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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국교회사 강의안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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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 19일 금요일 (1강)

한국교회사

The history of Korea

최덕성 교수

 

I. 한국 교회의 효시

1. 도마설

한국 기독교의 전래를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복음을 한국 땅에서 언제 접촉하게 되었느냐? 몇가지 이야기가 있다. 책들이 더러 나와있는데, 성균관대학교 역사학자가 기록한 우리 나라의 기왓장을 조사하고 영덕인가 영천에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도마 선교사가 와서 한국땅에서 복음을 증거한 증거다. 그 내용이 상당히 알레고리칼 하기 때문에 도마가 인도에 와서 우리 땅에 까지 왔었다고 한다.

남해에 가면 동네이름이 ‘도마’가 있다. 물건은 칼로 도마위에서 자른다. 칼이 한문으로 刀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와 같다. ‘刀 = ? = 토마스’라는 이론을 펴지만 증거가 빈약하다는 생각을 한다.

경주의 첨성대의 돌이 365개로 쌓여져 있다. 동방박사 세사람이 별을 관찰하는 그림을 받았다. 관찰하던 곳이 경주 불국사의 첨성대는 아닌가? 해학적인 이야기가 있다.

 

2. 임진왜란설

일본교회사에서는 한국 기독교는 일본이 전수해 주었다. 임진왜란때 소서행장(어거스틴)의 휘하에 세스떼스라는 선교사가 같이 왔는데, 그들이 조선인에게 영세를 준 것이 최초이다고 한다. 그때가 임진왜란이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일본의 기독교는 1517년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발로 카톨릭에서 일어난 것이 Count Refomation(반종교개혁)인데, 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제수익회인데, 카톨릭 교회내의 두교단이 있는데, 색깔로 표시하는데 브라운 칼라, 하얀칼라, 새카만 칼라 등을 표시하는데, 제수익 선교회는 서강대학교를 운영하는데 사제한사람 박홍씨이다. 제수익은 중세를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칼 사람들로 조직되었다. 익나디우스 로엘라, 사디에 등이 있다. 적극적인 선교정책과 운동만이 당시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종교개혁운동에 대해서 저지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해운력을 이용하여 1534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541년에는 싸디에르가 포르투칼왕의 요청으로 인도와 북경에 파송되었는데 1549년에 식민지 관료들과 갈등을 겪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싸디에르가 선교를 잘해서 일본인들이 상당한 인품을 지닌자들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일본의 상류층 사회를 공약하는 선교를 하였다. 일본 귀족들과 사귀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일본을 장악하던 통신수길이 예수회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침략하기에 앞서서 제수익 선교사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오사카에서 선교사 8명을 만나 이야기들을 했고, 중국과 한국을 점령하면 조선 전역에 교회당을 건립하여 신앙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고 한다. 동기가 정치적인 목적, 상업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왕의 이런 제수익 선교사들의 영향하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두 그룹 중 한그룹이 부산, 울산, 문경세제 등을 거쳐서 올라왔고, 다른하나는 소서행장에 의해 웅천을 거쳐서 올라왔다. 전자는 불교신자이고 후자는 카톨릭 신자였다. 기독교가 상당히 번성해서 군인들가운데도 소서행장 휘하에는 기독군단이라 일컬을 만큼 상당한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의 이야기로는 전략가들이 이 세력이 너무크면 또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위협이 되기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이 문화전쟁이라고 하면서 문화유산을 수탈하고, 도공들을 잡아가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그것만을 위함일까? 풍신수길이 소서행장 휘하의 카톨릭 신자들을 죽도록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산에 상륙한 25만중에 최소한 10%가 기독교 군사였고, 이들중에 소수만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소서행장의 군단앞에는 십자가 깃발을 달고, 뒤에는 예수회 신부들이 따랐다고 한다. 그들의 잔인하고 천인공로할만한 침략의 앞과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앞장섰다는 것이다. 죽은자의 귀를 짤라서 조금에 쳐서 일본에 수송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인들을 학살할때는 곱게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서울의 노면에는 굶어죽는자의 시체가 즐비했고, 나오지 않는 젖 때문에 울어대는 아이, 일본인들이 구토한 것을 먹으려는 쳐참한 조선인들을 향해서 예수회 신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당시의 쎄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같은 선교사들이 보고한 선교일지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쎄스페데스라는 사제와 일본인 신도 한사람을 조선에 파송했는데, 군목 비슷하게 군인들에게 참회고백을 위해 보낸 사람이다. 이 사람이 1594년 12월 28일에 대마도를 거쳐 웅천에 거처하면서 소서행장의 환영을 받고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추위속에서의 일본군졸들의 참회고백을 들어주었다. 그가 교구장 도멕스에게 보낸 편지속에는 조선인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선교에 대한 말도 없었고, 전란으로 인한 조선인의 수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당이라고 일컫는 군대의 장병과 주변의 기아에 지친 아이들에게 빵을 주고, 생수병의 물을 몇방울 떨어뜨렸다는 것이 나오고, 영세를 받고 죽은 신자의 수가 200여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한편으로는 그 무렵 북경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원군으로 온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오기전에 거기에 있는 카톨릭 사제들을 만나서 어떤 상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무슨 상의를 했을까? 한참 전쟁중에 갑자기 철군하였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원군으로 오기전에 예수회 선교사들과 만난 결과가 아니겠느냐?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소서행장 휘하의 군사들이 십자가 깃발과 로만 칼라를 한 예수회 사도들이 따라오면서 전쟁은 계속되었고, 사제들이 부대주변의 아이들에게 빵을 주었다는 것이 조선에 최초로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쎄스페데스가 과연 조선인 몇사람을 개종시켰는가?

