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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당신에겐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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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에겐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막7:24-30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의 거룩한 성소를 잃고 혼란에 빠집니다.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자 신앙의 중심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전이 사라졌으니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유대교 갱신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예수 운동의 한 분파는 성전의 멸망에 당황하지 않고 전쟁을 피해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세례예식을 통해 기존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과 함께 각 가정에 모여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눕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된 이 종교 또한 위기가 닥칩니다. 44년 교회의 세 기둥 중 하나이고 예수의 제자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유대 서기관과 손잡은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처형을 당했던 겁니다. 이때 베드로도 잡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권위는 떨어지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만 예수의 동생 야고보도 62년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돌로 맞아 죽습니다. 60년대 후반에는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가장 큰 지도력을 발휘했던 베드로마저 순교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지도자들을 모두 상실하는 상황이 되어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게 됩니다.

 

전쟁의 위기 상황이고, 지도자도 없이, 유리걸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를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마가 공동체는 새로운 방식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교회를 만들어 갑니다. 이 새로운 가족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인 마가복음 3장 35절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는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누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에서도 자세히 보면 아버지가 빠져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것은 마가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관계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태동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제자단이었던 사도계 공동체들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마저도 그들에게 자신의 선교에 대해 허락을 맡아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이 사도계 공동체는 예수님의 평등한 관계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 야고보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이들이 유대의 정결 예법을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와 바나바를 포함하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것을 비난했고, 베드로가 슬금슬금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한 것에 대한 바울의 분노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수장이 되면서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하는 기독교로 모든 교회를 통일하려고 했고, 야고보의 순교 이후에 예수의 삼촌 시므온이 수장이 되고 이후 도미티안 시대에는 예수의 동생 유다의 두 손자가 통치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가족들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근거를 가지고 계속 권력을 가지게 되자 초기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저항과 불신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마가복음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12장 35-37절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문제 삼고 있고, 3장 20-35절에서는 예수의 가족과 예수의 불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1세기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는 바로 권력의 상징이고 예수 사후 예루살렘 교회가 가부장적 권력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바울이 죽은 다음에 디모데전후서나 디도서의 기록자들인 바울 2세대들 또한 비슷하게 교회에 직제를 도입하면서 교회는 점차 제도화되어가고, 제도화에서 생기는 불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전체를 자세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보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열둘의 제자들, 특히 예수께서 수행원처럼 데리고 다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얼마나 무지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하나님 나라 선교에 대해 몰지각한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함께 하자고 초청한 이들이고 그 초청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임에는 분명하지만 갈수록 그들은 예수의 제자됨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으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먹이는데 실패하고,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를 고치지 못하며, 세상을 향해 산 밑으로 내려가기는커녕 산위에 좋은 집을 짓자고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열둘 중에 그 길을 따른 남성제자들은 한명도 없습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가로막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 계속 되는 수난 예고 속에서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왕이 될 때 한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 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못 오게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막는가 하면, 누가 높은지 다투기 일쑤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열두 남자 중 하나가 예수를 배신합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며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드리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 함께 해달라는 요청에도 쿨쿨 잠이나 자다가 예수가 잡히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끝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던 베드로조차도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권력을 추종하고 권력의 시녀가 된 집단의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행태였던 것입니다. 그럼 권력을 상징하는 아버지를 없애버린 공동체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제가 인사동엘 들락거릴 때 경서강독이라는 걸 했습니다. 그 때 강사이시던 충남대의 노교수가 제가 목사인 걸 알고 말하길, 성경에는 특히 마가복음에는 여자들이 엄청 나오지만 공자의 논어에는 딱 한번 여인에 관한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이렇다고 했습니다. “공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가르치기가 어렵다. 친밀하게 대해주면 불손하고, 좀 엄격하게 하면 원망한다”(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陽貨-25-01)

 

