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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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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역대상 23:24-26이는 다 레위 자손이니 그 종가를 따라 계수함을 입어 이름이 기록되고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십 세 이상 된 족장들이라. 다윗이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레위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것이 없다 한지라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레위자손이 성막의 기구를 메어왔는데 다윗이 공포하기를 이제는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셨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니까 레위자손이 성막과 그 기구를 맬 것이 없다라고 한 이 말이 무슨 뜻인가?

 

- 역대기는 아담 때부터 B.C500년경의 1차 포로귀환 때까지의 자신들의 역사가 곧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선민의 역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길게 제시된 족보와, 통일왕국 시대 최고의 왕이었던 다윗 왕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서를 보면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역사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타락한 북왕국에 대해서는 그 죄로 멸망을 받은 사실 외에는 별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특별히 26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에 항구적으로 거주하게 됨으로 인해 그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성막과 관련되어 레위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막중한 짐에서 풀어짐을 말하고 있다.

 

성전을 짓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말해주는 것인데, 성막과 그 기구를 메는 일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멜 사람은 메고, 들 사람은 들고, 수종들 사람은 수종을 들면서 각자가 다 참여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레위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것이 없다고 하는 이걸 죽 늘어뜨려서 천국까지 봐라. 천국에서는 멜 게 없는 거고, 또한 이 세상에서도 당시로 보면 이제는 성막생활이 아니라서 멜 필요가 없는 것인데, 이걸 지금의 교회로 보면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한 일이라면 누구에게 미룰 것 없이 자원적 소원적으로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자원적 소원적이라면 짐으로 여겨지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성도라면 누구나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면에서건 짐을 메는 건데,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드린바가 된 삶을 산다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짐이 아닌 자원적으로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해 나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한다.

 

33:6-7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고, 깊은 물을 곳간에 둔다고 했는데, 말 그대로 보면 꼭 물을 어느 한 곳에 모았다가 퍼붓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을 좋은 뜻으로 보면 한없이 주고 싶은 축복을 의미하는 거고, 나쁜 뜻으로 보면 심판을 의미한다.

 

물론 하늘에서 비가 많이 와서 저수지의 둑이 터지면 마치 물을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보내는 것과 같다. 또는 해저에서 지진이나 화산이 폭발하면 바닷물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노아홍수 때는 40일 동안 하늘에서 비가 왔고, 땅에서도 물을 터쳤다. 이걸 보면 물들이 땅의 어느 한 곳에 모여 있다가 터져 나온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장마 때 내리는 물의 양이 엄청난 건데, 이걸 비로 나눠서 내리지 않고 물 덩어리 채로 한꺼번에 땅에 내린다면 땅에 살아남을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많은 비로 인해 피해가 날지라도 비로 나눠서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당히 봐주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장마 때 비가 아닌 얼음으로 만들어서 한꺼번에 쏟아버리면 이게 핵에 비하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느냐?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깨닫고 구원을 이뤄가는 것이 지혜로운 거다.

 

본문.

 

41-614.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자기의 불행을 남 탓으로 덮어씌운다. 그 결과로 저주 받고 생명권 밖으로 쫓겨났다. 가인 역시도 그렇게 되었는데, 가인은 하나님께 바친 제물 이전에 그의 예배태도에서부터 그 마음이 보이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자꾸 제물을 염두에 두고 그 이유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만일 두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인데 아벨은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드리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제물을 보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겠느냐? 안 받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드리는 제물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제물로 표현해 내는 게 제사다. ‘제물이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마음을 말하는 거다. 큰 아들의 마음이 그 모양이니,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배태도가 그 모양이니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거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한 그 마음에 시험이 들어서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미움이 들어간 거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믿음 있는 동생을 광야에서 죽였고, 411-12절을 보면 가인이 자기가 동생을 죽인 것을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가인에게 저주를 내렸다.

