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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5> 기독교인 숙청 피해 北 떠나 아버지 계시는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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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는 미완의 해방이었다. 전쟁에 졌어도 독일처럼 두 동강 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일본 군벌은 조선 반도를 소련과 미국이 갈라먹도록 공작했다. 나라는 망했어도 국가를 분단 없이 유지해 주는 혜택을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얻어냈다. 그사이 미 군정 장관에 임명된 아널드 소장은 패전국 일본의 조선총독부 건의서를 그대로 받아들여 미 군정청을 조선총독부 연장선상에서 운영하기로 했다. 친일 주구(走狗)들을 중심으로 미 군정을 구성한 것이다.

어깨에 힘이 실린 총독부 관리들은 다시 조선인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고 패망한 자국민 보호를 위해 온갖 간계와 흉모를 일삼았다. 그들은 조선인들 사이의 정치운동을 방해하는 술책을 꾸몄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국내 정치세력과 미국 측 이승만의 분열조작을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며 공작했다. 그러면서 반민족 친일 세력의 후견 조직을 형성했다. 일제는 우리 땅을 떠났지만 군과 경찰, 관료와 정당들 속에 우익이라는 미명하에 친일세력 둥지를 트는 데 성공했다.

나는 1946년 2월 서울로 남하하기 이전까지 해방 후 북녘에서 일어난 혼란상을 목도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녘땅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미군과 달리 일제 침략 세력을 뿌리부터 뽑아버렸다. 소련군은 자신들을 ‘해방군’이라고 했다. 남쪽 미군은 그들을 ‘점령군’이라 했다. 이런 사소한 것 같은 미·소 군대의 정책 차이는 이후 남과 북의 사회변동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나 북녘에서의 공산주의 정치세력 역시 분열과 대결을 일삼은 것은 남한 정치 분열상과 다를 바 없었다. 현준혁 중심의 국내파 공산당과 조선 의용군 세력인 연안파, 소련군을 따라온 고려인 2세 중심의 소련파, 김일성 장군의 항일 유격대 중심의 갑산파 등으로 나뉘어 암투를 벌였다.

철저하게 친일파가 제거된 북녘에서도 두 개의 세력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지주·인텔리라는 우익세력이었다. 이들은 해방된 지 두 달도 안 돼 북녘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나는 지주가 아니었지만 이름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자 철저한 기독교인이어서 숙청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작은 마을 피현에서도 날마다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나는 학년 말인 2월 학교 선생직을 끝내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목사 후보생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때였다. 물론 평양신학교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새해가 되자 신의주 제2교회 목사이자 의산노회장이었던 김관주 목사는 “서울로 가서 조선신학교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상하게 들렸지만 아버지께서 이미 가 계시는 서울로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1946년 2월 15일 의주군의 학교를 떠나 평양행 기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남쪽에서는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미 군정청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앞잡이나 영어 가능한 미국 유학 목사들, 기독교인들에게 의지했다. 상당수 목회자들이 미 군정 고문과 처장, 국장, 도지사로 등용됐다. 아버지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족 교회 재건과 나라의 통일은 생각하지 않고 미 군정 일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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