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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교회론 강의안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교수

첨부 1


교 회 론

박 영돈 교수

 

1999년 3월 10일 강의

 

이 과목에서 요구하는 것은 출석 30%, 독서과제15%, 시험을55%할 것이다. 읽을 책은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이다.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한 체계의 대부분의 견해를 다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을 꼭 읽으라. 종말론에 대해서 간명하고 쉽게 아주 잘 썼다. 그리고 유교수의 개혁교의학(교회론과 종말론), 벌콥의 조직신학을 읽으라(교회론에 대해서만) 이 외에 읽어야할 책이 있는데, 이재철 목사의 회복의 목회라는 책이다. 짤막하게 한 페이지 이내로 독후감을 쓰라. 이 책 외에 교회론을 공부할 때 필요한 책은 Paul Minear, Image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그리고 Hans Kung의 The Church이다. 로마교회 학자이지만, 개혁주의와 가까운 것이다. 출석에 있어서는 참석할 뿐만 아니라, 강의를 경청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신학함은 주님의 임재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시작하는 것이기에 세시간의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작하자. 강의가 따분해 지더라도 열심히 임해주기를 바란다.출석 30%에 반영할 것이다. 세 시간이기 때문에 쉬는 시간을 두 번 후에 안 들어오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사법처리를 할 것이다.

 

Course Outline

교회론

1. 성령충만

2. 교회론의 위치

3. 교회의 본질

4. 교회의 표지

5. 교회의 예배

6. 성도의 교제

7. 교회의 성장과 성령의 은사

8. 교회의 제도와 직분

9. 교회의 설교

10. 교회의 예식‘

11. 교회의 선교

종말론

1. 종말론의 위치와 구조

2. 신자의 삶의 종말론적 특성

3. 기독교 역사관

4. 죽음후의 세계

5. 종말론의 유형

6. 그리스도의 재림

7. 새 하늘과 새 땅

 

성령충만에 대한 해석들을 먼저 살펴보고 넘어갈 것이다. 종말론 보다 교회론에 대해서 다룰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론에 시간을 더 할애할 것이다. 2:1의 비율. 종말론에 대해서 다루지 못하는 내용들은 후크마의 책에 자세하게 잘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공부하기 전에 1-2분 정도 수업 시간을 위해서, 우리들을 위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시작하자.

 

오늘은 성령충만에 대해서 공부해 보자. 두려운 것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잘 알면서, 성령 충만한 실제적인 은혜가 결핍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20세기에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현대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토니 후크마도 말하기를 성령충만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은혜이다. 성령충만해야만 빛을 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성령 충만이 과연 무엇인가? 올바른 신학적인 정의와 해석이 없이 성령 충만 운운할 때 많은 경우 신비주의나 감정주의, 주관주의 체험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먼저 살펴보고 정의하자.

 

첫째,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이다.

 

여러분은 성령충만이라는 단어, 언급이 신약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렇게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서신서 전체에서 성령충만은 단 한 차례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는 10번 나타난다. 그러나 서신서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성경에 그러한 대답이 없다. 신학함이란 언급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전체적인 빛에 비추어서 탐구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다. 자칫하면 잘못 이해되고 남용되고 혼선을 빚을 수 있는 표현이다. 성령충만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성령충만에 대한 내용이나, 열매, 결과 등에 대한 명시가 없이 자주 언급할 때 잘못하면 신비주의나 감정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 성령충만이 무엇인가?하는 것에 대한 기준과 측정이 달라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신비적인 경향을 가진 분들은 성령충만이란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 신유의 은사,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는 사람은 기도와 설교를 얼마나 뜨겁고, 열렬하게, 큰 소리로 하는 가에 따라서 성령충만을 가늠하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성령충만을 도덕적, 윤리적인 측면에서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지 않은채, 말만 사용될 때 성령충만이 사람들에 따라 제멋대로 이해되고 해석되고 여러 가지 감정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서신서에 이런 표현이 자주 사용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표현을 사용할 때 오는 혼란을 막아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목회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사도들은 이 단어나 언급은 피했지만, 서신 속에서 성령충만이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너무나도 풍성하게 제공한다. 서신서의 모든 가르침은 어떻게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 것인가? 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는 것,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감사하는 삶,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 등이 성령 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비교할 때 사도행전은 최초의 교회 직분자를 세우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만 밝히고 있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에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서신을 보면 바울은 교회의 직분자 장로, 집사의 자격을 제시하면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구체적인 인격과 삶의 모습을 확실히 제시한다. 딤전3:1-7에 보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 대접하기를 잘하며,... 이것이 성령충만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왜 누가는 애매한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가? 그것은 사도행전이 쓰여진 목적과 초점이 서신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의 터가 어떻게 닦여 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회가 터를 잡고 발전하는 중요한 국면, 단계마다 성령이 개입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항상 성령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의 터가 내려지지만 이것이 사도들의 사역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주관하셔서 교회를 세우신 분이 성령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의 인도자와 설립자와 주관자라는 사실을 강조함. 교회의 터가 닦여지는 작업에, 사도들의 복음과 가르침이 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가 인간의 철학과 오류에 의해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임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베드로의 설교에 성령충만함을 언급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설교의 권위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교회의 양적인 부흥이 있으면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때의 일이다. 이때 성령 충만을 언급되었다. 사람이 그들을 세우지만, 그들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그들을 세우는 이는 성령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 후에 이방 전도의 시작에도 성령이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게 하신다. 이러한 사도행전에 쓰여진 목적의 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언급만으로 교리를 유추하려면 큰 문제가 생긴다. 구체적인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성령충만의 구절만을 가지고 성령충만의 교리를 세우려고 할 때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언제나 성령충만에 대한 교리는 서신서 전체의 내용가운데, 성경 전체의 진리 가운데서 살펴보고 고찰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성령충만에 대한 교리는 20세기에 와서야 새롭게 발견된 진리이거나, 그들만의 새로운 체험이 아니라,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통적인 교회가 계속적으로 강조해온 그리스도인의 온전하고 능력있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무엇인가? Sola Gratia가 아닌가! 이것이 다른 말로 성령충만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성령충만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 언급들이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성령충만이라는 말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이 미흡했다. 아직까지 성령충만에 대한 의미나, 내용과 특성에 대해서 제대로 밝혀주지 못한 잘못이 있다.

