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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적인 세계를 향한 불굴의 투지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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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가복음 11장 22절~24절

설교제목 : 신적인 세계를 향한 불굴의 투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벌떡 일어나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가 11:22~24)】

 

<성경대로 믿기의 위험성>


우리 기독교 안팎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는 고전적 풍토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분들이 참 소박한 입장일 수 있고, 또 아주 진솔한 인격일 수도 있어서 이야기하기가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런 순진한 태도(?)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무조건적 믿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그 본래적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어리석은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뭐랄까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행간 읽기’ 혹은 ‘이야기 뒤의 이야기’, 그 진짜 말숨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눈 속의 눈’ ‘귀 속의 귀’ ‘마음 속의 마음’ ‘정신 속의 정신’일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해석하기>


오늘 성경 이야기만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을, 하느님을 무조건 믿기만 하면 “산을 벌떡 돌려들어서 바다에 빠트릴 수 있다”는 식으로, 대개들 읽고 있는데, 글쎄요.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리석은 성경읽기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그렇게 설교해 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마다, 신학대학마다 ‘그런 설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설교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향한 무조건적 믿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그 본래적 영성의 메시지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이야기하신 것일까요? … 그것에 대한 우리의 자답(自答)은 하느님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신적인 세계에 대한 불굴의 투지입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맹종의 믿음이 아니라 신적인 세계(자유, 평화, 구원, 해방, 진리, 정의, 초탈, 해탈, 사랑 등등등)을 향한 굴(屈)하지 않는 투쟁, 그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이야기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대가 진정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 자유의 가치가 품고 있는 거룩한 신성을 깨닫고, 그 깨달은 바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불굴의 투쟁을 하라. 저 산이 마르고 닳아서 바다가 될 때까지, 어떠한 고난과 역경, 슬픔과 좌절이 그대를 공격할지라도, 결코 낙망하지 말고 끝끝내 투쟁하라. 그러면 마침내 저 산이 바다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그대들 앞에 펼쳐질 것이다.】 우리는 이 메시지가 예수의 어록이 깊숙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신적인 세계에 대한 불굴의 투지인 것입니다.

 

<선과 악의 대결>


문명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류가 자주 망각하는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인생은, 삶은, 세상은, 세계는 선(善)과 악(惡)의 전쟁터라는 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최종적 승리는 선(善)의 차지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야말로 최종적인 결과물이고, 그 최후의 심판에 다다르기까지 인류는 “선이냐, 악이냐”를 놓고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삶은 한가한 쉼터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존은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영원히 선과 악의 투쟁, 그 한 가운데 있는 참혹한 전쟁터인 것입니다.


이 무서운 전쟁터에서 하느님의 영성을 호흡하려는 우리는 불가피하게 ‘신적인 세계를 향한 불굴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불굴의 거룩한 전사들 덕분에 세상이 그나마 평화롭게 유지되는 것이며, 그들의 한스러운 피 값으로 악한 세력이 그나마 저 멀리 물러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화의 이야기도 아니며 소설 같은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실존이 처한 분명한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네 삶의 현실은 참혹한 것이며, 비통한 것이며, 무서운 것입니다.

 

<악의 얼굴은 평범하다>


이 즈음에서 악의 평범성을 밝혀준 위대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들은바 대로 말씀드리면, 저자 한나 아렌트는 독일 나치 협력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놀랍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그 당시 독일 사회에 불고 있었던 정치적 흐름에 순응한 죄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악독하거나 모질거나 죄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순응주의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응주의자들의 평범한 악(惡)이 600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의 광풍을 몰아치게 했던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인류는 ‘평범한 악’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아니 좀 다른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 사악한 악의 세력이 평범성으로 위장한채 그들의 악마적 발톱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신적인 세계를 향한 불굴의 투지”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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