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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받으셨어요?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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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받으셨어요?

행1:8, 2:6-8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해서, 설교제목을 ‘성령 받으셨어요?’라고 정했습니다. 성령 혹은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여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죠. 하지만, 영성이라는 신학적 언어의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고대 사막의 교부들, 중세 수도원 전통, 종교개혁의 전통 속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그 현상 자체는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성이라는 말의 유행은 20세기말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적 언어의 발굴이 시급했던 요청 속에서 파생된 부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한국 신학계에서 영성 신드롬의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 책이 하비콕스가 썼던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 책을 읽고 독서보고서를 썼던 것 같은데, 지금 그 책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책의 원제목입니다. 그 책의 한국말 제목은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근사한 제목인데 반해, 그 책의 원제목은 Fire From Heaven이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연관이 있는 책 제목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나, 영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주석학적인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임재와 연관시켜 ‘사회적 영성’이라는 부분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은 누구든 한두 번씩은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 답변에 대한 tip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8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말씀하셨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예전부터 부여하여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잖아요. 그 유언을 우리는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유언처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크리스챤들에게 대표적으로 잘 못 알려진, 진리를 호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통상 한국교회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강조되는 단어가 뭘까요? ‘성령’과 ‘증인’, 그리고 ‘땅 끝’일 것입니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땅 끝’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평신도를 장악하려는 교회권력자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면 이렇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성령을 잘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되면 이 말씀은 교인들을 정죄하고 교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오늘 본문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on you, you sha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 of the earth.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는데, 어디서?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끝에서 나의 증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이 중요한가요? 유다와 사마리아가 중요한가요? 땅 끝이 중요한가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은 등위접속사 ’and’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등위접속사(예: and, but, or, nor, so등등)의 성격이 뭐죠? 등위접속사로 연결된 대상들은 성, 수, 격이 똑같아야 됩니다. 똑같은 의미와 같은 중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했을 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 사이 관계 설정에 있어 셋 중 어느 하나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 공히 같은 비중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경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과 이 공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굳이 땅 끝까지 가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지금 폭염에 휩싸인 팔레스틴땅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아프리카에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가 성령을 받았다면 마땅히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땅 끝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히스테리적인 경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깃발을 꽂아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땅 끝을 찍고 와야 뿌듯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말입니다. 안으로는 곯아터지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땅 끝을 향해 가려고만 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주변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땅 끝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본문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현상학’, 뭐 그런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유명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한 성령강림에 대한 기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2:2)이 내려온 이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2:3)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언의 은사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것은 그 다음구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2장 6절-7절).

 

이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587년에 망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60-70년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느헤미아 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죠. 하지만, 그때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연상하면 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 일본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흩어졌던 조선백성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부터 500년 이상 흐른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오백년이면 세대로 따져도 15세대 이상이 흐른 다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7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 각지로 흩어져 사는 한민족들이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할린에, 일본에, 만주에, 중국본토에, 러시아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까요?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제들인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할 줄 알았지 한국말 구사는 못하는 경우가 거의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2세대 3세대까지 흘러도 모국어를 잃어버리는데, 바벨론 패망 이후 500년이 넘게, 15세대, 16세대, 17세대 넘게 이방 땅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 역시 흩어져서 지금 거하고 있는 그 땅의 풍토와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채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국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그 세월 속에서 야훼 신앙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바대인, 매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등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사도행전 2:9-11). 우리로 따지면 재일교포 15세, 재미교포 16세, 재중 교포 16세, 재러시아 교포 17세, 재멕시코 교포 15세, 재하와이 교포 16세, 재타슈겐트 교포 15세, 재사할린 교포 15세가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말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겠죠. “내가 만났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분이 말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한국말을 모르죠.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임하니까 내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나라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너무 놀라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저 사람이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난 영어밖에 모르는데, 나는 일본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중국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한국말은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말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What does this mean? 나는 메소보다미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갑바도기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라비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로마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우리가 출신 성분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해서 그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무슨 마술적인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차별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게끔 하는 공동체 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공동체 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종합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방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우리 안에 있는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관계가 깨진 그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끔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성령의 임재’를 둘러싼 해석이었다면, 남아있는 오늘 설교의 과제는 이러한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사회적 영성’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성령은 대부분 개인의 신앙적 경험과 영적 진보에만 적용되어 왔습니다. 사회적 영성이란 이렇게 개인적인 영적범위에서만 경험되고 적용되는 게 아니라 ‘동성애’, ‘여성’, ‘노동자’, ‘세월호 사건’, ‘갑질의 문화’, ‘남북의 하나 됨’ 등등과 같은 사회적 사건과 문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개입하고 간섭하며 작동하는 가를 살피고 해석해서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시대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그것을 사회적 영성으로 해석한다면 단문으로 [다름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의 욕망’에 맞서는 힘이고, 격노와 눈물의 사회, 냉소와 불신의 시대에 힐링 너머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자본주의 욕망의 시녀 노릇을 계속하고 있지만, 21세기 미국 진보신학계의 화두는 신자유주의와 동성애 논란에 대한 신학적 대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이민자들의 나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다름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술과 능력에 있어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신분적, 계급적, 존재론적 차이와 다름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을 적당히 분출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통합의 과정으로 이끌어낼는지에 대해 잘 학습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성차별의 문제, 흑백문제, 이민자 문제 등이 대표적인 이슈였다고 할 수 있고, 근래에는 동성애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행전에 드러난 성령의 임재에 대한 해석을 미국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차이와 다름으로 인해 야기되는 억압과 불평등을 깨는 성서적 근거로, 그리고 현 미국사회의 갈등의 원인인 동성애 논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로 끌어오려는 노력은, 물론 좀 더 예각화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해석학적 작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성령임재 사건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했다고 적혀 있습니까? “What does this mean?”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분명이 사도행전의 성령은 ‘우리’가운데 임재했습니다. 한 개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능력이나 체험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놀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차이와 불평등은 오랜 사회적 역사와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작동되어 왔고, 결코 사회와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모든 차이들 -그것이 성적 차이든, 계급적 차이든, 문화적 차이든, 인종적 차이든 간에-그 차이로 인한 부당한 폭력이 잔존하는 그곳으로, 성령은 임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결코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고,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집단적 경험으로,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 기억으로 전승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이 지니는 방정식 입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 성령 받으셨습니까?” 제가 준비한 설교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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