 

둘째, 성령충만의 의미.

 

성령충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에는 성령충만이라는 언급이 15회 나타난다. 세가지 헬라어 단어가 사용된다. πιμπλημι가 8번 언급되고, πληρο,, ,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을 세운다. 무엇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채워지는 내용은 성령이다. 그러면 성령충만이라는 것을 문자적인 의미가운데 이해하면 성령이 우리의 전 존재에 침투하여서 그의 은혜와 능력과 영향력을 제공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비유적인 의미. 바울은 엡5:18에서 성령충만을 술취함과 비유하고 있다. 이 말씀속에서 나타나는 것같이 이 단어는 알콜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지배를 받는다 는 뜻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비유적인 의미를 가진다. 성령으로 지배함,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통합할 때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Thus the specific meaning of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s that the whole sphere of one's being and life, being pervaded with the Spirit's power, is controlled and led by the Holy Spirit.”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이 성령의 능력과 은혜의 영향력에 의해서 침투되어서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동일한 의미도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갈5:16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5:25에서 성령을 따라 살라, 따라 행하라로 사용된다. 이것이 영어로는 성령과 보조를 맞춘다. 롬8:14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표현된다.

그러면 성령충만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보자. 성령이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이끄시는대로 우리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따라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성령이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양도하여 주님이 맡아서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갈 때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은혜로 주실 것이다. 우리의 영혼, 정신 뿐만아니라, 육체까지 침투시키셔서 우리들의 전 존재가 성령의 기운으로 얼룩져서 하나님앞에 영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도와주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술취함과 비교한 것이다. 우리가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콜 성분이 우리들의 모든 세포조직에 퍼져서 얼굴과 피부에까지 영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성령도 충만케 되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육체의 모든 기능에 까지 스며들어서 우리들의 온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콜은 우리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방탕으로 치우치게 되는데, 성령의 새술이 우리에게 침투하면 오히려 거룩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그것에 목말라하게 된다. 시편기자는 내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급하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음을 보라. 그 갈증이 우리의 육체까지 전달되는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갈증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현상이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분리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영향을 미침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주님께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육체는 육신적인 삶을 살고, 죄를 좇는데 우리 몸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세상의 더러운 영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때문에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으로 우리의 육체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확산됨으로 말미암아, 항상 우리의 육체가 항상 살아있는 것이다.

 

세 번째, 성령 충만의 특성

 

1) 성령 충만을 여러 가지 충만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존 스토트와 안토니 후크마는 성령 충만이라는 언급에 사용된 세가지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에 근거해서 성령 충만을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특별한 충만이다. 주로 πιμπκημι(8회)가 사용된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충만,pleirow이다. 세 번째는 충만한 상태(State) pleireis가 사용된다. 핌프레이미는 7번 아오리스트로, 1번이 미래인데, 이 모두가 즉각적이고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의미이다. 그때 주어진 성령충만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변증할 때, 설교할 때 등이다. 프레이로오는 지속적인 상태 계속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성령충만의 언급은 특별한 것보다는 오히려 보통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일상속에서 유지해야할 성령충만의 은혜이다. 세 번째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인 pleireis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가 많은 사람의 상태, 특성, 성향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리는 있지만,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 특별히 신약학자인 하워드 마샬은 지적한다. 핌르페이미라는 동사는 즉각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아오리스트 시제로 사용되었을 때도 꼭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행위의 동작만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것은 아니고,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을 가르킬때도 사용된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충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한 순간을 찰라적으로 잡아서 묘사할때는 순간적인 의미를 내포한 아오리스트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핌프레이미가 아이리스트라고 해서 즉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 종류로 나누는 것의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 세가지 헬라어 단어에 근거해서 나누려면 특별히 핌프레이미는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행위, 즉각적인 동작을 강조하는데 사용되며, 지속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두 동사는 지속적인 상태, 지속적인 성령충만한 상황을 말할 때 사용된다. 그래서 크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 이다.

Acts of Holy Spirit - 핌프레이미, State of fullness - 프레이레이스, 프레이로오

그러나 성령충만한 상태는 우리의 책임이 포함된다. 즉각적으로는 성령충만의 감화를 받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문제는 State를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책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저 두 부분을 분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령충만의 점진성이다. 마샬은 지적하기를 핌프레이미라는 동사는 충만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충만이 주어진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충만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충만의 양은 받는 그릇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믿음의 분량, 영적인 수용량에 따라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성령충만의 양은 점점 달라진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폐활량은 다르지만, 폐에 채워지는 충만은 똑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태어난 영적인 신생아라 할지라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다면 성령충만의 분량도 달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성령충만이 점진적으로 증가한다는 말은 성령받음이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분리해서 조금씩 더 받는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인격의 전체를 영접한다. 우리안에 내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 우리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됨을 의미한다. 우리안에 성령 충만이 증가된다는 것은 분량이 아니라, 내 안에 완전히 와 계시는 인격체로서의 성령이 나를 다스리는 정도, 영역이 더 확장된다는 뜻이다. 더 온전히 나를 지배하신다. 더 활발하게, 거침없이 자유롭게 사용하신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성령이 우리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종들을 원하시고 계신다. 성령충만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점진적인 증가는 우리가 성령을 더 많이 받음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신다는 의미이다. It is not that we get the Spirit but that the Spirit get ours

