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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와 미투(Me Too)운동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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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에게 던져준 진주와 미투(Me Too)운동

마7:6 

  

예수님은 마7:6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읽을 때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았습니까? 거룩과 개, 진주와 돼지는 애당초 연결이 불가능한 조합입니다. 더군다나 개나 돼지가 거룩과 보석을 대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안다고 치고, 그러면 왜 개나 돼지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개와 돼지의 반응을 보면 먼저는 발로 밟고, 그 다음은 거룩과 진주를 던져 준 사람에게 덤벼들어 물어버린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본문의 전체와 연결하면 그것들(거룩과 진주)이 개나 돼지의 마음을 심하게 불편(당황하게)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편한 감정을 진주와 거룩을 발로 밟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걸 던진 당사자에게 덤벼들어 물어뜯는다는 것이죠. 곧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필요와는 전혀 다른 것과 마주쳤을 때 느끼는 불편을 성숙한 방식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 이를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돼지나 개가 왜 심기가 불편한 겁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건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건줄 알고 씹어 봤지만 진주나 거룩은 씹어 삼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죠.

 

영국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드(Frederick Forsyth)가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Opera)>에 바탕하여 쓴 일종의 속편 소설 <맨해튼의 유령 (The Phantom of Manhattan)>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에릭(Erik)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의 일부가 심히 일그러진 사람이라서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젊은 시절 어느 날 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불량배 몇 명과 만나 시비에 휘말리는데, 어느 순간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불량배들은 그의 추한 얼굴을 보게 되죠. 이때 이들은 반사적으로 에릭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들이 에릭을 얼굴을 보고 폭행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말하죠. 사람들은 추한 것은 악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 깡패들은 에릭의 비정상적인 얼굴이 주는 불편함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러한 불편함을 일으키는 대상은 악한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했고, 이 판단이 일으키는 거친 감정(아마 공포도 포함하는)을 해결할 방법으로 폭력행사 이외의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가 야만적인 불편반응을 보이는 대상과 포사이드의 소설에서 불량배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대상은 일반적인 인식에서 그 평가가 상반되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주는 좋아하고 심히 훼손된 얼굴은 꺼려하죠. 그러나 진주든 찌그러진 얼굴이든 그것을 마주친 사람에게 불편을 느끼게 한다면 어느 대상이거나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는 먼저 좋은 선물 자체를 "발로 밟"아 무시하고 그것으로는 분이 안 풀려 그 다음에는 이 선물을 준 사람을 난폭하게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이 두 단계는 모든 미성숙한 사람이 자기에게 불편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이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그냥 지나쳤고,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를 보고 똑같이 행동했다는 내용이 나오죠(10:30-31).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그냥 못 본체 그대로 지나간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을 만나자 이 상황을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인데, 이는 성숙하지 못한 불편반응의 1단계를 예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못된 불편반응의 2단계까지 나아가는 예로 이런 것은 어떠한가? 대학의 한 교수가 자기가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영어원서를 대학원생 몇 명과 함께 번역해 보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모임에서 교수가 어떤 대목을 번역하는데 잘못 옮기고 있어서 한 학생이 교수에게 이리이리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화를 내면서 자기 의견이 맞다고 우겼죠. (이 학생은 이 순간 다시는 교수의 오역을 바로 잡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다른 학생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오역이 지적 받자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가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학생의 의견을 받아들였겠지만 그러지는 못 했는데, 그래도 불편반응의 1단계까지만 가서 그냥 학생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예를 들어, "이 문제는 의견 일치가 안 되니 더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는 이 정도도 대체 할 수 없도록 마음이 비좁은 위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 자신은 과연 이 두 단계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것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제대로 알려고 하기 보다 단지 불편한 것이 싫어 그것을 은근슬쩍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이 없습니까? 더하여, 불편반응 2단계까지 나아가, 비록 예수가 말하는 개와 돼지처럼, 그리고 바로 앞에서 예로 든 신학교 교수처럼 난폭하게 물어뜯거나 내가 하는 번역이 맞다고 우기지는 않더라도, 불편하게 하는 대상 또는 제3자에게 경미하나마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사실 편안함에 깊이 중독된 존재라 누구든 이러한 철없는 반응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 가운데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중요한 것일 때가 있으며, 이 불편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큰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미투 (Me, Too) 운동"과 연관지어 오늘 성경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미투 운동이 드러내는 진실이 초래하는 불편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희정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 이후 "김지은과 함께 하는 사람들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의 반응은 성숙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자신들이 과거에 성폭력을 묵과한 점을 반성하고, 김지은씨를 비롯해 모든 피해자와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 문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은 앞에서 언급한 미성숙한 존재가 불편한 진실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반응, 곧 드러난 진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반응으로 이해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간 것으로 판단되는, 미련하고 난폭한 불편반응도 만나게 됩니다. 미투 운동에서 나온 성폭행 폭로에 대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SNS에서 저열한 말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는 안희정 사건을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장이 기획한 고단수 정치공작 이라고 했습니다. 야당의 성폭력근절대책특위 위원장은 "우리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나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일들이지, 성폭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말은 정치적인 계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고 분별력 없으며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사회는 모든 폭력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옹호하는 성숙하지 못한(성서 본문의 개와 돼지 같은)사회였습니다. 미투 운동은 프랑스의 68혁명처럼 새로운 사회와 인간 삶을 혁명하려는 출발점으로 우리 앞에 섰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 개인이 당한 수모와 고통을 드러내는 미투 (Me, Too)로 시작해서, 더 많은 개인들이 연대하는 위드 유(With You)로, 나아가서는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타임스 업(Times Up)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옹골차게 성취하는데 필요한 과제는 무엇일까요? 개나 돼지가 진주나 거룩을 받아 놓고 분노가 일어나 발로 차고지지 밟다가 사람에게 달려든다는 깨달음의 화두를 푸는 법은 뭘까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밤(Martha Nussbaum, 1947~ )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라는 강연에서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해 세 가지 차원, 곧 철학과 역사와 예술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가운데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상상하는 능력이 키워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해 우리 사회가 경주해야 할 또 다른 노력은 인권침해라는 폭력이 왜 나쁜 것인지를 깊게 고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철학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적 인간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서양 철학사>에서 중세에 가톨릭교회가 막강한 힘을 누렸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합니다.

