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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를 극진하게 모셔야 하는 시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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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극진하게 모셔야 하는 시대

골3:21

 

1959년에서 1971년까지는 해마다 1백 만 명의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357,700명만 태어났습니다. 이러다보니 전국의 17개면에서는 아이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고, 이런 상태로 마을이 유지되면 2050년이 되면 한 사람도 없는, ‘인구 소멸 예상지역’이 17개 시군이라고 합니다. 출생률이 이러니 당연히 고령인구와 영유아의 비율은 고령인구가 많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고령인구는 707만 6000명이고, 영유아 인구는 675만 1000명입니다. 2040년이 되면 고령인구는 전체인구의 32.8%가 되고 출생률은 10%를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날 노인 문제가 크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린아이의 출생과 양육 그리고 교육에 대한 문제가 노인 문제에 우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곧 지하철에 경로석이 없어지고 ‘어린이석’이 생길지 모릅니다. 이는 어린이가 어른을 공경하는 시대가 아니라 어른이 어린이를 극진히 모셔야 하는 시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어린이를 어떻게 극진하게 모셔야 할까요?


우선 어른들은 어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책임의식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대목을 나름대로 해석해 이 생각과 연결시키려 합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첫째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27-28, 1:31-2:3)

 

이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였고, 하나님은 그 다음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지요. 이 이야기가 구축하는 세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 맞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곧, 비록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일한 것도 없이 우선 안식일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겠죠? 달리 말해 인간은 먼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한 흥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간 존재의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각 사람과 세대의 경험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가 하면, 새로이 태어난 세대는(어린이들은)안식일을 먼저 경험해야 하며,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이 안식일이 하나님이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로써 체험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과거 어른들이 ’일하고 쉬는 삶‘의 관성을 뒤집어서 ’쉰 다음에 일‘하게 함으로 노엽지 않은 인생으로의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두 번 째 제안으로는,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에게 때로 어른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게 (어떤 때에는 사실 어른보다 월등하게)현실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전반적으로 어른보다 미숙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정밀한 분석력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더 많이 살고 공부한 어른의 판단이 더 믿을 만하겠지만, 어떤 현상의 선악정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 같이 근본적인 가치 판단을 제대로 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어른이거나 경험이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더 현명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성서에는 나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견해가 실려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구절을 보세요

.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 98-10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 6-9)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 1936-2005)이 쓴 책 <잘 가지 않는 길을 더 따라가서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에는 저자가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백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교회는 우리 집에서 몇 블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는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그의 일요일 설교는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열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쉽게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처음 갔던 교회 목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저명한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버트릭(George Butrrick)이었고, 열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그가 거룩한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간파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다섯 살 된 내 빈약한 머리는 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 당시 가장 유명한 기독교 목사가 있었지만, 내가 열다섯 살 때 판단하는 한, 영적인 성장 면에서 나는 이미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기독교 교회에 분명 나보다 여러 광년 앞선 또 다른 목사가 있었다.

 

이 글에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밖에 안 된 아이의 내적 능력은 적어도 두 차원에서 어른들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아이와 당대 가장 유명한 목사의 영적 수준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암시적으로 목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 면에서 이 소년과 기독교인 어른들이 대비되죠. (이 어른들이 소년 스캇만큼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가짜 목사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어른을 능가하는 소년의 영적 수준과 판단력은 그가 이전에 기독교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열다섯 살 난 스캇은 과연 열다섯 살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어린 소년은 알고 보면 사춘기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대망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내용과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 50대 후반에 이 글을 쓰는 스캇 펙은 40여 년 전 자신의 판단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신뢰할만한 어른으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중학생이 많은 어른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소년 스캇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철함이 있었던 것이죠.

 

고전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조지훈이 열여덟 살 때 쓴 작품입니다. 요즘 학제에 따라 말하자면 고등학생이 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미성년자가 썼다고 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언도, 그리고 어떤 분야의 어떤 발언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미성년이라고 투표권을 주지 않는 우리 정치사회제도도 그런 의미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제도입니다. 어린이라 하더라도 그 말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등학생의 표현이라도 말이 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 째로, 중고등학생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이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문제를 다루지만 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권면의 말씀에 담긴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세대에게 어른의 언행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의감, 선악판단 능력, 공정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더불어 이 말씀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언행에 노여워할 때 이에 귀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이 한 살 차이에도 의미를 두는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자격 없이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특히 미성년자들의 생각과 느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어린 사람들)은 분명 미숙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숙한 건 아직 새로워서이며, 이 새로움은 우리 안에서 잠든 생명력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이렇게 말하죠.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영혼이 치유된다.”

 

그리고 신약성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말씀과 비슷한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면 “낙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낙심은 무거운 마음이요, 낙심한 마음은 안식하는 마음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분별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먼저 안식일을 누리도록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낙심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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