세 번째 특성. 성령충만의 집합성이다. 공동체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충만은 개인적으로 경험되었으며, 또한 집합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경험되었다.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탄생하면서 그 안에서 성령충만한 개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문맥속에서만 성령충만의 개인을 알 수 있다. 개인의 내부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 교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실현하고 나타나야 한다. 온전한 성령충만의 모습은 어떤 개인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깊은 인격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모습 속에서 성령충만의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개인의 경건에만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우선적으로 공동체 속에서 일어난다. 공동체 세상 속에서 선교의 사명의 맥락속에서 성령충만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할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는 모습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이루어갈 때 세상 속에 빛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선교이다. 주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참된 인간의 모습,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을 위해서 성령이 주어졌다. 그런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을 부르셨다. 공동체의 모습들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원리가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우리가 보여야 한다. 세상을 향한 복음과 회개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숫자를 늘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회복하는데 까지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약한 모습이다.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회가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령충만한 개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교회가 성령충만한 삶을 위한 영적 분위기의 토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훈련되고 실천될 수 있는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성령충만을 회복하자고 할 때 내가 좀더 기도하고 회개하는 문제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의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교회적 차원에서의 제도적인 개혁과 근본적인 궤도 수정이 꼭 필요하다. 나혼자 성령충만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깊은 교제들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교제를 누릴수 있는 장이 없이는 결코 성령충만을 만끽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성령충만의 보편성.

성령충만은 어떤 선교사나 특별한 사역을 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면서부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을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정의하면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성령충만한 공동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new man이다. 옛 사람일때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됨은 성령이 내주하시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의 은혜와 축복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특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질 수가 없다. 근본적인 새롭게됨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충만 안에서 가능하다! 성화라 함은 성령충만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성령충만하지 않고 세월만 간다고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다. 꼭 있어야할 필수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긴급하게 명령하고 계신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신자안에 남아 있는 죄성이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다.(죄성은 지배세력은 아니더라도 잔유세력이다.) 오직 성령충만만이 해결책이다. 우리의 죄성은 다이너마이트와도 같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충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죄는 성령충만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은혜로 충만하지 않으니깐 부패성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신자에게 전적인 부패성이 남아 있음을 강조한다.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성령충만의 교리와 연결된다. 성령안에서 전적인 무능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주어진다. 챨스 피니는 말한다. “세상은 성령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있다.” 세상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변교수님이 설교하시듯이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생수의 강) 다만 우리가 활용하지 않고, 성령의 길을 따라서 행하지 않고 육신의 길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체험하지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질문. 비그리스도인에게 핌프레이미의 성령의 역사? 일어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성령충만이란 특별한 성령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질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신자에게 특별한 성령충만이 주어졌을 때 사도들에게 나타난 것과 같은 기적의 역사, 능력의 나타남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은 좀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야 한다.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오늘날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지금의 기적이 사도들의 때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성격과 임무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도권은 입증하거나 교회의 터를 내리기 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도적인 임무는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질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누가복음9:40절을 보면 다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었다. 그의 역사함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성령의 일반은혜를 다룰 때 다루었다. 어떤 이는 종교적인 면에서 굉장한 일반은혜를 받아서 거의 신자들이 누리는 것을 누릴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라, 일반은혜이다. 교인들이 누리는 은사의 나타남, 기적의 행함 등도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심지어 목사까지 할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영생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존 오웬도 그렇게 말했다. 성령의 은사를 어느정도 누리지만, 은사를 체험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질문. 만일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난 일들은 따라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가? 아니면 악령의 역사라 하여야 하는가? 그때 그때 영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현상들을 분석함으로 그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를 진단해 보아야 한다.

 

다섯째, 성령 충만의 계속성.

성령 충만이란 단회적인 극적인 체험 일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체험이다. 계속 되풀이되는 체험이요 상태이다. 성령이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우리를 항상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 항상 충만케 하시니, 성령으로 우리를 지속적으로 충만케 하라. let the Spirit keep filling you.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행위 동작과 상태를 우리는 편의상 구분하였다.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행위는 연속적으로 주어진다. 그런 사역과 행위에 우리가 반응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충만한 상태가 우리안에 이루어져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여섯째, 개혁주의의 입장은 성령세례를 정의할 때 오순절 계통의 정의와는 조금 다르다. 예수믿을 때 성령 충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예수믿을 때 가장 처음 임하는 성령충만이 성령세례이다. 세례는 beginning point이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았는데, 원래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을 것인데, 실제로 받은 것이 성령의 충만이다. 최초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인 모순과 혼동이 온다. 사마리아인들, 에베소인들, 제자들의 경험등을 들어서 이단계적인 체험을 강조할 수 없다. 제자들의 경험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상황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성령이 오시는 기점으로 해서 양시대에 걸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성령이 오실때까지는 아직까지 구약범주에 속한 체험을, 오순절을 기점으로 새시대에 성령이 임한 다음으로는 새시대의 성령사역의 체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입장이 다르다. 우리는 오순절 이후에만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예수님을 보고 믿지 않는다.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45년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일제치하를 경험하고 광복을 경험함으로 두가지 통치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광복후에 태어난 우리는 더 이상 두가지 통치를 경험할 필요가 없다. 비슷한 맥락속에서 성령의 구시대와 새시대에 걸쳐서 사역하였기에 두 시대의 성령의 체험을 다 누렸던 사람들이다. 서신서 어디를 보아도 성령을 이차적으로 받으라는 것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성령충만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던 베드로 조차도 조금의 암시도 없다. 바울 서신도 요한 서신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을 받는 근거는 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에 근거해서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자기의 경건과 열심을 근거로 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다.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들을 은근히 과시한다. 하나님을 우리가 만났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정상적이고 축복된 방법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감정적인 희열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신령한 체험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를 영접하였으면 가장 큰 체험을 한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체험이다. 주님을 놀라게 한 체험이 무엇인가? 말씀으로만 믿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일곱째, 성령 충만은 예수 믿을 때부터 누려야할 은혜이다.

