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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쓰라 (롬 14: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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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쓰라 (롬 14:17~23)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7)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8)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19)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0)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23)
<로마서 14장 17~23절>


송구영신예배 때 감사통을 나눠드리면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를 적은 글과 감사의 예물을 넣자고 했습니다. 
얼마나 채우셨습니까?
지난 주 수요일에 첫 번 째 감사통이 들어왔습니다.
1호입니다. 
지난주일 저녁, 한 청년이 교구 전도사에게 감사통을 내면서 했던 말이,
‘도저히 더 이상 들어가지가 않아서 가져왔다’고 했답니다. 

여러분도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게 뭐 있느냐’고 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 가져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범사에 숨 쉴 수 있는 것조차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사하며 사십시다.”인사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음식으로 … 무너지게 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각각 다르게 태어나서 다르게 살고 
다른 일을 하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이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어떤 이는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데 열정을 다하고 어떤 이는 사업에 열정을 다하고
어떤 이는 봉사 하는 일에 …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다른 우리에게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열정으로 사는 삶의 자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열정을 어디에, 왜 쏟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힘쓰라”는 명령을 찾을 수 있습니다. 힘쓴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 열정을 다해 …
최고의 결과를 얻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꿈을 꿔도 큰 꿈을 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을 해도 큰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합니다. 
큰일을 이뤄내야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산을 옮길 때도 작은 돌 하나부터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심코 지나친 작은 일 하나 때문에 큰 낭패를 보거나 뼈아픈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작은 일부터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작은 일을 소홀히 말라는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 …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 ”(롬 14:19~20)
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하게 경고한 것은
음식 때문에/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망가뜨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강력한 이단이나 박해가 아니라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음식 먹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롬 1:11)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로마 교회에 방문하려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못 갔음을 아쉬워했습니다.(롬 1:13)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롬 1:15) 말할 정도로 
바울은 로마교회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로마교회를 귀히 여긴 바울은 
음식 같은 것 때문에 /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던 것 중 하나가
‘정결’과 ‘부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레위기 11~17장과 
민수기 19장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해서
자신들이 「먹을 음식」과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구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음식에 대해 민감했던 이유는
‘부정한 것을 먹는 것’은 
‘죄 짓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 중에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방 교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아무거나 다 먹었습니다.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먹는 일은 어렵습니다. 

미국 교회 중에 보면 한 교회에 미국인, 한국인, 인도인, 멕시코인 … 등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서로 얼굴을 찌푸릴 때가 음식 먹을 때입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먹어야 하고, 
된장도 끓여 먹어야 하고, 음식 냄새를 풍길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드리는 한국인 교회들이 
간혹 쫓겨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이 자기나라의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International Food Festival’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치와 김을 가지고 갔는데 다른 학생들이 
제게 ‘넌 왜 (검은)종이를 먹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다른 나라 음식 맛을 보는데 
인도사람이 먹는 카레는 냄새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카레는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게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도 쉽지 않고
서로‘왜 저런 음식을 먹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음식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음식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음식을 함께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음식을 안 먹고 있는데
이방인 중에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아무 음식이나 다 먹으니까 
부정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 교인들이 먹는 고기에 대해 정죄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고기를 먹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의 대부분은 우상에게 제사할 때 사용되었던 것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고기도 우상의 제단에 올랐다가 다시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정결한 음식을 가려 먹는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음식에 민감한 유대인 교인들에게
“ …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 14:20) 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방인 교인들을 향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1)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의 관습과 전통 때문에 고기와 포도주 등 음식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유대인 교인들이 거리낌을 느끼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풀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크리스챤은/복 있는 사람은
서는 것, 가는 것, 앉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시1: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고전10:31)
그러므로 우상의 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우상에게 바친 제물 음식은 삼가야 합니다(고전10:14~22).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굳이 묻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10:25)
음식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상의 제물인 표식이 뚜렷하거나 
다른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다’라고 알려 주면
굳이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고전10:27~28)
내가 먹는 음식이 나도 거리끼고 
남도 거리낀다면 즐겨먹던 고기라도 삼가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판단하고도 …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오늘 본문의 핵심은 
무엇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서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 / 자신의 신앙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2장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고 
‘이것이 잘 못 됐다, 저것이 틀렸다’하며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사실 말하는 그 자신도 잘하는 것 없이 남의 말만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중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기도를 마치면 
‘선생님, 기도시간에 ○○○가 눈 떴어요’라고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해서,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데서나/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끼리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보았다고, 안다고, 틀림없다고, 증거가 있다 해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금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칭찬 받을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 9장에(18~27절) 보면
대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는 포도 농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tent)안에서 발가벗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
-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꾸며 얘기한 것도 아니고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함’은 아버지에게 저주 받고 하나님도 그를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함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보았고, 본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것도 남에게 한 것이 아니고 형제들에게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함은 셈과 야벳과 달랐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귀히 여기고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춰 드렸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실을 보았다 해도, 사실이라도 거기에 사랑을 더하지 않으면 그 사실은 밝혔다 해도 칭찬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 것이라도, 들은 것이라도, 아는 것이라도 사랑을 더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 것이 사실이라도 사랑을 더하여 말해야 합니다.
아니, 아예 말하지 마세요. 

