은 생활이 반복될 뿐입니다.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도무지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한국 식당에 가면 한국에서 여행 온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비싼 비행기 타고 와서 매일 먹던 한국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열심히 다녀 봐야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새롭게 변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옛 사람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은 옛 사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허망하다고 하는 헬라어 단어 '마타이오테스' 는 '계약을 했으나 그 계약을 지킬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약속은 쉽게 하는데 사실 그 마음속에는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망하다는 단어의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서약을 했습니다.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합니까?' '네' 하고 서약을 하셨습니다. 또 직분을 맡을 때에도 진실한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할 것을 서약하셨습니다. 그런데 의무는 물론이고 권리도 찾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기도순서를 맡았다거나 안내, 또는 헌금순서를 맡은 것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하기는 하는데 처음부터 지킬 마음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대강대강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정신을 집중해서 하라고 말씀합니다. 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영어시간에 수학 공부하고 수학시간에 영어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공부시간에는 잠자고 노는 시간에는 벌떡 일어나서 공부합니다. 도무지 집중이 안됩니다.
여러분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훌륭한 인생은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을 담고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왕에 맡았으니 할 수 없지' 이렇게 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이 담겨있고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일에 여러분의 마음을 담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본문 18절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두움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디아노니아' 는 지적으로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을 눈으로 보기는 보는데 그 일이 의미하는 뜻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바로 앞에 나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말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부터 시작해서 개구리 떼가 세상을 뒤덮는 재앙, 이가 득실득실하는 재앙, 나중에는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총명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기는 보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총명이 어두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총명이 밝은 사람입니다. 척하면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과는 원수 나라입니다. 그러니 니느웨가 망한다면 잔치를 벌일 일인데 왜 가겠습니까?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큰 폭풍을 만납니다. 배가 거의 깨어져 다 죽게되었습니다.
이때 요나가 나서서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태를 빨리 파악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총명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요나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옛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면 다 운으로 돌립니다. '재수가 좋다', '재수에 옴 붙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잘못된 것을 고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총명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본문 18절은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말씀합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무지한 것입니다. 무지함이라는 헬라어 단어 '아그노니안'은 '무지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공부를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평균 40세입니다. 학술적인 통계가 아니라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시간, 그 젊음을 다 허비하고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둘 늘어갈 때쯤 되어서야 '아, 그때 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할 걸' 이 생각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모르니까 아까운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르면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모릅니다. 성경을 영어로 Canon이라고 합니다. Canon이란 '잣대'라는 뜻입니다. '키가 몇 센티냐?' 물을 때에 자가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없으면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규범이 됩니다.
요즘에 한국에서는 '하리수' 라는 과남현녀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과남현녀' 라고 하는 것은 제가 만든 단어인데 '과거에는 남자였는데 현재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사전에 이 단어가 나오면 제가 만든 단어인 줄 아십시오. 본래 남자였던 이 사람은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여자가 되었는데 연예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배우에 가수에, 여기저기 방송국에 불려 다니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흥밋거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100%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분명히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해 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기 쉽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성경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성경이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면 자연히 죄를 짓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본문 18절은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말씀합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굳어있다는 헬라어 단어 '포로시스'는 '석회석'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석회석처럼 단단히 굳어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 나는 무지무지 외롭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혹시 내가 교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한 사람은 친구가 없습니다. 외롭게 되어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새 중에 유난히 큰 참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깃털도 곱고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 참새는 다른 참새들을 무시했습니다. '아, 나는 본래 참새가 아닌가 보다. 뭔가 잘못되었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메추리 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자기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메추리 떼에 끼어 들려고 하니까 메추리들이 몰려와서 '야, 웃기지 마, 너는 참새야, 참새들에게 가서 놀아라.' 하면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참새들에게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참새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메추리들에게 갔던 놈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참새는 평생 외롭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 탓하지 마십시오.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굳어져서 언제나 내가 옳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용납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이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본문은 옛 사람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결론적으로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말씀합니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했다.'고 했습니다. 방임이라는 것은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도 포기하고, 양심을 따라 사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제 본문은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합니다. 본문 24절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했습니다. 내가 나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자기 스스로 새롭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탕자는 말 그대로 탕자입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패역한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 나누어줍니다. 유산을 나누어 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은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굶어 죽게되어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아들로 보지 마시고 품꾼으로 생각하십시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아들은 품꾼의 자격도 없습니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합니까? 정말로 쓸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야 말로 탕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입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장원급제하고 돌아 온 아들처럼 대우를 합니다.
이제 이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벌떡 일어나서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지금 당장 다시 집을 나가겠습니다.' 이래야 합니까? 아버지가 입혀준 옷을 입고 그냥 앉아있으면 됩니다. 아버지의 용서와 긍휼, 그 놀라운 사랑의 옷을 그냥 입고 앉아있어야 합니다. 잔치에 참여해서 마치 장원급제하고 돌아 온 아들처럼 먹고 마시며 즐기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새롭게 지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느냐 묻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게 맡긴 것을 왜 다 탕진했느냐 묻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 사람된 위치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잘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만 해도 얼굴을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에 매여있어서는 안됩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건반 하나를 잘못 눌렀다고 해서 그 실수에 매달려 있으면 안됩니다. 아직도 연주해야 할 악보가 많이 남아있는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중간에 잘못했다고 해서 낙심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실수를 용납해 주신 줄로 믿고 다시 한번 새 사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이 시간 새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난 일에 매달리지 맙시다. 이제는 새롭게 지음 받은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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