예수를 믿을 때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만 섬기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서약한다. 약속한대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이 인도하시기에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우리는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가며, 죄와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 충만을 받게 된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초대교회 교인들이 누렸던 정상적인 신앙의 정도에서 탈선하여 방황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는데, 약속한 대로 죄와 결별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구습을 따라, 육신을 따라 살아감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만연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순절과 같은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다. 획기적인 은혜를 받아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현대교회의 많은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필요한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정상적인 패턴은 아니다. 중생한 후에 오랫동안 은혜없이 살다가 어떤 포인트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것이 성경적이고 어떤 것이 시대적인 요청으로 제시된 비정상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성령 충만이란 현대의 많은 교인들이 죄와 불신앙으로 상실한 은혜이다. 상실한 은혜라는 것은 좀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소멸하고 있는 은혜, 허비하고 있는 은혜라는 의미이다. 성령 충만의 은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생수의 강이 계속 넘쳐흐르는데 그것이 다른 데로 넘쳐흘러서 소비되도록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멸시키고 있는 은혜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통렬한 회개로 긴급하게 회복해야 할 은혜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음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근심시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 능력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다. 영적인 암흑시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령을 거역함으로 성령의 역사가 약화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대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 혼자만 바로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적인 경건의 자세를 탈피해야 한다. 항상 우리를 연대적으로 집합적으로 다루신다.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 그럼으로 몇몇 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영적인 피폐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영적으로 이 시대를 판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웃을 때와 울 때가 있는데 지금은 우리가 울고 회개할 때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위축되어 있다. 이 시대에 참으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령과 함께 근심하는 눈물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이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외형적으로는 찬란한 부흥을 이룬 것 같지만, 아주 어두운 세대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 성령께 사로 잡혀서 성령의 사역자가 됨은 성령과 함께 울며 탄식하며 기도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다룰 때 결론은 통렬한 회개운동,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단이 이런 운동으로 태동된 교단이 아닌가! 이 시대의 순교 정신은 더 영적으로 피폐화 된 사회 속에서 다시 한 번 영적인 쇄신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넷째, (실제적인 면) 성령 충만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견해가 있다. AW 토져는 말하기를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사실을 체험한 사람 치고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드만은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것을 가장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빌리 그레함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은혜가 많은 사람은 자신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두 입장은 다소 극단적이다. 원만한 결론을 내려보자. 첫째, 성령 충만한 은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이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자신이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 말씀을 따라 사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성경은 또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없다. 단지 편의상 그것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에 비중이 더 많이 기울어져 있는가? 주로 영적인 사람은 간헐적으로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 영적인 삶으로 회복하는 사람이며,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간헐적으로 성령의 은혜와 감화를 받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함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자기 안에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육신에게 져서 육신을 따라 사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현저하게 성령의 주관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삶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판단하기 애매한 사람들도 대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이다.

둘째, 성령을 따라 사는 이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성령의 주장을 받으며 그 능력을 매일의 삶 속에서 맛보며 산다는 것을 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능력이 나에게 부여됨으로 나의 교만을 제어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이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이는 그렇게 은혜가 많아질수록 영적으로 예민해지고 양심이 더 밝아져서 전에 보지 못하던 작은 허물과 죄성 까지도 보게 됨으로 자기의 부족함을 더 많이 인식함으로 자기의 입으로 섣불리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가 말한 것도 일리가 있다. LA에 한국에 능력의 종이라는 분이 큰 교회 집회를 왔다. 그 교회는 소위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였다. 거기서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교회 목사님을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그 목사님이 자신을 강사로 추천한 것을 보니, 틀림없이 성령 충만한 목사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넌센스이다. 얼마나 자신이 성령 충만과 거리가 먼 사람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다.

셋째, 성령 충만한 이는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가 아니고, 주위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다. 특별히 가장 그를 가까이서 대하는 사람이 알아주면 그는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또한 교회 생활 만으로는 그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입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해서도 안되지만, 섣불리 다른 사람들을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 어떻게 성령 충만을 알 것인가?

 

성령 충만을 받는 여러 가지 조건과 단계들을 제시하고 있다. 대개가 이론적으로 성령 충만을 아는 것은 아니고 실제적인 은혜를 누리고 경험한 사람들의 책에서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것인가? 라는 제하에서 항상 몇가지 조건과 단계가 제시된다.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를 비워야 한다. 깨끗이 비워진 그릇만 채워지듯 자기를 비울 때 성령께서 충만케 하실수 있다.

둘째, 성결이다. 알고 있는 죄를 모두가 제거하고 청산해야 한다.

셋째, 자기를 철저히 양도해야 한다.

