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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8> 강사로 온 손양원 목사, 1주일 뒤 두 아들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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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교는 1948년 9월 새 학기를 맞았다. 학생회 총무였던 나는 학내 부흥회 강사 선정 업무를 맡았다. 박형용 박사와 협의해 여수군 신풍면에서 한센인을 돌보는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를 초빙키로 했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손 목사를 만났다.

그는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지만 차돌처럼 굳고 야무지며 단호한 성품이었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았다. 돈이 없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하는 일제하의 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학내 부흥회는 은혜의 도가니였다. 손 목사의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예언자적 메시지였다. 갈라진 듯하면서도 귀를 찢는 날카로운 음성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 축복의 시간이 끝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여순사건이 발생,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좌익 학생에게 생명을 빼앗겼다. 나는 이 엄청난 비극에 정신을 잃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자기 민족과 동료의 피를 땅에 쏟게 하는 이 광란의 땅이 저주스러웠다. 한민족이 두 나라가 된 것도 슬픈데 항일 민족 기독 지도자의 어린 아들들이 왜 이 같은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답답하고 원통했다.

신학교 학우들은 여수 순천의 피바다를 생각하며 통곡의 기도회를 가졌다. 나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시내는 계엄군으로 가득했다. 나덕환 목사가 시무하는 승주교회를 찾았다. 나 목사에게 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최후 이야기를 통해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두 아들을 인민재판한 사람들은 10대 고등학생들이었다. 민주학련 간부들인 이들은 동인과 동신의 학우들이기도 했다.

“너 예수 믿는 놈이지?” “예, 예수교인입니다.”

“어미 아비도 예수쟁이지?” “예, 아버지는 목사이십니다.”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놈들의 죄를 변호할 자가 있나?”

민주학련 간부들은 동인 동신의 죄를 열거했다. 동신과 동인은 서로 끌어안았다. 한 학생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여러 차례 총소리가 귀를 찢었다. 동인과 동신의 시체는 다른 시체 무더기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나 목사는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예?”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토벌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계엄군이 질서를 잡으면서 반란 무리를 색출해 현장에서 즉결 처분을 하고 있었다. 나 목사는 이 와중에 애매하게 체포된 교인들이 처형되는 것을 막으려고 나가던 길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는 “손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그 학생의 처형을 막아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나 목사는 그 학생 이름이 재선이라고 했다. 재선은 풀려났고 손 목사는 그를 만났다고 한다.

“재선아 안심해라. 나는 너를 용서한 지 오래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을 믿어라.”

재선 아버지는 통곡했고 자신은 아들이 넷 있으니 둘을 데려가 키워 달라고 애원했다. 손 목사가 만류하자 재선 아버지는 재선이라도 길러 아들 삼아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재선은 손 목사의 아들이 된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곧장 손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약속했다.

“목사님, 저는 내년에 졸업입니다. 졸업 후 이리 오겠습니다.”

손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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