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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생적 결단을 내린 제자/마태 (눅 0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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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과 배경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 마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그를 레위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4)”
레위는 구약의 제사장 지파를 말씀한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다. 마태의 부모는 새롭게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과거 레위 족속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바램을 아들에게 가졌다. ‘너는 커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어라’ 이런 바램 때문에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태의 본 이름은 레위였다.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이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가버나움 출신이다. 예수님은 가장 많은 사역을 여기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얻지 못하셨다. 그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가장 냉담했던 마을이 가버나움이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3-24)” 예수님께 대하여 지극히 냉담하고 배타적이었던 가버나움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마태였다. 마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 되라는 의미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되기는 커녕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연결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짙다.
그 이유는 세리는 아무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도 계산을 잘해야 하며, 장부를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 그 당시 세리가 되기 위한 사람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 당시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언어는 적어도 필수적이었다. 그 당시 제일 유행하던 말인 아람어와,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까지 요구했다. 네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가능했다는 증거이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배경을 타고, 아버지의 그런 바램 속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마태는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는 그 당시 사회 속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미움을 받고 사는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세리는 로마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의 관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이 사람들은 친로마 적 경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민중들에 의해 매국노로 배척을 받았다. 둘째로 세리들은 대부분 부정직했다. 과중한 세금으로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세리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그의 직업이 가장 배척받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죄인과 창기와 세리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하였다. 이런 삶의 배경을 가진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이 말씀 속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은 마태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 밖에 없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받은 새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불러오던 옛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에 “레위”라고 불렀던 것이다. 레위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다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마태는 예수님을 좇게 된 사실이 기뻐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도 함께 동석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다. 마태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따라나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요청하신다. 당신은 마태처럼 따라 나설 수 있는가 마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기로 결단한 그날 마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가면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잔치로 표현했다. C.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기쁨! 그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시작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그 자리도 사실은 잔치자리였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마디로 잔치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을 다시 읽고 공부하면서 “예배는 축제이며 잔치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전통적인 의미없고, 내용없고, 생명없는, 일종의 형식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춤추고 노래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제자들이 함께 어울렸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을 즐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예배에 있어 형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형식은 반드시 생명의 환희가 차고 넘치는 잔치여야만 한다.
우리가 마태를 통해 배워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마태는 세리였는데 이 세리를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인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세리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그 당시에 민중을 착취하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는 세리들을 예수님은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리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다. 세리라는 그 인간, 그들이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인간을 주님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리를 사랑하셨다.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다.
2)생애와 죽음
성경에는 마태가 부름을 받은 다음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한마디도 없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 역사에 정통했던 사람이었다. “구약성경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어떻게 유대의 역사에 관해서 그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제사장 집안에 태어나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육신의 안일과 평안을 좇아 부모의 바램과는 반대로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바꾸어 위대한 복음서를 쓰게하셨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이것은 철저히 유대 역사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신 역사를 가장 정교하게, 날카로운 필치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에디오피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핍박자들을 만나 창에 찔려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마태는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3)교훈과 문제 제기
마태는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위하여 희생적 결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확신하여야 한다.
죠지 베브리 쉐아(G.b Shea)는 시카고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자였다. 그는 어려서 부터 예수를 믿었었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얻고자했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마음은 쓸쓸해지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어느날 시카고의 한 운동장에서 젊은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열고 있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주님 앞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헌신하였다.
집에 돌아와 얼마전 예수 믿는 어머니 친구가 작곡해보라고 주었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시 전속 계약을 하면 지금까지 받았던 금액의 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정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오늘밤 저는 제목소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제목소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멜로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곡을 완성시켰다. 그 곡의 가사는 이러했다.. 사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
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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