넷째,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 믿음. 이 믿음은 항상 마지막 단계에 열거되는데, 앞에서 언급된 다른 전제 조건을 다 이룬 이후에야 이 믿음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가르침이 물론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이 글을 쓴 분들이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상당한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다. 어떤 것일까? 만약 나 자신을 다 비운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는다면 우리가 언제 자신을 다 비울 수 있겠는가? 어느 순간에 나 자신을 비울 수 있겠는가? 언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청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전에 알지 못하던 죄성을 알게 되는데, 어떻게 이 일일 가능한가? 이럴 때 끊임없이 자기의 내부만 해치고 파는 내적 성찰의 악순환에서 우리는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따른다. 죄를 배격하는 길로, 죄와 분리된 삶으로 인도하시니 우리도 죄를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자기를 부인해야할 책임이 있다. 순종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임이 조건은 아니다. 그런 책임은 성령 충만의 열매요 결과이다. 경험적으로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신학함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는 성령 충만이 우선된다. 우리의 힘으로 자기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생래적인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완수할 원동력은 성령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성령 충만의 은혜가 선재해야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능력은 이미 주어져 있다. 보장되어 있다. 정말 죄를 제어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서 유용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소한 차이인 것 같지만, 굉장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임스 패커는 이런 가르침에 의거해서 성령 충만을 추구하다가 너무나도 쓰라린 경험을 한 것을 묘사한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고 양도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가르침에 탐닉되어 결사적으로 이런 축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누린다는 승리와 기쁨에 충만한 삶은 점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러한 능력의 삶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삶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을 거듭 성결케 하기 위한 노력을 되풀이 하면서 내 안에 아직도 양도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내부를 성찰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버스를 놓치는 것과 같은 안타까움과 답답함 때문에 고통스럽게 되고, 신앙생활이 걸을 때마다 나를 절룩거리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경험의 20세기 형태를 본다. 이런 것들을 조건으로 제시하게 될 때 패커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께서 항상 자기를 비우게 하시고 부인하게 하시고, 순종하는 삶으로 인도하게 하시니, 그런 삶을 살기 위한 갈망과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을 내 힘으로 이룬 다음은 아니다. 자원하는 마음 자체도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만들어야 할 것이지만,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을 요약을 해보자.

첫째,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다. 예수님의 전적인 공로의 대가로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다. 성령이 시초적으로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주님의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어떤 이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가? 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순종하는 삶, 죄에서 돌이키는 삶은 믿음안에 포함된 요소이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승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존재가 주님을 신뢰함으로 의지하면서 산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성령충만을 받는다.

둘째,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할 책임이 있다. 순종의 책임이다. 그 책임이 완수케 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자원하는 심령, 좇아가려는 마음도 우리의 강팍함을 녹여주시는 성령께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도 없다면 “하나님이여 나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소서”라고 다윗처럼 기도해야 한다.(시편51)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림을 받으려면 자원하는 심령이 있어야 한다. 나의 강팍한 마음을 녹여서 자원하는 심령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여섯째, 성령 충만의 결과

 

성령충만의 결과는 어떤 것인가? 성경적인 근거와 경험론적인 자료를 찾아보자. 어떤 이는 성령 충만을 받으면 가시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성령충만의 가장 우선적으로 나타나야할 증거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사랑의 인격이 그것이다. 열매로 알지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열매들이 삶과 사람의 됨됨이와 사역에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참된 영성의 시금석이다. 열매맺음이 우리를 택하사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격적으로 새사람이 된 근본적인 성화를 구체적으로 실현케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근본적인 성화는 성령의 충만 가운데서만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둘째,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관련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바른 동기와 자세와 목적을 주신다. 목회자가 성령충만을 받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며, 목회한다. 집사님이 받으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다할 것이다. 직무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에 성령 충만의 결과는 주어진 직무와 은사를 따라서 달라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된다. 은사를 잘 활용하는 모습속에 나타난다. 성령 충만의 증거가 열매인가? 은사인가? 존스토트는 증거를 우선적으로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은사는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열매가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이 열매가 아닌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but 우선적으로는 열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은사를 활용하는 과정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의 임재의식이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보혜사가 주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이 오심을 예수님 자신이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 하신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자체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의식이 고취됨으로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코람데오는 의지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의식이 확실히 임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 하나님의 임재의식이다. 과거의 구약에는 아직 성령의 임재의 온전한 축복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앞으로 주어질 영구한 축복을 내다보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시적인 임재를 누리고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우리 예배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시카고 신학부의 사회학자는 미국 사회 속에서 현대 교회가 영적ㅇ로 침체된 원인을 지적했다. 자기가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 어렸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했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식을 더 이상 느낄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지만, 이것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신다. 로이드 존즈도 성령의 새로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기의 삶 속에 물밀 듯이 엄습해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진술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그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랑은 지식의 바탕위에 서 있는 사랑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자신이 죄인이었을 때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구속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는 것과 관련짓는다. 로마서 4-5장에서는 칭의론을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거룩함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째, 에베소서5:18에는 성령 충만을 명령하시고 그 다음에 이어서 성령충만의 증거로서 서로 찬양하며,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삶 속에서 성령충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혼자 나의 심령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만끽함으로 충만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된다.

여섯째,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자. 육체에 힘을 주시고 육체에 쉼을 주시고 우리의 기억력을 새롭게 하시고 생각을 밝게 하신다. 혀를 풀어주사 말을 더 자유롭게 하도록 하신다. 성령충만의 은혜가 우리 안에 스며듦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인상도 바뀐다. 로버트 머레이 머케인이라는 사람이 있다. 29세에 작고했는데 교회사에서 영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설교를 위해 강대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성도들이 보는 순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곱째, 담대함과 온유함과 균형을 이룬다. 주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사자처럼 담대하여야 된다. 진리를 위해서 어떠한 대적과도 싸워이길 수 있게 된다. 그런반면 담대하기만 하고 온유함이 없어서는 안된다. 담대하지만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이런 양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온유함과 사랑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잘못 행하는 사람들을 꾸짖되 온유함으로 꾸짖으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와 눈물이 있은 다음에 담대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단과 강철의 조화! 이것은 노력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 가능하다. 온유함은 단지 우유부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함은 참된 강함이다. 우리의 죄성의 특성이 교만인데, 교만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이 주어져야 우리가 온유할 수 있는 것이다.

