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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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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움 { ... 슬퍼하는 자들을 정하여 그들에게 재 대신 아름다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무거운 영 대신 찬양의 의복을 주어 ...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라.}(사 61:3) {재 대신 아름다움을},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무거운 영 대신 찬양의 의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다윗은 전에 이렇게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내가 주께 바라던 한 가지 일, 그것을 내가 구하리니, 곧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주의 집에 거하며,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과, 그의 성전에서 아뢰는 것이라.}(시 27:4) 비록 이것이 우리가 분별하기에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니이다.}(시 116:15) 왜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서 죽음의 옷을 입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감춰진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나, 나타난 일들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신 29:29). 그 어느 날 우리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12). 그래서 우리가 오늘 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또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은 많은 사람의 감사로 인하여 풍성한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에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4:15)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바울은 우리에게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고후 4:17)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알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재 대신 아름다움을} 주시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선물이다. 첫째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책,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창시자시자,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께서 다루시는 생명의 종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요한복음 5:24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너희를(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잔하지 않는 유업을 간직해 두셨}습니다(벧전 1:3,4).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그것은 바로 하늘에 간직해 두신 영원한 유업을 의미합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후 5:1,2). 나에게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주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사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녀는 아주 귀여운 소녀였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나는 내 친누이에게 나를 개인적으로 소개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있는 이 구절들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임시적인 몸을 입고 예수께서 오실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게 될 것입니다(살전 4:17). 분별력이 있는 나이에 이른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주를 영접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받게 됩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둘째, 영원한 생명을 지닌 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들도 죽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육신의 죽음일 뿐입니다. 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나는 몸 안에서 살고 있는 혼을 소유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내 육체가 죽고, 사람들이 내 육신을 땅 속에 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혼을 흙 속에 장사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혼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최근에 내 책상에서 아주 가치 있는 우편물을 받아 보았습니다. 나는 봉투를 뜯어 그 편지를 꺼내고 난 후, 빈 봉투는 내 옆에 있던 휴지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봉투는 실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단지 내게 그 내용물을 담아다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믿는 신자들은 인간의 몸이라는 봉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에서 이 몸이란 그릇 속에 임시적으로 놓여질 수는 있지만, 우리 몸의 속알맹이는 장사될 수 없습니다. 실제의 사람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는 {몸에 있는 집에 거할 때, 우리가 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고후 5:6)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자신에 차 있고,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라.}(고후 5:8)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은 그래서 몸에서 혼이 떠나고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죽음은 떠나가는 것(departure)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은 것이라다고 진술했습니다(빌 1:23). 한 배가 이 해안의 부두를 떠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 우리는 그 배가 곧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라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아주 확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생에서 몸을 떠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떠나가는 것이지만, 곧 훨씬 더 아름다운 본향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말한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때 수평선을 가로질러 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달한 시간입니다. 떠나간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날이 바로 대관식 날입니다. 우리의 손실은 그들의 유익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부활 장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전 15:19)고 진술한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테네시 시에서 한 성경 교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하늘로 갔습니다. 한 친구가 마을에 도착해서 그의 운명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가 죽었다고 말했습니까?라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큰소리로 말하면서 죽었다구요? 아니오. 그는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습니다. 하고 그 친구는 대답했다고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비록 지금 그를 위한 장례식이 여기서 거행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주와 함께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본향의 깨지지 않는 생활을 의미한다. 셋째,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본향의 깨지지 않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본향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먼저 그곳에 간 구원받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재회하는 영광스러운 시간을 의미합니다. 설교자인 나의 두 형제들과 나는 몇 년 전에 우리 부친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우리는 모두 그 관 속에 누워 계실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그분보다 앞서가신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려고 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말씀하신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구약에서는 어떤 하나님의 성도들이 이생을 떠났을 때, 그들이 그들의 백성에게로 합쳐졌다고 반복해서 들려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5:29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 혼자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달콤한 교제의 장소에 있게 됩니다. 어느 날 그들의 몸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으켜질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그들과 함께 끌려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 ...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그 놀라운 곳에 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고 하더라.}(계 21:4) 네 그렇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나이의 이런 아기들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생을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그분과 함께 재회의 장소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 어린 소녀가 자기 오빠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목사가 장례식에서 설교해 준 재회의 약속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며칠 뒤 그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오빠와 사별한 날에 대해 슬프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오빠가 하늘로 갔다고 말했잖아요. 엄마는 오빠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아는데, 왜 오빠를 잃었다고 말해요? 이 일화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교훈을 줍니까! 만일 우리가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영원한 본향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약속과 안식을 주장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오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개인의 구주로 믿고, 이렇게 이 영원한 생명을 놀라운 선물로 받으실 수 있다는 가장 큰 위로를 받으십시오.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2) {그를 찾을 만한 때에 너희는 주를 구하며, 그가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사 55:6) 이제 그분을 믿고, 영원한 구원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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