4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고 했는데, 이때는 가인이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이다. 그러니까 동생을 죽였다. 안 죽였다하는 행동 이전에 가인은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게 선이다. 이게 되지 않으면 행동적으로 아무리 선행을 할지라도 언제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지금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과 먼 상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중심을 보신다. 사람의 마음중심의 신앙양심이 하나님께로 되어있어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갈망성이 있다면 이게 선이다. 이게 아니라 교회에 오기 위해 집에서 나올 때부터 마음이 급하고 예배시간에도 마음이 딴 데 가서 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 앞에 선한 게 아니라 악한 거다. 그러니까 선하다. 악하다하는 것은 행동 이전에 그 마음의 양심에서 비롯되는 거다. 행동으로 말을 하게 되면 기준이 틀리게 되고, 안 믿는 사람들 중에는 행동적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좋은 행동도 있으니 이럴 경우 그것을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걸 받으시는 거냐? 그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이 문자 글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지만 마음의 질은 하나님 앞에서 이질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 건데 이들은 그 마음이 세상 앞에 가 있다. 이방나라 로마에, 즉 세상기준에 맞춰져 있다. 이게 악한 거고, 교회에서 이런 정신으로 가르치면 이건 독극물을 주는 거다. 이게 에덴동산에서의 마귀의 수법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악한 종들, 거짓 종들, 이단자들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 수법을 쓴다. 이들의 마음은 세상에 붙어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예수 믿어라라고 하면서 성경구절을 이용한다.

 

이질적인 가르침에서는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해도 뜻이 안 나온다. 이들은 늘 눈으로 자극이 되는 축복을 강조한다. 이게 악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도 이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을 닮지 못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다. ‘영광이라고 할 때 인간이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닌데 나에게 하늘의 것으로 축복이 주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될 때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간단히 말해서 네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거다. 그러면 누가 드나드는 문에 죄가 엎드린다는 거냐? 가인이다. 나에게 적용시켜 보면 가인 같은 내가 드나드는 문에 죄가 엎드러져 있다는 거다. 왜냐? 강아지가 주인이 나타나면 얼른 따라가듯이 나를 따라오려고.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가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태도부터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느 때고 죄가 그 사람을 따라붙을 수 있는 거고, 죄를 짓게 되는 기회가 열려있다는 거다. 가인이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어떤 언행심사를 하던 죄행으로 나오게 되는 거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이 말이 동생을 죽이기 전에 나온 거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죄가 너를 붙들고 죄행으로 가기를 원하니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이 말이다. 그러면 죄인이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거냐? 없다. 의인이라야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는 게 죄가 사람에게 들어와서 그 사람을 붙잡고 죄를 짓도록 움직인 건지, 아니면 내가 죄를 붙잡고 죄를 지은 건지? 자기가 죄를 붙잡고 죄를 지은 거다.

 

48-12: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저주가 내려졌다. 사람을 죽이니 저주를 받았다. 가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후에는 어디에 가서 농사를 지어도 밭에 소출이 없다. 저주를 받아놓으니 농사가 안 된다. 그러니까 땅이 가인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았다. 동생을 죽인 후에는 마음이 붕 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 모양인데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겠느냐?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유리한다는 것은 마음에 의해 사람이 돌아다니는 거다.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이 정착이 안 된다. 그래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마음이 붕 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돌아간 질이기 때문에 뭐 하나라도 잘 되고 반듯한 게 있겠느냐? 모든 언행심사의 삶이 축복받을 게 아무 것도 없다. 결과에 가서는 죄 짓고, 사람 죽이고 하다가 자기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마음이 정착이 안 된 사람은 물질로 그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런 걸로 한이 차겠느냐? 안 되는 거다.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자동차를 사서 타고 다니면 자기 마음이 정착이 되겠느냐? 차를 샀으면 새로 나온 다른 차도 굴려보고 싶고, 더 좋은 차를 타면 어디로든 돌아다니고 싶어진다. 사람의 욕심은 무저갱과 같아서 세상에는 그 마음을 만족하게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자기의 마음에 세상 것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런 마음에서 탈출을 해야 만이 자기의 행복이 있는 거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 거냐?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절대로 못 붙잡는다. 그 사람이 죽어 없어지기 전에는 못 붙잡는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붙잡으면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붙든다. 이러면 사람이 정화가 된다. 사람은 어떤 성격이나, 성질이나, 어떤 가르침이던, 어떤 소원 목적이던 그 안에서 맴도는 것뿐이지 스스로는 절대로 못 빠져나온다. 오직 진리라야 그런 데서 빠져나올 수 있다. 답을 세상에서, 어떤 물질에서, 어떤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414-15;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에 가인 스스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코자 당할까봐 무서워하고 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스스로 두렵고 무서워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스스로 자기가 죽임을 당할까봐 그러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게 표를 주셨다고 했는데, 이 표를 어디에 준 거냐? 표는 인정을 해 주겠다는 표식이다. 짐승의 표는 손이나 이마에 주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마에 인을 찍는다고 했다. 인은 도장인데, 이 역시 일종의 표로서 사람에게 도장을 찍는 것은 너는 내 꺼다이 말이다. 그러니까 짐승이 인을 치는 것은 짐승을 위해 일을 잘 하니 짐승의 인정이 들어간 거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치는 것은 네 사상이 옳으니 너는 내 꺼다하고 당신의 소유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다.