여덟째, 기쁨과 평안이다. 초대교회는 환란과 핍박 속에서 성령의 기쁨을 누렸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성이다. 성령의 기쁨이 환란과 핍박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성령 충만은 역경을 극복하고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 기초이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쁨의 삶이다. 평안이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 것을 명하신다. 일에나 때에나 평강의 하나님이 평강을 주실 것이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실 것이다.

아홉째, 은혜를 쉽게 받고, 쉽게 전달하게 된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성령 체험을 한 이후에 설교준비가 훨씬 더 쉬워졌다고 증언한다. 무디는 성령충만 이후에 이전의 설교와 동일한 설교를 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다. 은혜를 전달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사역하고 봉사하지 않아도 은혜를 끼치는 사람도 있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아도 그가 나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 은혜가 된다.

열째, 안식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은 쉬는 삶이다. 안식은 성령 충만을 통해서 회복된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이끌림으로 헛된 수고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맡으시고 책임지시기에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쉼의 바탕위에서 사역을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 일하신다. 성령께서 나 대신 싸우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함으로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 쉼을 누린다. 은혜없는 사역을 계속함으로 우리는 수고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열한번째, 안식은 성령의 자유하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무거운 죄짐을 제거하심으로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더 온전하게 지키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자유함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한 자유함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경직됨은 많은 경우 은혜의 결핍에서 온다.

열두번째, 감사와 기도. 은혜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감사인데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감사하는 삶은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기도도 감사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떼를 쓰고 징징대는 기도가 아니라 감사를 바탕으로 기도해야 한다.

열세번째,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성령충만의 내적인 상태이다. 애통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애통하는 마음 가운데 성령 충만의 은혜가 계속 부어지고 유지된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산다는 또다른 모습은 죄에서 돌이키는 애통의 마음이다. 겸허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 충만의 삶에는 상반적인 것이 우리 안에 공존한다. 성령의 기쁨과 위로가 있고, 우리의 부족함과 죄에 대한 슬픔이 함께 공존한다.

열네번째, 갈급함. 목마른 자는 나아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갈증이 성령충만한 자에게 계속된다. 갈급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특이한 현상은 갈급함을 가지고 성령충만을 구하고 또 받게 되면 채워지는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더 고조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더 접어들수록 영적인 만족이 아니라, 갈급해 한다. 갈증의 은혜!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영적인 만족감이다. 갈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이다.

열다섯째,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열정.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빛된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 선교에 대한 의미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로이드 존즈 목사의 성령체험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충만의 견해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설교집을 가지고 신학적인 입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성령 세례를 중생과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차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의 체험으로 본다. 주님의 사역자는 성령세례를 체험함으로 하늘로부터 능력의 입힘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해야하는데 이런 체험의 결과가 피니, 무디, 롤렌드 힉 등에게 나타난 것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분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전개한 것이 아니기에 비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분의 설교의 논지를 살펴보면 주님의 사역자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체험한 것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삶이 바뀌는 체험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체험을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았다 할지라도 피니나 무디에게 나타난 것처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복음 사역자들에게만 그것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특별한 체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 첨가해서 사역자에게 능력부음의 체험이 있어야 하지만, 능력에 대한 체험이 챨스 피니나 무디처럼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할수도 없다. 개인의 상황에 맞게 주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맞보게 될 것이다.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이 특별한 체험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로이드 존즈의 책에서 도전받을 수 있는 것은 사역자는 어떠한 형태의 체험이든 강력하게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그 능력의 바탕위에서 사역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곱째, 성령 충만을 회복하는 길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주어지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은혜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음으로 교회와 개인이 상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회개하고 개혁함으로 성령충만을 회복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 : 먼저는 공동체 차원에서의 개혁과 갱신이 있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공동체 안에 실현되고 나타나야할 축복이다. 개인의 심령 안에서 성령 충만의 온전한 모든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한 예배와 교제와 봉사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없을 때 성령 충만을 만끽하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 충만한 삶이 배양될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성령충만한 공동체에 젓붙임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쉽게 받을 수 있었지만, 중세의 암흑시대의 삶 속에서 개인의 성령 충만도 힘들 것이다. 연대적인 회개운동과 갱신 운동이 선결과제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단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성령 충만을 위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죄에서 돌이키는 하나님의 진리로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죄에서 전격적으로 돌이키고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먼저 목회자들의 비젼과 목회 철학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 징계도 회복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삶이 배양될 수 있는 예배와 교회 조직, 프로그램, 교제(더불어 사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작은 목자로서의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과정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배양되고,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된다. 은사를 계발하고 활용할 때 참된 변화, 참된 열매를 맺어가게 된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는 경직된 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목회자로 부름받은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을 회복할 수 있는 책임과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어두운 세대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고난과 염려와 고통이 있지만, 이 어두운 세대 속에서 개혁의 위인으로 태어났다. 개혁의 선구자가 되라.

 

개인 : 공동체적 책임의 바탕위에서 개인의 회개와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바른 인식이 있어야 한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성령충만을 받지 못함으로 사단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랫 동안 육적인 삶을 살다가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될 때는 사단의 큰 공략과 계략이 있을 것이다. 성령 충만의 삶의 영광과 축복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삶인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내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성령충만하면 광신자가 되는 것인가? 성령 충만 할수록, 거룩해 질수록 영광스러운 기쁨과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성령충만의 복됨과 성령충만의 필요성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영향력 있는 봉사는 하지 못한다. 능력있는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의 삶을 경험해보지 않고 누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삶이 멀어 보이지만, 나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너무나 약하고 죄악되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자주 간과한다.

