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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히스기야의 행복과 불행 이야기 (사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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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설교를 바로 하는 것이고 설교를 바로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히스기야 왕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는 가를 알아차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을 “히스기야 왕의 행복과 불행 이야기”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아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과 다를지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나라가 평안하고 내가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다 잘 되어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 행복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해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행복을 누렸고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어 이웃 나라 왕의 칭찬과 존경을 받았을 때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불행을 경험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째, 히스기야 왕은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행복을 누렸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 가지 예를 듭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짐 보따리를 싸 가지고 대구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피난을 가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목사님들이 초량교회와 중앙교회에 모여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초량교회에서는 박윤선 목사님을 중심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중앙교회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분노와 증오에 찬 기도를 드리는 대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한민국에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유엔군을 보내셨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을 비롯한 기도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한국교회 안에 회개 운동을 일으키셨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위기 중의 축복이요 불행 중의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국가적인 위기 중에서 하늘을 향해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한 것이야말로 놀라운 축복이요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 강국이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했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 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사36:1). 앗수르 왕의 신하 랍사게가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히스기야 왕을 위협하고 조롱하며 이스라엘의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앗수르 왕이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내가 이제 올라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앗수르 왕이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라”(사36:2,4,10,16).

  랍사게가 위협하며 조롱하는 말을 듣고 히스기야 왕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하들과 제사장들도 모두 굵은 베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를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사37:1-4). 그러나 앗수르 왕은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을 협박하고 조롱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이 계속해서 자기를 협박하고 조롱한다는 내용의 전갈을 받은 후 다시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서 그 전갈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펴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37:14-17,20).

  히스기야 왕이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한 것은 군사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외교적인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기도뿐이었습니다.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한 것뿐이었습니다.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어리석어 보이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사야에게 기도 응답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래서 앗수르 군대를 모두 쳐 부시고 이스라엘을 구하시겠다는 메시지를 이사야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가 그 메시지를 히스기야 왕에게 전달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사37:21,33-35). 결국 하나님의 사자가 그날 밤에 나타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한 앗수르의 군인 십 팔만 오천 명을 다 쳐서 죽였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사37:36-38). 히스기야 왕은 너무너무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 나라와 백성을 구하신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누렸습니다.

  둘째, 히스기야 왕은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도 행복을 누렸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또 한가지 예를 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27살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 박사 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기감과 절망감이 한경직 목사님에게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하는 계기와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폐결핵 3기라는 그 일 때문에 모든 것을 제쳐놓고 처절한 회개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고 그래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함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약하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친구로 태어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 불행한 일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한경직 목사님도 자기를 들어내는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위기의 일로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의 성 프랜시스가 되었습니다. 저는 결핵 3기라는 개인적인 불행이 그 분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었고 가장 큰 행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생각하면 그 땐 참 슬프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축복이 되었어요. 또 거기 가서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는 죄를 자복했어요. 죄가 많거든요. 야심, 보통 앰비션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날린다든지, 한국말로 입신양면이라는 말이지요. 또 허위, 그리고 세상을 많이 사랑했어요. 제가 그런 죄를 자복했어요.” 한경직 목사님은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행복을 누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왜 죽을 병에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 사실을 히스기야 왕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사38:1). 히스기야 왕이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려서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한 것은 여전히 기도뿐이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여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38:2,3). 히스기야 왕이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한 것은 의학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가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어리석어 보이는 기도를 또 들으셨습니다. 이사야에게 기도 응답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래서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15년 연장시키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메시지를 이사야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가 그 메시지를 히스기야 왕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38:4-6). 히스기야 왕은 너무너무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와 자기 나라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은 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누렸습니다.

  셋째, 히스기야 왕은 모든 것이 잘 되었을 때 불행을 경험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어떤 의미에서 성공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를 구했지만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나라를 건져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질병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구해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를 구했지만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건져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성공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성공의 소식이 이웃 나라에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의 글과 예물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사39:1).

  히스기야 왕은 성공했습니다. 기뻐했고 신이 났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뻐하고 신이 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제력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겸손하게 지킬 수 있는 자제력이 부족합니다. 목회자도 그렇고 선교사도 그렇고 은사를 받은 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히스기야 왕이 바로 그 유혹에 빠졌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을 곧 은금과 향로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사39:2). 여기 히스기야 왕의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목회의 성공, 설교의 성공, 은사의 성공, 전도의 성공, 선교의 성공, 교회당 건축의 성공만을 나타내 보이면서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를 한 것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이 자기 앞에 와서 축하의 글과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신이 났습니다. 결국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났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39:5-7). 히스기야 왕은 모든 것이 잘 되었을 때 가장 큰 불행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국가적 위기도 개인적 위기도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위기 중에서의 회개이고 위기 중에서의 기도이고 위기 중에서의 기도 응답이고 위기 중에서의 하나님의 품과 손길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위기 중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모든 것이 잘 되는 만사 형통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로 이 큰 불행을 향해서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고 행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났고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났습니다. 설교의 축복도 신학의 축복도 은사의 축복도 교회 성장의 축복도 선교의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경제 성장의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동남 아시아와 중국과 몽골은 대한민국을 꿈의 대상으로 보며 Korean Dream 을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에 익숙해졌습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축하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교회가 히스기야 왕이 걸어갔던 바로 그 큰 불행을 향해서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고 행각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초기 히스기야 왕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회개와 기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관심이나 경제적 관심이나 의학적 관심을 다 제쳐놓고 얼굴을 벽으로 향해서 심히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회개와 기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의 이성봉 목사님과 오늘의 김치선 목사님을 다시 보내주셔서 우리들을 다시 회개와 기도의 길로 눈물의 길로 이끌고 가실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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