겸손한 마음으로 … 남을 낫게 여기고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상대방을 낮게 대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 … ”(빌 2:3) 라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그 상대방을 자신보다 낮게 내려 보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 예배와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 많이 봉사하고 … 많이 드려서 …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선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도 하는 사람은 기도 안하는/못하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자주 금식하는 사람은 금식 못 하는 사람에게 간절함이 없다고 나무랍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봉사 못 하거나 안 하는 사람에게 열심이 없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로마서 14장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 때문에 …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 시험 든 사람은 없을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닐까? …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4~5절 
“ …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4~5) 고 했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이 공의로운 판단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의 잣대로 남을 평가합니다.

로마서 14장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실 분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뿐입니다. 


…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우리가 힘써 열정을 가져야 할 것은 본문 19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예수 믿는 우리가 교회에서 열정으로 힘 써 할 일은‘화평(화목/평화)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상대방을 격려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고 교회 안에서 화평을 이루고 화목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물론 선생님은 제자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옳은 말을 해줘야 합니다.
틀린 것이 있으면 틀렸다고 바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말 듣지 않으면 혼내서라도 옳은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옳은 말을 해준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와 멀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 틀렸다, 저것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면 멀어집니다. ‘내가 널 좋아해서, 아껴서,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하며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너나 잘해라’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목사님을 사랑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라고 말하는데
사랑한다면 말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사랑한다면 밥이나 사주세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 죄인들에게 가셔서 
‘너희들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 아느냐’하며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책망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를 같이하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대하자 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열정으로 해야 할 일은 <화평(화목)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니까 성경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을 뭐라 했습니까?(4~7절)
“오래 참고 … ”부터 시작하여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입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 아내를 … , 부모를 / 자식을 … 대할 때,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격려의 말로 서로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일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입 내밀고, 미워하고, 씹고, 험담하고, 수군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하루하루’는 성경에 표현된 하루가 천년 같고/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귀한 시간/귀한 날입니다(벧후3:8). 칭찬하며 격려하며 덮어주고 용서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루살이는 생명이 지극히 짧은 날벌레입니다. 반드시 하루만 살고 죽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하루나 이틀, 길면 2~3주 정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살이가 태어나는 과정은 의외로 길어 애벌레는 물속에서 1,2년 정도 살아야 비로소 성충이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하루살이는 
입이 퇴화하여 먹이 섭취를 못하고 수분 섭취에 그쳐
애벌레일 때 체내에 저장한 에너지만으로 살다가 끝낸다고 합니다. 
하루살이의 짧은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짝짓기입니다.
필사적으로 짝짓기를 끝내자마자 
수컷은 죽고 암컷은 물속에 알을 낳고 죽습니다.

하루살이의 생애는 평균 수명 60년이 넘는 사람의 인생에 견주면 지극히 짧습니다.
단 하루의 삶으로 생명체의 본분을 다하니 참으로 군더더기 없는 생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민은행 발행, 「Gold & Wise」 2009년 3월호. 참조>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보다는 길지만 …세상 삶이 영원하다고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유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한가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가 인생의 유일한 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루의 삶에 진지해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최선을/열정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고, 
인생을 잘 살려면 하루를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다해 “화평을 이루어야”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다투고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그 교회에 무슨 은혜가 있을 것이며
성령이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덕을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격려하고,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 받도록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여 / 열정을 다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화평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덕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온 저희들
화평을 이루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때로 마귀의 유혹에 빠져 우리의 결심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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