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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봉사

  • 이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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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봉사                             

눅10:38-42


  당신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교회만 출석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대체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 중에 예배와 말씀을 소홀히 하는 성도는 없습니까? 만일 그런 성도가 있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말씀과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일을 해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성도는 믿음이 견고하게 성숙되지 못하며, 언젠가는 지쳐 주저앉게 됩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중에도 문제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말씀과 예배가 봉사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봉사하되,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가 먼저이고,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얼마 후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38절) 요한은 마르다의 집은 베다니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요11:1)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요11:18)
  마르다가 언니였고, 마리아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그들의 오빠였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남매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남편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마태복음 26장에 기록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자가 마리아라면, 아마도 마르다의 남편은 나병환자 시몬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26:6-7) 물론 예수님께서 시몬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병환자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시몬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처럼 특별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 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미리 사람을 보내셔서 그 집을 방문하시겠다고 알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 가실 때도 사람을 먼저 보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눅9:51-52)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할 것이라는 기별을 받은 이 가정은 예수님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주관한 사람은 마르다였습니다. 누가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책임은 마르다가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식구들이 집을 정돈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남편을 고쳐주셨고,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마르다는 이 기회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마리아도 언니 마르다를 도와 함께 음식 장만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 듣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절) ‘발치에 앉아’라는 단어는 학생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집중하여 말씀 듣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듣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을 들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마리아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화가 난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좋은 음식을 많이 대접하길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던 마리아는 일이 너무 많고 힘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들려면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도와주던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마르다는 혼자서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일하면서 연신 마리아에게 그만하고 돌아와서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언니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가 분주하고 힘들게 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마리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마르다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잘 대접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일이 너무나도 많고 바빠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속없는 동생 마리아는 그런 언니의 사정을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르다가 얼마나 바쁘고 힘든지 뻔히 아실 텐데 계속 마리아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마르다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화를 내며 마리아를 책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이 선합니다. 저도 간혹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결혼생활 초기에 저는 무심코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 다 아는 형편이니 그저 라면이나 같이 끓여먹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내는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근사한 상을 차려냈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말도 없이 갑자기 손님들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아내 혼자서, 그것도 가난한 살림에 손님 대접하느라 얼마나 난감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 후로도 아내가 혼자서 많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대부분 기쁘게 했지만, 때로는 일이 바쁘고 힘들어 신경이 예민해지고, 옆에서 지켜보기가 미안하고 눈치가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혼자 음식 장만하던 마르다의 형편과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일들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마르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 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르다에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절)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대한 마르다의 사랑과 주님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그녀의 정성과 열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염려한다’는 말은 과도한 욕심으로 인하여 마음이 어지럽게 분열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분별력이 약해지고, 올바른 행동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많은 일에 시달리며 염려합니다. 그러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일에 빠져서 가족들과 사랑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가정과 자녀들이 피폐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회도 많이 피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습니다. 많은 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염려합니다. 경제적인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일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 우리의 염려는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염려하다보면 우리의 분별력이 흐려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음식을 장만하던 마르다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를 보면서 화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앉아 말씀이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한 나머지 마르다는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더 좋은 편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정성과 열심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를 조용히 타이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그렇게 많이 장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하고 염려에 빠진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준비해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는 이 말씀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길 원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의 없이 건성으로 손님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과 예배, 또는 일과 말씀 듣는 일이 상충될 때입니다. 봉사하기 위해 예배를 빠진다든지, 일이 너무 바빠서 말씀을 배우거나 묵상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덜 중요한 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장만하는 마르다의 봉사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말씀 듣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음식을 덜 장만하더라도 같이 앉아서 말씀 듣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정 음식 만드는 일을 더 해야 한다면, 마리아만이라도 그 일을 돕기 보다는 계속해서 말씀 드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습니다. 말씀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말씀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열심과 정성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봉사는 많은 염려와 근심을 낳게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잘 대접하기 원했으나,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했습니다. 많은 염려 때문에 그녀의 분별력이 희미해졌던 것입니다. 결국 마르다의 봉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르게 따르며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많은 봉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매일 순간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제대로 분별하여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무엇도 이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이것보다 우선순위에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길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며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집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우리는 늘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봉사합니다. 늘 바쁘고 피곤하고 시간이 없습니다. 이럴 때 뒤로 밀리기 쉬운 것이 예배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배와 말씀과 기도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내 생각대로 봉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봉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와 말씀은 바쁜 우리의 일상 중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나가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는 교사들이나 주방 봉사를 하는 분들이 주로 1부 예배에 참석합니다. 봉사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러 나와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간혹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봉사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정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봉사는 못할지라도 예배는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며 섬기되,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기를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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