<바람의 화원>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화려한 색체에 언제나 여성이 등장하는 신윤복의 그림을 근거로 신윤복이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저는 혹시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나친 상상일까요? 마가 복음서를 만들어낸 공동체는 여성들이 많은 활약을 보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사도들은 죽고 그들이 이끌던 공동체들은 유대교의 가부장적 제도와 권력으로 변질되는 상황에서 마가 공동체에는 평등한 하느님 나라의 밥상공동체를 예수와 함께 준비했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금 갈릴리의 예수 운동을 일으키려 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마가 복음서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여인은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그는 열병을 앓고 있었고, 예수께서 열병을 고쳐주자 일어나 곧바로 그들을 섬깁니다. 처음 여성은 제일 낮은 자리에서 시중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주목해 볼 여성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았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당시의 여성이 피 흘릴 때는 부정하다는 고정관념을 무시하고 예수께로 나아가 구원을 얻은 여성입니다. 남들에게 부정을 전염시키는 옳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정하다/부정하다”라고 가르고 판단하는 인간들의 나쁜 습성을 깨뜨리는 행위였고, 예수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세기는 엘리트와 대중으로 철저하게 계급을 나누고 계급에 따른 규정이 정해져 있는 것만큼 성별의 차이에 의해서도 역할 배분과 능력할당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강하고, 용감하고, 관대하며 신중하고 이성적이며 절제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여성은 약하고 겁이 많고 소심하고 수다스러우며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며 절제되어 있지 않다고 여겼지요. 그래서 약하고 겁이 많고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여성은 남성의 보호아래 가정의 영역에 갇혀 지내야 했고,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수치이자 자신의 남편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물론 여기서 사람은 남자들이겠지만) 이런 시대적 인습을 깨고 나온 여성이 바로 하혈증 걸린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수로보니게(시로페니키아)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성은 배울 만큼 배우고 상류층의 문화를 향유하던 헬라 여성이었고,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대 제국을 세웠던 페니키아 왕국의 후예였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딸, 즉 병들어 있는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해 모욕적인 언사를 참아가며 얼마나 지혜롭게 예수와 논쟁하는지 보십시오. 히브리 산파들이 이집트 대 제국의 황제의 명령을 그들의 기지와 재치 있는 말로 거부하고 출애굽의 첫 관문을 여는 것처럼 오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인내와 지혜로 이방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이 여성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음 등장하는 여인은 과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나 보상을 바랬던 열둘과 달리 그녀는 구차한 중에도 모든 것을 바칩니다.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십자가의 도상에서 열둘은 모른 채 하거나 피하거나 전혀 딴소리를 해댔으나 무명의 한 여인은 노동자의 1년 품삯이나 되는 향유를 마련해 예수의 메시아 등극을 준비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의 임명식에서 하는 행위였습니다. 여인은 예수에게 기름부음으로 진정한 메시아가 지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열둘은 도망가고 아무도 남지 않은 십자가 아래,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들개들과 까마귀만이 우글거리는 곳에 갈릴리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랐던 여성 3명이 남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들은 이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대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이들만이 갈릴래아에서 다시 예수 운동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인들만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예수를 끝까지 따르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부터 십자가 죽음의 현장의 섬김까지 새로운 공동체의 평신도들의 핵심 키워드는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따르는 일에서 영광을 바라던 열둘은 실패하고 사랑으로 남을 돌보는 데 익숙했던 여성들은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없이 섬김의 길을 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렇게 조용히 남을 시중드는 일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고, 또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일을 하는 이들은 지치기 쉽고,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왼손이 모르게 하는 오른손들이 많을 때 그 공동체는 온갖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됩니다. 드러내지 않고 하는 말없는 봉사가 많을 때 그 공동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는 30배, 60배, 100배가 됩니다.

 

마가복음서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은 한자 그대로 풀면 “복 있는 소리”이겠고 “기쁜 소식”입니다. 원어로는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로마 황제와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황제 임명식을 할 때 그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유앙겔리온”이라고 선포합니다. 제국의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가 궁전으로 입성할 때면 나팔을 크게 불며, 옆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유앙겔리온”하고 외쳤지요. 또 황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손에 들고 “유앙겔리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황제의 “유앙겔리온”은 바로 폭력과 억압과 권력의 승리를 뜻하는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기원전 1년 6월 18일 힐라리온이라는 이집트의 한 노동자가 자기 아내 알리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힐라리온이 알리스에게 진심으로 안부를 전하오. 또 나의 존경하는 장모님 베로우스와 나의 아들 아폴로나리온도 잘 있는지요. 우리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다오.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돌아갔는데,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은 것을 걱정하지는 마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내 아이를 잘 돌보아 주오. 이제 곧 내가 받은 품삯을 당신에게 보내리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이면 그대로 두고 여자 아이라면 내어버리시오. -이하 생략-”

 

평범한 노동자의 편지에서도 나오듯이 당시의 기쁜 소식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소식이 될 수 있던 것입니다. “사내아이면 그대로 두고, 여자 아이거든 <죽도록> 내어버리시오” 황제의 경우 여자아이면 그 아이를 낳은 대리모와 함께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당신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뭐가 “유앙겔리온”입니까? 마가는 말합니다. “사랑으로 섬김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지배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은 회개하여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이제 서로 섬기는 평등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본론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말로 갈릴래아에서 본론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암시만 합니다. 그럼 본론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해답은 여러분 손과 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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