달레의 ‘조선 선교회사’(최초의 교회사)를 썼는데 이 책에 쎄스페데스는 일본에 보낼 포로이외에 조선인을 돌볼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다 도망가고 도망치지 못한 어린애들만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인들을 데려다가 일본으로 끌고가서 그들이 그곳에서 카톨릭 신자가 풍신수길 이후 덕천다강이 통치할 때 카톨릭 박해를 하였는데, 순교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일본 카톨릭 역사를 빛낸 사람은 조선인들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로부터 수백년 후(1800년 말)에 일본의 불교식 절에서 그들이 묵주알을 돌리고 승려처럼 옷을 입고 하였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형태의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박해를 피해서 절을 점유하고 절 형식으로 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웠다는 것이다. 그런 형태로 일본 기독교 신앙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일본 교회사가들이 일본교회가 일본이 조선 기독교 효시이다는 것이 조선에게는 없다는 것이며, 세스페데스가 어린아이 몇사람에게 영세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복음의 증거, 교회의 시작으로 볼수있겠느냐? 대부분은 산으로 피하고 붙잡히면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물몇방울로 한국 교회의 효시가 될 수있겠느냐? 사실 그것으로 따지면 그것보다 훨씬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경교는 수백년전에 상당히 분명한 모습으로 한국에 왔다는 증거가 있다. 일본이 한국의 기독교 효시라는 것은 터무니 없다. 단지 이땅에 스쳐가 침략자들의 사무라이 기독교의 흔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 권력에 앞잡이 역할을 한 기독교가 정착을 했다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만약에 임진왜란때 완전히 점령해서 지배했다고 한다면 이 조선땅에 기독교의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까? 성공했고 전연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워져서 신앙했다면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 퍽 달랐을 것이다. 그러했을 경우에 등장하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정치가 교회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항상 침략자들은 선교사들을 앞세우고 선교사들을 이요한다. 정복전에 선교사들을 파송해서 정복지의 문화, 언어, 종교를 이해를 만들어 놓고, 침략을 한다. 이것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다. 선교가 단순한 선교가 아니라 늘 침략자들의 앞잡이 짓을 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를 침략자의 종교라고 반발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아리조나 주에 가면 포르투칼의 침략을 당했는데, 예수이름으로 침략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물러간 후에 인디안들이 1년에 한 번씩 페스티발을 하는데, 교회당을 지어놓고 화형식을 하면서 재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만약에 일본이 임진왜란때 완전히 점령하였다고 물러났더라면 우리 민족이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을까? 요즘도 세계 도처에서 선교사를 돌아가라고 하는 외침이 있다. 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첫째는 정치 앞잡이 역할을 하였고, 복음보다 문화의 우월감으로 문화가 복임인양 전해왔기 때문이다. 정말 선교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사의 문화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 나라의 사회악과 부패의 문제를 위해서 공헌도 해야하지만 정치 문제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19세기 개신교 선교시대라 일컫는데 마찬가지 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외국에서 선교할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과 문화의 그릇을 구분해야 한다. 복음 전도자의 과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훈합주의는 안된다. 찬송가를 부를때에 서양식 악기만 따라부를 것이 아니라 국악에도 맞추어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는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이라고 한다. 박자가 날좀보소 박자이다(?).

 

3. 경교설

경주 가보았죠? 경부 고속전철이 경주로 들어갈까? 들어가서는 안된다. 문화유적지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흉칙한 모습은 싫다. 경주는 최대의 문화유산이다. 쓸데없는 것 친다고 방원태가 뭐라고 한다. 낄낄낄······

 

석굴암 관음십일면상

만든때가 900년대, 즉 1000년전이다. 그러나 이것이 1000년전의 문화와는 다른 것이 있다. 인도 간다라 지방의 문화라고 배웠는데, 인도 간다라고 하는 곳이 본래 희랍사람들이 상업차 와서 정착하고 살았던 지역이다. 희랍식의 우상에 대한 개념에 이미지가 인도사람의 이미지가 서로 겹쳐져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석굴암 관음십일면상의 얼굴이 그곳의 이미지와 닮았다.