갈망을 가져야 한다. 목마른 자가 구하며, 구하는 자가 얻게 된다. 목마름이 없음은 영적인 병이 생긴 것이다. 죄에 빠진 삶을 살다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갈망을 주셔서 자원하는 심령을 회복시키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갈망에 온전히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구하게 될 때 그 은혜를 소유하고 유지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하나로 뭉쳐서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이런 공동체와 개인의 회복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회복한다.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믿음으로 받는 다는 것은 곧 회개함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육신을 좇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감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가?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성령 충만을 모두가 구하지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른 동기로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도치고 이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다 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원하지만, 그 삶의 근본적인 내용, 삶 자체를 싫어하면서 혜택만을 누리기를 원하니 받지 못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의 사역자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회개하고 성찰할 때 구체적인 죄악들을 회개하게 된다. 우리들의 말이 성령이 인정하시는 말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은혜를 전달하는 말투가 되어야 한다.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을 허용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성령이 그 마음에 충만하게 하시겠는가!

전반적으로 성령의 은혜가 더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 이 세대는 새로운 종류의 바벨론 포로기이다. 죄의 세력에 억압되어 영적인 은혜들을 만끽하지 못하고 곤고하고 피폐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에 성령을 근심시키는 사람이 많을 때 성령께서 그 공동체에 얼굴을 가리우실 것이다. 그래서 그 공동체 안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있을 것이다.

 

여덟째, 성령충만을 이해하는 신학적인 틀

 

첫째,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성령충만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완성된 대속사역에 근거해서 은혜가 주어진다. 성령충만이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전제조건을 십자가와 부활사건에서 성취하셨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근거로 주어진다.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셨다(aorist).

칭의의 근거 위에 성령 충만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의 공로로 우리가 완전한 의를 누리게 된다. 아들의 영으로 우리가 모든 축복들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이다.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으로서 성령충만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위에서 충만케 된다. 우리 안에 옛사람이 근본적인 성화로 해결 되었기에 성령충만이 가능하다.

셋째,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온전한 모습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발견하고 누릴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시작에서부터 성령충만한 공동체이다. 성령충만한 삶이 배양될 수 있는 토양과 분위기가 먼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셋째, 선교론적인 관점.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충만을 주신다. 구원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의 모습을 세상속에서 보여줌으로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바탕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우리의 복음 전도가 더 이상 효과가 없는 것이다. 참된 증인됨의 삶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넷째, 종말론적 관점. 종말론적인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능력을 맛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이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성령이 충만하면 종말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소망으로 충만하지 못함은 그들이 성령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스가 지적한 것처럼 종말론은 바울의 가르침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목표가 종말이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힘을 받았으니 그것을 위해서 구하라고 말한다.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진실한 종의 모습을 가지기 위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을 받기 위한 동기만으로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 종말론의 두 측면 곧 already but not yet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미 성령의 능력이 주어졌기에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승리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완성은 아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이런 측면에서 항상 불완전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론의 위치

 

우리는 교회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자로서 바른 교회관을 가져야한다. 바른 교회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현재의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 개혁의 방향을 발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깊은 생각없이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본질은 ? 목적은? 등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신학적인 숙고함이 없이 전통을 따라서 목회하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교회관은 세상 사람들이 성공한 목회를 했다는 판단을 좇아서는 안되고 성경에 제시된 바른 교회관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 학기는 교회론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점검하는 기회를 삼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이 교회의 본질에 부합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잘 수행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세상속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영혼구원? 진보측에서는 사회 갱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양면성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통합할 것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교회의 참된 예배와 설교와 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현실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을 바로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하고 있는가? 어떤 면이 제고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갱신되어야 하는가? 교회론에서는 교회를 기독론적인 관점과 함께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려고 한다. 경직된 교회관에서 좀더 유기적이고 공동체적인 역동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교회관을 발견하고자 한다. 전통 교회론의 바탕위에서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부각되고 만인 제사장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교회 성령의 능력으로 선교하는 역동적인 교회관을 찾아보자.

 

조직신학 안에서의 위치

 

로마 교회는 교회론을 개인의 구원에 앞서 다루고 있다. 기독론 - 교회론 - 구원론의 순서이다. 그래서 개인이 교회의 예식과 순서에 참여함으로 성령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과 교회의 관계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이지만, 성령과 개인의 관계는 교회를 통해서 전달되는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성화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이 무시된다. 개인 안에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간과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극단적인 개신교주의자들은 개인안의 역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령과 교회의 관계를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또다른 극단에 빠지는 것을 본다. 극단적인 개신교 주의자는 성령과 교회 제도와 직분과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반제도적인 견해를 가진다(재세례파). 오직 유기적인 관계들을 통해서만 역사한다? 제도를 통해서는? 로마교회의 극단에 반발한 또 다른 극단이다.

로마교회 : 기독론 - 교회론 - 개인 구원론 :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Radical Reformed : 기독론 - 구원론 - 교회론 : 개인주의(Individualism)

