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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면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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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면

막16:1-8, 창 4:1-12

 

부활하신 예수님은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부르시고 새로운 임무를 부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이었죠? 그러면 과연 그 임무의 뜻 혹은 제자들이 이루어야 하는 과업은 무엇일까요?

 

이 복음서 맨 끝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이 나옵니다. 기사를 보면 빈 무덤을 찾아온 여인에게 천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에 말한 대로 갈릴리로 가셨으니 갈릴리에 가서 그를 만나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복음서를 끝마친 기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서학자들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각 가지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설이란 부활 사건을 기록한 페이지들이 분실이 됐을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당시 이와 같은 기사들은 파피루스라고 하는 나일 강가에서 자라는 넓은 나무 잎에 기록을 했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기록한 것이 바람에라도 불려가서 분실이 된 것일 것이라고 상상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억눌린 자들이 하늘을 향해서 아우성을 치는 고생하는 무리들 가운데 계시기에 그리로 가야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마태복음서 25장 31절에서 46에 있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 임금님은 심판 받을 자들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의 좌 우 편에 갈라놓으시고는 우편에 앉은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등등“라고 말했을 때 바른 편에 앉은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이 언제 굶주렸을 때 잡수실 것을 드렸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드렸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맞아드렸습니까?“ 하고 반문하자 임금님은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억눌리고 천대받는 자들과 같이 계시기에 그들을 돌보는 것이 주님을 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왼편에 앉은 자들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왕은 저들에게는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예수님을 푸대접한 것이라고 지적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영원 벌을 주셨다는 것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관심이나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은 갈릴리(현재로서는 상징적인 동네)에 있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들과 같은 자들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서를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철저히 억눌린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큰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자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이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가인을 불러서 그가 한 일을 꾸중하시고 그에게 엄한 심판을 내리셨지요? 그리고 아벨 대신으로 셋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강자들에게 쫓겨나 떠돌이가 되자 하나님은 그를 찾아 오셔서 온 인류가 평화롭게 살 새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쫓겨난 애굽출신 여종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호소를 했더니 하나님은 그녀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후손이 크게 번성 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노예들이 아우성을 치자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남. 북조 통치자들이 탐욕에 사로 잡혀서 약자들을 수탈하자 하나님은 계속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저들을 이방인의 손에 부쳐서 다시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고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창출하도록 경륜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와 결탁을 하여 농민들을 수탈하자 그의 뜻을 완전히 체화(體化)한 예수를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보내셔서 새로운 생명공동체를 이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눌린 자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창출 해 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그 깊이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 예수님의 삶 역시 자신을 완전히 밑바닥 사람들에게 주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나날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 무리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시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농촌에서 쫓겨나 떠돌이로 사는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자들을 격려하시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는 죄인이라고 천대받는 밑바닥 사람들을 껴안으셔서 서로 위하고 아끼는 생명공동체를 이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운 자들이라고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서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삶이야말로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길이라고 가르치시면서 이와 같은 삶의 도를 온 천하에 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다가 원수들의 손에 돌아가신 그의 영은 다시 한 맺힌 무리들 사이에 살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그가 살아서 움직이는 곳, 그분이 아직도 활동하고 계시는 고통스러워하는 무리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서 28장 16절에서 23 절에 보면 갈릴리로 찾아온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사람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여 그가 말과 삶으로 가르친 것을 다 지키게 하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삶으로 갈릴리에서 이룩되었던 하나님 나라 잔치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우리는 다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이룩하셨던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이 재연되게 하여야 한다는 의미죠.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한 물음은 오늘의 갈릴리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겠죠?

 

오늘의 갈릴리 하면 우리는 곧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이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직도 유혈 참담한 팔레스틴과 같은 곳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저주스런 에이즈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아프리카인들을 생각합니다. 그곳들이 21세기의 갈릴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기도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도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 생명공동체를 창출하는 기쁨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는 그렇게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이 시대의 갈릴리에서 할 일이 분명해지겠죠.

 

예수님의 선교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라는 확신에 찬 선포로 시작이 됐습니다.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갈릴리 민중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확신이지 천국과 지옥의 공포를 조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내일을 갈망하는 우리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사신 삶의 원칙에 따라 살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볼 수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서 살기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나 생각 없이 엄벙덤벙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확실한 목표가 없이 교회를 들락날락합니다.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꿈은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이 나라를 주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면 그 기쁜 잔치가 재연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꼬대하듯이 살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목전에 다다랐다”라는 주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우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같이 부드러운 심정으로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주님의 마음을 주시옵소서”하고 기원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영으로 우리들 사이에 임재하시어 환희에 찬 하늘나라 잔치를 재연해 주시라고 기원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유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니 공궤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빵을, 병든 자에게는 건강을, 천대받는 자에게는 존경을, 외로운 자에게는 심방을, 진리를 갈구하는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 줌으로 죽은 것 같았던 생명들이 파릇파릇 피어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삭개오가 우뚝 일어서서, 있는 것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4 배나 갚겠다고 하는 것을 보시면서 만면의 웃음을 지으시는 예수님의 기쁨.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와 두레박도 다 버리고 동리 사람들에게 그녀가 찾은 새로운 삶의 길을 전하려고 달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하신 예수님의 삶의 비결을 우리는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한데 불러 모으시고 같이 사랑의 애찬을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시면서 하나님에게 감사 찬송을 올리는 저들은 저들을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느끼면서 참된 삶의 평화와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런 감격스런 삶을 사는 저들은 산 위의 성처럼, 등경 위의 등불처럼 빛을 발해서 새 내일을 갈망하는 자들이 그들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악의 세력은 날로 물러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나무처럼, 누룩처럼 확산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곳입니다. 이런 기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강대국의 횡포에 쩔쩔매는 국가와 개인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 명예로운 자리에 앉고서도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의 창자가 터지는 현상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그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소소한 이익을 취하려고 장사진을 친다는 이야기를 보고 듣지 않습니까?

 

이런 험악한 세상의 저 한 구석에서 갈릴리에 살던 농민들처럼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모두 새 내일, 새 삶을 위해 목숨을 걸고 희망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던 방식의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면 하나님 나라의 기적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교리를 통한 교회권력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인들은 그 제도 권력이 던져주던 알량한 교리의 열매를 걷어차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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