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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를 버리라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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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버리라 (요한복음 13장 21-30절)


< 가룟 유다가 되지 않는 길 >

 가룟 유다 이전까지 유다란 이름은 유대인에게는 아주 흔하고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로 그 이름은 기독교계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가룟 유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다. 그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기 생각을 버리라

 왜 가룟 유다가 한때 예수님을 열렬히 따랐는가?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것을 알고 자기 욕망이 투영된 이런 결심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저분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 로마의 압제를 넘어서리라.” 제자의 삶을 결심할 때 가룟 유다처럼 결심하면 배반의 길로 가기도 쉽다. 리더의 능력과 인격과 비전을 신뢰하면 “내가 저분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순전하게 따라야지 “내가 저분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자기 욕망을 투영한 상태로 따르면 언젠가는 배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다른 11명의 제자는 순전하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아도 쉽게 의문을 품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이 기대만큼 커지지 않아도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았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자기 욕망을 투영해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으면 금방 의문을 품었다. “왜 예수님이 저렇게 행동하실까? 왜 공동체 성장에는 관심이 없을까? 힘이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그는 개인적인 욕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마음도 조급했다. 또한 예수님이 엄청난 능력을 활용해 큰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정적으로 활동하니까 답답했다. “저러면 어떻게 세상을 바꾸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가 몰려들 때 잡지 않고 이상한 말씀으로 오히려 무리를 떠나가게 하면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점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의 공동체는 외적으로 별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외형적인 성장이 없자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과 비전과 사역 방식이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배반의 길로 떠났다. 예수님을 순전히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지만 외형적인 성장도 없이 고작 12명의 제자만 남기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셨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외형적인 성장이 없는 것에 실망해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해서 비극적인 인생이 된 것이다.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고 그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가룟 유다의 눈에는 12명의 볼품없는 소수의 제자만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 소수의 제자를 통해 천년영향력을 넘어 영원한 영향력을 계산하고 계획하셨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바른 길에서 인내해야 불행과 수치와 비극을 막을 수 있다.

2. 자기 감정을 버리라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제자들이 서로 보며 과연 누가 예수님을 팔까 의심했다(21-22절). 그때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누운 사도 요한에게 베드로가 머릿짓을 해서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지 물어보라.”고 했다(23-24절). 사도 요한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누웠던 것을 보면 당시 식탁은 의자가 있는 식탁이 아닌 의자가 없는 좌탁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해 물었다. “주님! 누가 주님을 팝니까?” 그때 예수님이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한 후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26절). 그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절망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기를 예수님을 팔 자로 지적하는 것 같아서 큰 상처를 받고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른 제자들이 보고 듣는 데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처를 주면 되는가?”

 그때가 마지막 회개 기회였기에 그는 자기 감정을 버리고 철저히 회개해야 했지만 오히려 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 당시에 나머지 제자들은 무슨 일을 속히 하라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가룟 유다는 금방 예수님을 파는 일을 속히 실행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자기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곳을 뛰쳐나갔다(30절).

 그의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쓸쓸하고 비극적인 모습이다. 창조적인 고독은 필요하지만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자초한 영적인 왕따는 되지 말라. 왕따 문제가 왜 생기는가? 악하게 따돌리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지만 자세히 보면 따돌림 당하는 사람이 문제일 때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왜 따돌림 당하는가? 대개 자기 감정과 자기 유익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계산적인 태도를 버리라. 사람은 계산적으로 사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권력과 외형 지향적인 모습도 버리라. 공동체의 바른 길보다 육적인 자기 길을 앞세우거나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 높은 마음을 가지면 따돌림 당하기 쉽다. 반면에 공동체를 존중하고 헌신하면 따돌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리더를 존중하고 받기보다 드리기를 힘쓰며 특히 자기 개인 감정을 잘 극복하라. 그러면 소외되지 않고 조만간 공동체의 중심에 서게 된다.

3. 자기 공로를 버리라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내 공로는 부끄러운 공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충성하고 헌신할수록 더 겸손해지고 오히려 나의 부족한 충성과 헌신을 부끄럽게 여기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나에 대한 관심을 한 번도 끊지 않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 한 것이 뭐가 그리 큰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께 인심 쓰는 것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표현이다.

 사람 관계에서는 봉사가 가능하지만 하나님 관계에서는 사실상 봉사란 개념이 없어야 하고 오직 충성만 있어야 한다. 봉사란 아무 것도 얻지 않고 공짜로 무엇을 해주는 것인데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영생을 얻고 수많은 축복도 덤으로 얻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봉사한다는 말이 별로 맞지 않는 말이다. 더 나아가 내 봉사가 하나님께 무슨 큰 봉사가 되겠는가? 진짜 봉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셨다.