 

그러면 짐승이 인을 쳐서 너는 내 꺼다라고 할 때 왜 자기의 소유로 삼는 거냐? 일을 시켜먹고 부려먹는 인정이다. 그러니까 마귀가 사람을 자꾸 크게 높게 부려먹으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자꾸 직책을 준다. 세상은 이런 거다. 그러면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어디에 표를 준 거냐? 얼굴에 표를 준 거냐? 얼굴에 표를 준다면 가령 머리에 뿔이 나게 한다든지, 얼굴에 남다른 자국을 준다든지 이런 거냐? 어찌되었던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보고 저 놈은 동생을 죽인 놈이니 죽여 버리자라고 하지 못하게 하는 표가 분명한데, 그렇다면 가인의 얼굴의 표를 보고 가인이 도망을 가겠느냐, 가인의 표를 보는 사람이 도망을 가겠느냐? 다른 사람이 도망을 간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 자기가 도망을 다닐 필요가 없는 건데 성경에 보면 가인 자기가 도망을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 가인이 도망을 다니는 이유가 안 맞아 죽으려는 거냐?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가인이 죄를 짓고 마음이 안착이 안 되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가인이 늘 돌아다니기 때문에 설령 어느 누가 이 가인을 기다렸다가 죽이려고 해도 가인이 다시 돌아오지를 않아서 죽이지 못하는 거냐? 그리고 또 가인이 어디에 있더라해서 가서 죽이려고 하면 하루 사이에 또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려서 죽이지 못하는 이런 식이냐?

 

농사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죽일 겁니다. 내 벌이 너무 중합니다. 늘 유리방황할 거다.’ 이게 뭐냐? 가인이 죄를 지어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데도 가인 스스로 마음이 안착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면 죽일 것 같고 해서 이리저리 도망을 다닐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가인이 동생을 죽였으니까 그 소문이 돌 것이고, 누군가가 이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칠 배나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이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 배나 되는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 있겠느냐? 아울러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내리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마음 속에 계시적으로 뭔가가 느끼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를 주신 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표로 생각하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 믿는 사람들이 가룟유다를 보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나느냐, 안 나느냐? 가룟유다가 미우냐, 사랑하고 싶으냐? 기독교인들이 저 놈이 예수를 팔아먹은 놈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은 곧 가룟유다는 지옥에 갔다. 불택자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룟유다를 말로 죽이는 행동이다.

 

가인 당시의 사람들이 가인을 보면서 저 놈은 동생을 죽인 놈이다라고 하며 저주하고 죽이게 되면 벌을 칠 배나 받게 되는데, 이 사건을 보는 지금의 우리가 가인 당시의 사람들처럼 가인을 죽일 놈이라고 한다거나 가룟유다에게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이는 곧 자기 속에는 가인이나 가룟유다와 같은 죄악 된 정신이 없다는 말이 되며, 또한 영적으로 이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자신도 가인이나 가룟유다와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가인이 죄인이라거나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하게 되면 자기도 벌을 칠 배나 더 받게 되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 되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을 볼 때 신약에 간음하던 여인을 예수님 앞에 잡아온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땅에 글씨를 쓰시고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는데, 이 말을 듣고 무리들이 다 도망을 갔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르게 말하면 너에게 의인의 표가 있느냐? 그렇다면 이 여인을 돌로 쳐라이 말이다. 그러니 여자를 정죄하는 자신들도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굴 치겠느냐? 그런 것처럼 가인이 비록 동생을 죽인 죄인이지만 이 가인을 보면서 자기를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은 가인을 죽일 수 없는 거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인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기 보다는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게 된다. 이런 면에서 가인을 보는 사람들 마음의 그 생각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되는 거다.

 

