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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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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요한복음 21장 8-9절)


< 차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

 성격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면 성격 차이가 오히려 축복의 재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다. 성격이 똑같으면 오히려 재미없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의견과 생각이 다른 것이 당연하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 믿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섬겨줌으로 하나가 되려는 자세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이 달랐다.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은 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즉시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 오십 칸은 약 90미터쯤 된다. 즉 예수님이 계신 곳과 제자들이 탄 배 사이의 거리가 약 90미터 정도인데 그 거리를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다른가? 예수님께 베드로는 즉각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쳐 왔지만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끌고 왔다. 그 장면에서 즉시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의 행동이 주목을 끌지만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다 뛰어내리면 배와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고 배와 잡은 고기를 챙기고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다. 공동체에는 비전을 세우고 힘차게 앞서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고 반면에 뒤를 잘 챙기고 살피며 따라가는 사람도 필요하다.

 자연을 보면 각 사물마다 자기의 색깔이 있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듯이 서로의 차이와 필요를 인정하면 그 공동체는 더욱 복된 공동체가 된다. 자기만 옳지 않다. 남도 그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라. 자녀도 내 맘대로 못하는데 남을 나처럼 어떻게 만드는가? 오히려 내가 남처럼 한번 되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을 뜯어 고치기보다 먼저 나를 뜯어 고치라. 나를 감추고 고쳐가며 다양성 중에 일치를 꿈꾸고 서로 감싸 안을 때 그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가 된다.

< 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

 제자들은 자기 성격과 방식대로 주님께 가까이 왔지만 그 중에 베드로가 가장 먼저 왔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께 반갑게 달려들지 않고 갑자기 주춤했다.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 나머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 똑같은 장면을 보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이 육지에 올라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숯불’이었다.

 제자들은 육지에 올라서서 예수님을 똑바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 잡으러 나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눈을 약간 내리깔고 있는데 그들 눈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숯불’이었다. 그 숯불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큰 감정이 없었겠지만 베드로는 가슴이 덜컹했다. 얼마 전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요 18:18)이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와 모든 상황이 비슷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때도 새벽 시간이었고 본문의 장면이 펼쳐진 때도 새벽 시간이었다.

 그때 숯불을 보면서 베드로는 얼마 전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올랐고 귀에서는 마치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장면과 너무 흡사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베드로가 담대하고 적극적인 사람이라도 양심과 죄책감도 있는데 어떻게 반갑게 먼저 “주님! 그 동안 잘 계셨어요?”하고 말을 걸겠는가?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은 하지 않고 이렇게 숯불을 피워 나를 책망하시는구나!”

 가끔 청중들은 설교에 대해 오해한다. “저 말 나 들으라고 하는구나.” 물론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이려고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한 것이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장면 나 보라고 만드셨구나!” 물론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숯불이란 말은 헬라어로 ‘안드라키아’라고 한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 딱 두 번 나온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와 본문에서다.

 또한 아침 식사 후에 주님은 숯불 앞에서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3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모든 상황이 비슷하기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장면을 만드셨을 수 있지만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죽이려고 그 장면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살리려고 그 장면을 만드셨다. 과거의 실패 현장에 다시 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실패의 현장에 정직하게 설 때 새로운 도약이 가능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실패 앞에서 정직하라. 실패와 연약함을 인정할 때 은혜의 길이 열린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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