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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5> 라면 대신 쌀밥에 소고깃국… 부활절 첫 ‘밥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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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의 겨울은 길고 험했다. 창립예배를 드리고 얼마 후 그해 연말까지만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 공간을 구할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집 없고 배고픈 이들을 가족처럼 섬길 수 있는 나눔의 집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매일 청량리 일대를 돌며 공간을 찾았다. 마땅한 곳을 찾기도 했지만 건물주들은 번번이 거지들 밥 먹여주는 교회엔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낙심하고 있을 때 도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신대원 1년 선배이자 당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던 이재철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과는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교정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이 목사는 우리의 절박한 소식을 들었다며 선교비를 다일공동체를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때 주님의교회는 창립한 지 2년 밖에 안 된 신생교회였다. 이 목사는 예배당 건물을 짓지 않고 헌금 총 수입의 50%를 선교비로 쓰기로 교인들과 약속했다고 했다. 주님의교회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 목사는 이후 200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더 보내왔다. 그 귀한 도움을 받아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낡은 건물의 4층 옥상 위 가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밖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일명 ‘라면공동체 가족’이던 행려자, 노숙인들과 함께 길바닥에 눕기도 하고 예배당에서 어울려 자기도 했다. 세탁할 옷가지를 들고 집에 오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대책 없는 분 오셨다”고 인사를 시키곤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내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밥상을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밥상을 받고 목이 메었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속울음이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밥을 굶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이들이 생각났다. 난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데 그들에게는 라면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냈다. “밥 한 끼도 편히 못 먹고 청승 떨려면 당장 그만둬요. 나도 정말 못 참겠어요.” 아내는 눈물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만 두지 않으려면 얼른 이밥 먹고 기운내서 그들에게도 밥을 해주면 될 거 아녜요.”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내는 내게 통장 하나를 건넸다. 우리 집에 있는 현금 전부라면서 내 소원대로 밥 한끼라도 손수 지어 나누어 드리라고 했다. 너무 미안했다. 통장을 열어보니 79만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전기밥솥 네 개와 40명분 수저를 샀다. 반찬, 배식할 사람, 밥을 옮길 도구 등 많은 것이 더 필요했지만 일단 밥을 손수 지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라면공동체 가족들에게 부활절 점심 때 청량리역 광장에 다 모이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소망교회의 손은경 전도사와 여전도회 회장이 밥집을 지원하고 싶다고 현장을 찾아왔다. 그분들이 모금한 1000만원의 전세 계약금으로 밥을 지을 작은 공간을 빌렸다. 밥 나눔이 있을 거란 소문을 들은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도 날 찾아왔다. 역 광장에서는 밥 나눔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형사가 직접 알려준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더미 위에서 처음 밥을 나누기로 했다. 흰쌀로 지은 밥에 소고깃국, 김치와 잡채 등을 식판에 담아 나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처음으로 떠먹던, 지극히 작은 자들의 미소를 난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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