 

중세 교회가 싸워야 했던 전통으로 로마와 게르만 전통이 있었습니다. 로마 전통은 이탈리아에서, 특히 법률가 사이에서 가장 강했고, 게르만 전통은 야만인들을 정복함으로써 태어난 봉건 귀족에게서 가장 강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전통 가운데 어느 것도 교회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 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전통들이 적절한 철학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이 없어서 종교의 시녀 노릇을 면하지 못했던 겁니다.

 

러셀은 이런 견해를 밝힌 다음 왜 적절한 철학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견해를 전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러셀이 철학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깊고 견실한 철학(사상, 이론)은 그 문제에 관련된 경험들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며, 인간이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데 필수적인 '이유'와 '명분'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스밤과 러셀의 말을 빌려 철학, 역사, 예술적 존재로 거듭나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개와 돼지처럼 진주나 거룩을 발로 차고 덤벼들어 물고 듣지 않게 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성서는 어떤 제안을 하고 있을 까요? 7절 이하를 보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는 ‘기도하라’는 기도 강령의 강조문구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유대인들의 히브리성서 풀이집인 ‘선조들의 어록’에서 ‘구하라’는 말은 ‘훌륭한 스승을 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찾으라’는 말은 ‘스승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함께 토의하고 공부할 동료’를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드리라’는 말은 스승을 구하고, 좋은 동료를 찾은 다음에 진리를 두드리면 진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앞에서 제시한 세 명제, 철학과 역사와 예술을 공부하라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욕망의 과녁에서 눈을 떼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자기 내면으로 쏘아야 할 때입니다.


불편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권침해의 고통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를 그냥 짓밟고 묻어버린다면 하나님과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저주할 지도 모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25:2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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