 소유의식도 잘 버리라.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내 소유도 하나님의 것이다. 내 소유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교만과 타락의 길로 빠진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생명도 오늘 하나님이 부르시면 끝난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내놓으면서 인심을 쓴다고 여기지 말고 남이 내 헌신을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말라. 헌신할 때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여겨야 자기 공로의식에 빠지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집사가 간증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세상적인 신세는 망가졌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 믿을수록 집을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드리고 싶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진 집도 다 드리고 아내와 월세 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기쁩니다. 그 기쁨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간증은 주 앞에 죽도록 충성했다는 것뿐이다. 그토록 충성하면서도 더 충성하지 못해 죄송하고 부끄럽다는 간증이 진짜 간증이다. 예수님을 믿고 성공했다는 간증은 기복주의만 조장하고 영양가도 없다. 그런 축복은 불신자에게도 있다. 재벌 회장 중에는 불신자가 훨씬 많다. 구원의 크신 은혜와 덤의 복을 받은 자는 자기 공로의식을 버리고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소리 없이 충성하고 헌신해야 한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소외된 인생이 아닌 교회와 사회와 역사의 주류 인생이 될 것이다.

< 자기를 버리라 >

 가룟 유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를 버리지 못한 문제였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남의 버림을 받고 공동체에서도 소외된다. 자기에게 집착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라. 또한 “내가 너무 나 중심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수시로 자문하면서 남을 힘써 배려하는 영적인 감수성을 키우라.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은 대놓고 말한다. “내가 뒤끝이 없는 것 잘 알잖아.” 은근히 자기 캐릭터가 멋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지만 그 말은 결코 자랑스러운 말이 아니다. 뒤끝이 없어서 상처받은 것을 잘 잊는 것은 그나마 낫지만 상처를 준 것을 잘 잊는 것은 큰 문제다. 불의하고 무도하게 상처를 주어서 남에게 뒤끝이 있게 만들고 자기는 뒤끝이 없다면서 “그 사람, 도대체 왜 그래?”라고 하는 태도는 영적인 감수성이 없는 무지한 태도다.

 “나는 뒤끝이 없어.”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인 캐릭터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언사로 여겨지기에 요새는 그 말이 “나는 배려심이 없어.”라는 말로 들리는데 어떤 사람은 아직도 그런 말을 쉽게 쓴다. 또한 뒤끝이 없어서 상처 주는 것을 잘 잊는 것도 문제지만 상처 받은 것을 잘 잊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못된 언행으로 상처받는 상황을 계속 자초하면서도 고치지 않는 불통 캐릭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남매 중 둘째인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상처 주는 언행이 심해서 다른 5명의 형제가 그녀를 은근히 멀리했다. 어느 날 그녀가 가족 카톡방에 소식을 올렸다. “모두 잘 있었어? 내가 이번에 북한산에 갔다가 다리를 다쳤어.” 그러나 아무도 위로의 댓글을 달지 않고 외면했다. 그런 따돌림 상황에서 상처받으면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내 평소 언행이 형제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구나.” 그렇게 자신을 성찰하고 언행을 조심하면서 점차 성숙해진다.

 그런 성숙함이 그녀에게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에게 뒤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글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까 상처를 받고 처음에는 흥분해서 “왜 가족들이 다 그래?”라고 하면서 가족과 완전히 인연을 끊을 것처럼 나왔다. 그런데 뒤끝이 없으니까 몇 개월 지나면 이전에 상처받은 것을 다 잊고 또한 연을 끊겠다고 한 말도 다 잊고 다시 슬그머니 가족 카톡방에 소식을 올렸다. “모두 잘 있었어? 내가 이번에 이사 가게 되었어.” 성찰과 성숙도 없이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보통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캐릭터와 단점을 점차 고치는데 뒤끝이 없는 사람은 진지한 자기 성찰도 없이 시간만 조금 지나면 그 상처를 그냥 뭉개버리니까 성숙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배려심과 이해심과 자기 성찰은 상처를 인생의 보물지도로 만들지만 뒤끝이 없는 태도는 상처를 의미 없이 흘러간 과거의 일로 만들기 쉽다. 그처럼 뒤끝이 없기에 상처 위에 상처가 계속되는 줄도 모르고 “나는 뒤끝이 없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살아가면서 상처를 너무 잘 받으면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반대로 상처를 너무 안 받아도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상처를 잘 받지도 않고 뒤끝이 없으면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른다. 상처받을 때 믿음으로 자기 성찰을 하면 삶의 위기를 삶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다. 특히 말씀과 기도는 자기 성찰을 위한 최적의 도구다. 살다 보면 수시로 상처가 다가온다. 그때 말씀과 기도로 자기 성찰을 잘하고 자기를 잘 버려서 회개 없이 자살한 가룟 유다의 길이 아닌 회개하고 다시 쓰임 받은 베드로의 길로 들어서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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