불교는 원래 석가의 상을 만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발가락만 그리다가 발달하여 뒷모습을 그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 그리스 사람들이 불교신앙을 가지면서 부처의 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관음 십일면상에 그려진 풍속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000년전의 우리 조상들은 그런 옷과 신발을 신지 않았다. 또 감로수 병이 있는데 그 또한 우리 조상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물건이다. 어떻게 그려졌는가? 이것이 폐르시아 문화유산이었음이 발견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이땅에 까지 건너올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1956년에 경주 불국사 벽면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이 발굴되어 숭실대학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것이 당나라를 통해서 몰래 들어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경교를 통해서 전달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경교(경교)는 빛이 나는 종교다.

 

네스토리우스주의,Deotokos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무엇인가? 핵심은 Deotokos이다. 신모, 어머니이다.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강조하는 사이에서 인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분이지 하나님을 낳은 분이 아니라고 할 때에,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신모설이 카톨릭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때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되된 것이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이다.

결국은 451의 칼세톤 공의회가 그의 생각을 다시 수용했는데, 그는 이미 이슬로 살아졌다. 그의 신념을 따랐던 시리아 지역의 교회들이 독자적으로 어떤 류의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데, 네스토리안주의이다. 이것이 인도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한때는 중국에 300명의 선교사를 보냈다. 이것은 기념하여 대진경교중국유행비(大秦景敎中國旅行碑)이다.

네스토리우스의 적수가 씨릴이었다. 씨릴이 네스토리안니즘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정치적 동기가 강하다.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긴장에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로마교구의 감독, 지금의 교황이다. 싸움은 동방교회가 하고 서방교회가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이단, 삼단이 결정된다. 씨릴이 많은 돈으로 서방교회를 로비함으로 씨릴판 공의회가 정치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판 공의회가 이단으로 정죄되게 된다.

이단의 정의가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정치적인 맥락에서 하지말고 그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하고 연구보고서를 쓰고 왜 이단인지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 신학적 정당성을 논의한 후에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이단시비를 함부로 할것이 아니라 신중하여야 할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가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칼세톤 공의회가 채택하였다. 인성에 관한 부분에서, 그 이후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역사는 상당히 종교혼합주의로 흐른다. 브리티쉬박물관에서 확인했는데, 중국에 불교화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사제처럼 생긴 그림이 있다. 참선할 때 앉은 모습 뒤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형태라고 여겨진다.

경교가 중국에 건너가서 635년 당태종때 태종의 호의아래서 상당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300년간 영화를 누렸으며, 그곳에 경교문화를 형성했는데, 그 교 이름을 빛나는 종교라 붙였다. 중국에서는 대진교라고 하였다. 교회당 이름을 파사교라 하였다. 파사사(波斯寺) 목사를 보고 대진승이라고 불렀다. 중국 문화와 토착화 했던 일련의 모습이다.

635년에 페르샤인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태종에게 들어가서 이야기했는데 신앙이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 여러곳에 파사사를 세워 이 종교를 믿도록 하였다. 온땅에 기독교가 확산되었고 가가호호 경교의 복이 충만하게 되었다. 그 다음왕때는 페르시야의 주교가 오고, 덕종시대때는 최고의 번성을 이루었으며, 대진경교중국유행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구원얻는 사람은 사명감을 가졌으며, 조석으로 예배를 드리고, 7일에 한 번씩 예배와 성찬식을 드렸고, 목탁을 사용했으며, 수염을 기르고 탁발을 했다는 등이다. 한편으로는 시리아어로 경교승 이름을 기재하였다.

영국의 학자 E.A.모르돈이라는 여자가 우리나라에 까지 왔다. 1917년의 일이다. 금강산 안에 장안사라는 절(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이 있는데, 경내에 대진경교중국여행비의 탁본을 가져와 똑같은 모양의 복사판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불교가 들어왔다는 확신때문이었다.

김양선 등은 석굴암 불상 뒷면에 페르시아 무인상, 옷무늬, 신발 등을 볼 때 경교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석류는 페르시아 과일이다. 어떻게 보급되었는가? 경교를 통해서온 것은 아닌가?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 300년간 번성하던 경교가 9세기 무종이 왜래종교를 탄압하였다. 경교도 탄압을 받았다. 987년에 어느 역사가가 여행중에 시리아 수도승을 시리아에서 만났는데, 그가 7년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을 한명오 만나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경교의 이름조차도 기억할 수 없을만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때는 우리나라 신라 선덕여왕2년이며, 경교비가 건립된때는 통일신라 경덕여왕때이다. 이때 당나라에 경교가 유행했으면 왜 우리나라에도 경교가 오지 않았겠는가?