그런데 무조건 가인과 가룟유다를 정죄하고 죽이려 하는 현상들이 지금 말세교회의 실정인데, 이것은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신 말씀에 해당이 되는 거다. 너는 못 보고 가인만 보는구나. 가룟유다만 보는구나. 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고 있구나이렇게 되는 거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그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는 그런 벌 받을 성분은 없는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는데, 왜 가인이 회개가 없을까? 누구든지 동생을 죽인 가인을 보면 저 놈은 동생을 죽인 나쁜 놈이다라고 하며 죽이려고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를 주셨으니까 이건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가인이 하나님의 이 긍휼을 깨달았다면 회개를 했을 텐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러면 동생을 죽인 가인이 회개를 할 수 있는 거냐? 안 된다. 왜냐? 하나님 앞에서 예배태도(제물을 드리는 마음)가 벌써 회개가 안 되게 놓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생을 죽여 놓고도 회개가 없는 이 마음은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세계에서 영적인 면에 진리를 붙잡고 정착이 된 것 같으냐, 아니면 아직도 과거에 예수 믿는 것과 같은 정신이 그대로 들어 있느냐? 우리는 내일 자기가 어찌할 것을 지금 현재에 짐작이 간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결심은 분명해야 한다. 오늘도 바로 못 사는 주제에 내일까지 생각하면 무슨 답이 나오겠느냐?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이 떠돌다가 한 곳에 정착이 됐는데, 이 땅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집을 지으면 자기 이름을 딴다든지, 성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가인이 아들을 낳으니 이제 마음이 정착이 되어서 그곳에 살게 된 것인지? 아들이 있는데 더 이상 어디로 떠돌겠느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게 없느냐? 회개를 안 한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며 자기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했듯이 회개를 안 한 사람은 그 목적이 늘 세상에 가 있는 거다.

 

4장에서 가인이 동생을 죽인 게 나온 다음에 가인의 계보가 나왔고, 5장 첫 머리에 아담자손의 계보가 나오고, 그 다음에 6절에서 셋의 계보가 좀 나오는데, 다른 계보의 사람들은 언제까지 향수하고 죽었다는 게 나오는데 가인의 계보에는 그냥 낳고 낳고한 것만 기록이 되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 자식을 낳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가인의 족보에는 언제 죽었다는 말은 없이 낳고만 있는 거냐?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일반적으로 볼 때 세상을 아무렇게나 산 사람을 기념할 게 있느냐? 그냥 살다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원이 없이 죽는 거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자녀를 낳아도 별 볼일 없는 거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자녀를 낳고 돈을 많이 벌고 살다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건 없다. 그러나 성경에 몇 살까지 향수하고 죽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원에 관계가 된 삶이었구나. 그러니까 셋의 후손들은 어디서 죽고 자식이 몇 명이더라라고 기록해 놓은 것은 이룰구원의 사람을 보여주는 거다.

 

그런데 532절에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고 했고, 6장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가인의 후손들도 자녀를 낳으면서 많이 번성이 된 거다. 그리고 4:26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아담 하와의 후손이 이쪽저쪽에서 많이 나온 거다.

 

61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라고 한 것과,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한 것과,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고 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이 때 노아의 세 아들도 장가를 갔는데 이것과,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것과,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게 뭐냐?

 

우리가 시집 장가갈 때 자기 눈에 드는 대로 간다. 그런데 자기가 사람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눈을 가졌느냐?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한 후에 지지고 볶고 하는 거다. 노아가 세 아들을 장가를 보낸 후에 방주를 지었다. 그러니까 세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은 무슨 뜻으로? 방주를 지을 목적으로 장가를 간 거고, 며느리들도 방주를 지을 목적으로 시집을 온 거다. 우리가 이걸 생각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오늘 테레비에 보니까 요즘은 어린아이부터 외국에 나가 춤을 춰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하면서 이 바람이 학교에까지 불어서 젊은 애들이 떼거지로 그 길로 간다고 한다. 이건 하나님 앞에 사람의 인격성은 도무지 안 보이고 완전히 노는 쪽으로 달려가는 거다. 이건 아무리 봐도 소돔 고모라다. 그리고 어느 시에서는 유명한 배우들의 동상을 세워서 그걸 보러 오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벌었는데, 그 배우가 갈라서게 되어서 앞일이 걱정이라고 한다. 세상이 맨 이런 식이니 앞으로 미래적으로 어찌 될까? 인생이 태어났다면 하나님 앞에 이 땅에 살다 간 뭔가가 있어야 하겠는데 이게 없으면 어찌 될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는데, 사람의 육신의 눈은 보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여자를 볼 때 그 여자의 어느 한 면이 예쁘게 보이면 다른 것은 보지를 못한다. 야곱의 경우에도 라헬의 무엇에 홀린 거냐? 눈만 봤나? 뭐가 좋아서 택한 걸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놓은 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안 믿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택했다는 거다. 이걸 영적인 면으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이 사람의 딸들을,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거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물질세계, 건물, 차 등등 눈에 보여지고 손에 만져지고 감각할 수 있는 세상 것 전부를 말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일가친척과 주변 사람들을 모아놓고 결혼을 한 후에 뭐가 달라서 헤어진다고? 성격차이? 이걸 잘 생각해 봐라. 사람마다 성격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사람마다 다 성격차이가 있는 건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계속 같이 살 부부가 어디 있겠느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서로가 주 안에서 고쳐야 한다. 사람을 볼 때 외모가 아닌 마음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게 하나님 앞에 바른 눈이다. 구약의 에스더와 와스디를 비교해 보고, 또 룻과 오르바를 비교해 봐라.

