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역경의 열매] 이말테 <8> 기장 교회 사역하다 한국에 남고 싶어 선교사로


201805010011_23110923942084_1.jpg
1993년 3월부터 한신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 94년 여름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 본부 해외선교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94년에는 서울 구로동 신명교회 소속 목사가 됐다. 그 교회도 민중교회였다.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안병무 박사님 댁을 몇 차례 방문하며 민중신학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됐다. 96년에는 소속을 가리봉교회로 옮겼다. 이 교회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폭넓은 경험을 했다. 기장이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교단이라 통일과 관련된 발표도 많이 했다.

기장과의 계약은 2000년 끝났다. 기장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아직도 기장 목사와 교수들 중 여러분과 연락하며 교제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기장!”

기장과의 계약 만료 이후 아내와 나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협성대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0년부터 독일 기독교 전국연합회 파송으로 재한독일어권교회 목회자가 됐다. 독일 기독교바이에른주 루터회 선교회인 ‘미션 원 월드’ 파송으로 기독교한국루터회(LCK) 선교사로도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LCK에서 일하는 역사상 첫 독일 선교사가 됐다. LCK는 미국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LCMS)를 통해 생긴 교회다. 그러다 보니 독일 루터교회보다 보수적이다. 하지만 LCK는 LCMS보다 더 개방적이고 에큐메니컬하다. 1958년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들에게 루터교 선교를 시작했던 선교사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나를 2년간 살폈다. 독일 루터교 입장에서 내가 괜찮은지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LCK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힘과 시간을 내가 섬기고 있던 재한독일어권교회를 위해 쓸 수 있었다. 그 열매로써 그 교회가 회복되고 부흥했다고 생각한다.

그 교회는 기장 소속이다. 해마다 경동교회와 한·독 연합예배를 드린다. 성찬식도 나눈다. 교인 수가 많아 교인들이 두 줄로 나와 떡을 포도주에 찍었다. 강원용 목사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목사님은 당신 차례가 되면 떡을 찍는 식으로 하지 않고 큰 그릇을 손으로 잡고 직접 마셨던 것이 기억난다.

경동교회의 건축법을 보며 매우 인상 깊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보면 도성 같은데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밑으로 내려가도록 설계돼 있어 동굴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위에 가로로 큰 뼈 같은 지주(支柱) 혹은 부벽(扶壁) 아치가 보인다. 요나처럼 물고기 배 속에 있는 느낌이 난다. 그래서 기도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긴다. 예배당을 나갈 때는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입구에 십자가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때 문이 열린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부활해 무덤에서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교회를 건축할 때 신학 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이현우 기자 [email protected]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