칼빈은 이런 두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함께 배격한다. 개인적인 면을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극단적인 개신교주의자들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래서 칼빈은 기강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면서 “교회는 개인 영혼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교회를 떠나서는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개개인 신자는 교회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한 단계 나아가서 어거스틴(교회를 떠나서 구원이 없다)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슬로건이 중세 로마 교회에 의해서 교권주의 신장을 위한 적절한 이론적, 신학적 도구로 남용된 것이 문제일 뿐이다. 어거스틴은 개인 신자들의 구원과 성숙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로마 교회처럼 곡해해서는 안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과 교회의 관계가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것과 같이 성령과 개인과의 관계도 그러하다고 주장하였다. 성령 사역의 두 측면 개인과 공동체적 측면을 함께 강조했다. 집합적인 열매 그 안에 있는 개인적인 열매!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칼빈이 강조한 신앙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교회 중심적인 신앙이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의 강조점과 역점이 후대에 잘 전수되고 강조되지 못한 이유는 개신교 신학의 구조적인 논리와 순서에 취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순서 자체에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야기시키는 잠재적인 위험성이 깃들여 있다. 그말은 칼빈이후 개신교의 교의학의 논리적인 구조와 순서에서는 로마 교회에 대항해서 극단적인 개신교 주의자와 같이 교회에 앞서 개인의 구원을 먼저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종교개혁자들이 개인적인 접근을 중시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교의학의 논리적인 순서가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성향을 허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어느정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칼빈은 교회론 서두에서 교회는 개인 영혼의 어머니와같은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논리적인 순서상 교회는 개인 구원에 비해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서 탈피하지 못한다. 나중에 교회론을 다루면서 그 이름을 교회란 개인의 신앙과 경건의 배양을 위한 외형적인 수단과 도움이라고 말했다. 마치 교회를 개인의 신앙과 경건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 정도로 보는 경향이 엿보인다. 이에 대해서 판넨버그는 칼빈의 우선적인 관심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칼빈의 성화는 공동체 안에서의 성화의 과정이 아니라 개인 자신 안에서의 성화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접근을 시대적인 배경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도 그 시대에 속하였고, 그 시대의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 시대 속에서 그의 신학적 강조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로마 교회와의 대적으로 인해서 구원의 성화에 대한 면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가운데서 개인적인 관점을 부각시키는 듯한 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은 항상 개인주의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신학이 이런 헛점을 보일 때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극대화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칼빈이 교회를 강조했지만, 그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러한 전통적인 조직신학이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취약점을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재고가 필요하다.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논리적인 구조를 재고해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교회의 탄생과 함께 개인의 구원이 함께 이루어진다. 교회가 탄생하면서 개인 신자가 탄생하였다. 교회론의 맥락속에서 개인의 구원론을 가르쳐야 한다. 개인의 구원론은 교회론의 맥락속에서만 바로 가르칠 수 있다.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에 의하면 교회론 다음에 종말론으로 끝난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표는 세상의 선교를 위함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감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맞이한다.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의 최종 목표인 선교를 겨냥해서 우리들의 성화가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가 종교적인 면에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선교적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성화이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선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조직신학에서는 선교론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전통 신학 속에서 선교론을 발전시킬 자리가 없으므로 현대 선교론과 조직신학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敎會

선교론

구원

 

 

 

 

 

 

교회론의 문맥 속에서 개인의 구원을 동시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적인 맥락인 선교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문맥 속에서 신앙생활과 성화론이 고찰되어야 한다. 성경은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성령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 성화론적인 특별한 은혜, 구원론적인 특별한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젓붙임을 받는다. 성화를 공동체라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화는 단순한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다. 자기의 경건과 영적인 성숙에만 몰입하는 이기적인 경건주의를 자아낼 뿐이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뛰어나지만, 공동체의 삶 속에서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위의 논리적인 구조가 가지고 있는 약점에 있다.

 

1999년 3월 24일 강의

 

제 3 장 교회의 본질(The Nature of the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면서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다. 분명한 답변을 가지고 있는 지를 점검해 보자.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광범위하고 표현이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정의를 분명히 내리는데 어려움이 있다. 신약은 교회를 여러 가지로 묘사한다. Paul Minear는 그의 책 [Image of the Church in the NT]에서 96가지의 서로 다른 비유가 신약성경에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편지, 교회는 하나님의 집,(고전3:9) 그리스도의 신부(엡5:23-), 하나님의 친 백성(벧전2:9) 하나님의 권속이요 가족(엡2:) 여러 가지 이미지는 나름대로 교회의 본질에 대한 다각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키고, 교회에 주어진 은혜의 풍성함을 부각시킨다.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한 이미지 중에서 대표적인 세가지 이미지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살펴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이미지가 이 세가지 범쥐 안에 포함된다.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보자.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The People of God) - 신론적 관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를 이해함은 첫째, 교회의 구약적인 배경과 근거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교회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언약의 성취로 본다. 교회를 기본적으로 구속사적인 맥락속에서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교회는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그 근원을 추적해 낼수가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와해된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임시변통적으로 생긴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예수와 제자들이 고대한 종말이 속히 오지 않자 그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설립은 예수님의 본래 의도에는 없던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일 뿐이다. 그러나 교회는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교회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구약적인 배경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의 연속성을 부각시킬 뿐만아니라, 세대주의와 같이 교회와 이스라엘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 속에서 한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은 구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심의 연속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에서 교회를 이해하고 있다. 고후6:16에서 이를 언급한다. 저희는 나의 백성이요... 바울은 이 개념을 통하여 새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있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참(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한다. 롬9:28은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육신의 할례자가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 곧 교회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갈3:29은 믿는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한다. 갈5:10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라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서 계승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언약이라는 맥락속에서 옛 이스라엘과 교회를 연결시킨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공동체에 온전히 성취되었다! 새언약에 대한 언약의 말씀인 렘31:31-33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한 새언약은 옛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과 내용적으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새언약이라고 함은 특별히 모세 언약과 대조하기 위함이요, 아브라함의 옛 언약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더 온전히 성취된다는 점에서 새언약이다. 바울은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새언약을 말한다. 고후3장에서 새언약의 영광과 우월성을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서의 글을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법이 과거의 율법처럼 돌위에 씌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심령의 돌비에 새겨졌다고 말한다. 새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사 그 피로 구약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을 성취하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옛 이스라엘 백성과 새 백성을 대비하고 있다. 옛 이스라엘을 인도한 모세와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를 대비하면서 예수를 온전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소개한다. 베드로 서신에서도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교회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이방인의 교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렇게 신약성경이 교회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의도와 시도는 특별히 에클레시아라는 교회의 명칭을 사용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εκκλησια라는 단어는 εκ + καλεω에서 파생된 것으로 불러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주전5세기 고전 헬라어에서는 이 단어를 사람들, 시민들의 모임, 회집을 의미하는데 사용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 학자들이 70인역에서 구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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