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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을 향한 도전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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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가복음 11장 15절~19절

설교제목 : 구원을 향한 도전

 

【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 안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갔다.(마가 11:15~19)】

 

<종교의 상업화에 대한 성찰>


우리네 종교가 이미 오래전부터 상업화되었습니다. 종교의 산업화 혹은 교회의 기업화, 즉 신앙을 매개로 한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비윤리적 행위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목사라는 이가 교회를 개인적 용도로 사고 판다든가 – 여기서 교인수는 매매가를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 직분(집사, 권사, 장로)에 올라갈수록 교회에 내는 반 강제적 헌금액수가 늘어난다든가, 또 교회가 대형화됨에 따라 교회의 높은 직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이권개입을 하게 된다든가 … 등등등 많은 비리들이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 일깨워주신 바는, 그런 교회 산업화의 반대입니다. 신앙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타락이고, 신앙의 위선이며, 하느님 진리에 대한 모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며, 교회가 기업화되는 것에 대해서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통찰>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다른 차원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분노함으로 반대하신 예루살렘 성전 안의 풍경은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합리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스라엘 땅은 물론 인근의 근방 나라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엄청나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돈을 바꿔주는 환전소는 불가피했습니다. 또 당시 이스라엘은 비둘기를 불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 매매상 역시 불가피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바쁘고 분주한 행사진행의 상황상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일 역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상적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일행은 거룩한 분노로서 용감하게 행동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입장은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재네들 왜 저래?” “정말 가만 놔두면 안 되겠구먼.” “왜 멀쩡하게 진행되는 성전행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지!!” … 분명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층들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대심문관 이야기>


이쯤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중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먼 훗날의 시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지만, 그 예수는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러시아의 대심문관이었던 늙은 교회지도자는 지상에 나타난 이가 예수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 재림예수를 쫓아냅니다. 결박된 재림예수를 허름한 지하감옥으로 이송한 늙은 대심문관은 예수를 향해서 일갈합니다. “인류에게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니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당신이 우리에게 제공한 ‘하늘의 메시지’를 거꾸로 변형시켜 놓았다. 더 이상 이 지상에 당신의 진리는 없다.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가 편안하게 변형시켜 놓은 당신의 메시지만 있을 뿐이다. 지상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이 지상에 재림하지 말라.”


대심문관이 재림예수를 비판한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의 메시지는 지상의 인류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심문관이 재림예수를 향해서 쏟아내는 핵심적인 분노의 어록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예수의 유명한 메시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심문관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는 지상의 인류들이 결코 절대로 지켜낼 수 없는 ‘너무 과도한 이상적 세계’만을 읖조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가 뱉어낸 모든 말들은, 지상의 평범한 인류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과도한 이상주의의 어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는 떡으로 충분히 잘 살고 있으며, 너무 어렵고 이상적인 ‘하느님의 말씀’ 따위는 필요 없다는 일갈이었습니다.

 

<예수의 성전 분노에 대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소란을 일으킨 예수 일행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 차원입니다. 예수 일행은 ‘하느님의 말씀’을 높이 치켜 올리며 분노했지만, 일상적으로 보편적으로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떡’이었습니다. ‘빵’이었으며, ‘밥’이었으며, ‘돈’이었으며, 정신이 아닌 물질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은 예나 지금이나 ‘쾌락’ ‘권력’ ‘명예’ ‘재물’ … 뭐 그런 것이어야 했습니다.

 

<설교의 결론>


예수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극도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순도 100%의 완벽한 이상주의자, 그게 예수의 정신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재림예수를 향한 대심문관의 반박문에 대해서 공감하는 바가 있지만 – 사실 크게 공감하지만 -, 그러나 대심문관의 벗이 아닌 예수의 벗이 되려하는 이유는 본질적 구원의 길은 예수의 메시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구원을 향한 도전’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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