 

세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돌리신다. 세상과 세상의 것은 전부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면에 이용물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사람과 만물을 보고 구원도리와 이치를 깨달아 나가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용물로 믿지 말아라. 불신자들의 미끼로 믿지 말아라.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대로 자기에게 들어있다.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육체라고 하는 것은 몸을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육체가 물질로 살 듯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사상과 정신이, 신앙의 소원 목적이 육 위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120년 동안 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죽는다는 말이냐? 설령 120년을 살고 심판을 안 받고 죽더라도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으로 살았다면 그 사상은 심판에 해당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들의 날이 120년이라고 하는 게 그 때 당시로 몇 년이던 살고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120년을 더 산다는 말인지, 아니면 당시 새로 출생한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한 말인지? 둘 다 해당이 안 되고,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것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6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은 장군을 말한다. 그리고 그 때 사람들은 덩치가 컸던 모양이다. 용사라는 것은 힘 있고 강하고 우람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식들이 믿지 않는 여자를 취하고 세상정신을 가지고 사니 그 사이에서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식이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걸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을 가지고 사니 그 가정이 풍요로워지고 세상의 지위도 올라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정신을 버리고 가인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니 세상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었는데, 계시록의 사상으로 말하면 이게 바로 666이다. 인본주의 정신인 666으로는 아무리 크고 높이 올라가도 하나님의 절대수인 7로는 절대로 못 올라가는 거다.

가인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믿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런 신앙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점점 여호와 하나님 쪽으로 들어오겠느냐, 아예 이방인처럼 돼버리겠느냐? 이방인처럼 돼버린다. 우리가 이걸 잘 봐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날이 갈수록 자꾸 주님 품 안으로 들어와야지 나가는 쪽으로 되어있다면 이건 나중에 틀림없이 불신자처럼 돼버린다. 이게 가인의 사상이요 계시록의 정신으로 보면 바다의 짐승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을 취했듯이 예수를 믿으면서 이방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취하게 되면 세상의 존귀영광을 얻게 되고 세상 사람들의 물망에 오르게 되는데, 이건 이방사회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권을 주는 거다. 그러니까 계:에 보면 땅의 짐승이 바다의 짐승 앞에서 권한행사를 하는데 이걸 이방사람들이 보고 잘한다고 칭송을 한다. 이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교회를 막 쓸어 넘기니까 이방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교회를 보면 이런 식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마지막 때는 노아홍수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 때와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된 거다.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한 마디로 사람들이 구별 분별이 없이 산다는 것이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온통 세상화로 됐다는 거다.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음에 근심한다는 게 뭐냐? 첫째는 하나님도 인격자시라는 걸 말하고, 또 하나는 믿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이 근심을 하시는구나. 기뻐하시는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려는 거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훌륭하기를 바라며 교육을 시켰는데 그렇지 않을 때 마음이 얼마나 무너질까? 이럴 때 사람이 팍팍 늙는다. 이런 일로 부모의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을 자식이 볼 때 좋은 뜻이던 나쁜 뜻이던 나 때문에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 하는 깨달음의 마음이 들어가는 거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것을 보고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리고 6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을 이 땅에서 쓸어버린다고 했고, 8절에서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면서, 9절 이후로는 노아의 사적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로 12,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라고 하셨다.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고 하시면서 14절 이후로는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했다.

 

잣나무는 물을 잘 안 타고 강한 특성이 있는데, 이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한 것은 비유적으로 우리의 신앙 믿음도 썩어지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제일 강한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재료로 지어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거다.

 

세상 마지막 때 세상을 불로 사른다고 했는데, 무슨 불로 사를 것 같으냐? 핵폭탄으로? 북한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다는데 핵폭탄이 먼저 터질 런지, 백두산의 용암이 먼저 터질 런지? 이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건데 문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왔듯이 우리가 핵폭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정신을 가지는 거다

 

예수님은 핵폭탄이 터져도 살 수 있는 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신앙을 가지면 불같은 세상의 시련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게 된다. 예수님 당신이 핵폭탄에 끄떡없으시다면 당신 속에 들어있는 우리도 타서 죽지 않는 거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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