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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믿음으로 (롬 03: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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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자 중에 독일의 불트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비신화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비신화화 운동이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착하고 선하게 삶으로서 인간은 보다 고급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하게 살라는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성경은 이것이 마치 신의 뜻인 것처럼 신화화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거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던가 하는 신화적인 내용들이 들어가 있지만 이런 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런 신화적인 요소를 빼어버리고 성경의 근본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비신화화 운동의 내용입니다.
물론 이해가 잘 안되실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예를 들어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귀를 어디서 구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두 사람을 보내셔서 길거리에 매어있는 나귀를 무조건 끌고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했더니 정말로 나귀 주인이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이런 것이 신화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을 해둔 것인데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런 식으로 신화적인 분위기가 풍기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착하게 살라는 것인데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거기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서 '하나님이 착하게 살라고 하셨다.'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데 말을 안 들으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중에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 선한 일을 많이 해라.'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런 신화적인 요소들을 빼어버리고 본래 성경이 말하려고 했던 것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라.' 이것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신화화 운동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되는 분은 그냥 넘어가십시오. 몰라도 천국 가시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슈바이처라는 분입니다. 슈바이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요 음악가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흑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슈바이처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슈바이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도 믿지 않았고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단지 기독교의 정신, 즉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독교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모델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주장들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 속에 선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선한 성품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깨워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게 사는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결국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나 어떤 종교든지 결국은 착하게 살자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 속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착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없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쓰라고 하면 다 죄짓는 일 뿐입니다. 백 가지를 쓰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가만 내버려두면 언제나 죄짓는 쪽으로 가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선한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세리는 당시에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레위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자기와 같은 세리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비난을 합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 없고 부활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성경은 자꾸만 나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내가 어째서 죄인인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직장생활 하면서 먹고살고, 평생 나쁜 짓 한 기억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내가 어째서 죄인인가, 이번에 한국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죄인이지 내가 무슨 죄인인가?'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 TV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을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갓난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딸아이가 한 살이 채 못되었을 때에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돈을 훔쳐서 도망을 했는데 업고있던 아이를 그대로 데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아이는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애타게 찾던 부모는 몇 년 후에야 아이가 프랑스로 입양이 되어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프랑스인 양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매일같이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찾아가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지만 프랑스 법에 의하면 일단 입양이 된 아이는 본인이 원하기 전에는 절대로 친부모가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와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로부터 연락이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해전 꼭 한번 편지가 온 다음에는 연락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딸이 살고 있는 프랑스로 가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딸의 친구도 만나보고 딸이 살고 있는 동네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딸이 먼저 나와서 부모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눈앞에 있어도 먼저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죄이다.' 부모는 딸이 보고 싶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딸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1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서 6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다른 것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결국은 악한 일밖에는 할 줄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 23절, 24절을 다시 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결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값없이'라는 말은 '까닭 없이, 이유 없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하실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뛰어들어서 시체를 꺼낸 다음 인공호흡을 해서 다시 살려놓았습니다. 이 사람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없고 손을 흔들어 구조를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죽어서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살아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은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적도 없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뜻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하도 못해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고 영수증이라도 받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를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양 같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레위기 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니라.'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안수를 받는다고 하는데 안수라는 말의 뜻은 '힘을 주어 기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하던 일을 대신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서 안수를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직분을 위임받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안수집사님들이 계시는데 안수집사가 된다는 것은 옛날 초대교회 시대의 일곱 집사가 했던 일들을 오늘 똑같이 위임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수라는 단어가 언제나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이 제물에다 안수를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제물에게 대신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무겁게 지고 다니던 죄를 이제는 제물에게 맡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은 죄를 가진 채로 죽임을 당하고 불로 태워집니다. 이렇게 내 죄를 대신 맡은 제물이 죽음으로 내 죄는 사라지고 나는 의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맡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맡아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깨끗하게 씻겨집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 맡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까지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가 깨끗하게 용서받은 것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죽음은 이 세상의 어떤 무서운 죄도 다 사하실 수 있습니다. 설령 사람을 죽였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거의 지옥의 밑바닥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내 무서운 죄를 대신 맡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찬송 중에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를 지은 사람은 존 뉴톤(John Newton)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노예선 선장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에 노예로 팔아먹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나쁜 죄를 직업으로 삼고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놀란 것이 이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노예상인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을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어떤 일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과거에 작별을 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과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깨끗한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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