300년간 경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중국과 많은 문화교류를 가졌다. 747년에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10000명의 당나라 군을 거느리고 티벳을 점령한 일이 있다. 그 외에도 신라사람들이 해상 해운력이 발달하여 인도양과 바다 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교가 중국에서 유행했다는 책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씌여졌다는 발견이 있다. 미륵불 사상(불교의 메시야사상)이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가? 이것은 경교의 영향때문이었을 것이다.

경교와 우리 나라의 관계를 발하는 문헌은 없다. 다만 발견된 유물을 보아서 추측할 수 있고, 무의식적으로 한국 사람 한 모퉁이에 경교의 영향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경교연구가의 주장이다. 어떻게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가 300년간 영화를 누렸던 경교가 박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었는가? 또 하나는 종교혼합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경교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결과의 요인은 아니었는가?

경교에 대해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경교와 한국 기독교의 관계에서 스쳐간 종교일 수 있다. 막연한 형태는 아니었겠는가?

 

1999년 3월 26일 금요일 (2강)

다음 주간에는 카톨릭과 카톨릭 수난사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II. 천주교의 한국 전래와 수난

1. 병자호란(1637)

개신교가 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동방교회 전통하고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접근하였다. 무시하지 않았다. 조금 아카데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카톨릭 교회 역사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 중세교회사도 로마 카톨릭교의 역사이다. 이는 종교개혁사의 전편중의 하나이다. 한국교회사는 종교개혁사의 후편이다. 한국 교회사와 한국 카톨릭사가 무관한 것이 아니기에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왕과 비’라는 사극이 있는데, 이는 과거 ‘설중매’의 재판에 불과하다. 사극들이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이끌고 돕는데 기여를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지나서 청나라와의 왜교관계를 하지않도록 고집하던 몇 사람 때문에, 광해군의 뒤를 이른 왕이 인조가 통치하던 시대에 오랑케라고 일컫는 청나라가 쳐들어 왔다. 남한 산성으로 피하였다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주종관계를 맺는다(1637). 지금도 남한산성앞에 비석이 있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해도 왜국에 항복선언을 한 적은 없는데, 수치스러운 역사이다. 사실 우리 정치가 명나라와의 의리를 생각하다가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케라고 조소하던 차에 당하게 된 수난이다. 청나라는 전쟁을 일으켜 돌아갈때는 인질을 끌고가서 국왕에게 연락한다. 백성들을 데려가라 올 때 사람머리당 쌀, 말, 천 등을 요구하였다. 우리가 어려워도 데려오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다. 백성을 향한 사랑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것을 들어 ‘속량’이라 한다. 이때 척화를 부르짖는 충신들과 어린 소현세자를 포로로 잡혀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1634년이다. 이때 소현세자가 예수회의 신부 아담 샬이라는 사제를 만나게 되고, 서로 사귐을 갖게 된다. 대청시현, 중국의 현관과 같은 직을 맡아서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는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상류계급에 접근하여 귀족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힘을 빌어 하류계층을 개종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소현세자의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고 세자가 귀국할때는 ‘성도정도’ 등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서양과학서적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어쨋든 소현세자가 2달후에 죽었다. 만약 죽지않고 왕권을 이어받았다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학질로 죽었다. 돌아와서 서양과학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천주교 보급에 대해서는 별관심을 갖지 않았다.

 

조선인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천주교 서적을 접한 사람이 있었다.

2. 이수광, “芝峰類設”(1614, “天主實義”(천주실의)), 이익의 “星湖사設”(성호사설)

이수광이라는 사람의 ‘지봉유설’이다. 이 책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논평하는 것을 담았다. ?의 천지창조, 세상주관, 교황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익의 ‘성호사설’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 윤리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리고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허균이다. 유학자들과 논쟁을 벌렸고 최초의 조선인 서교교인이 되었으며, 1648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사도제자를 죽인 영조시대에 서해에 살던 사람이 사학을 숭상하다가 제사를 지내지 아니한 탓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천주교 200년을 논하는 것은 이승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3. 이승훈: 최초의 한국인 영세자

이승훈은 1783년에 정조가 정권하던 시대에 중국에 사헌사로 갔던 서기장 이동욱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때 같이 동행하여 중국에서 북당이라는 카톨릭 교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세례명이 베드로이다. 1784년이다. 이승훈은 그저 피전도를 받아서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스스로 카톨릭 신앙을 탐구하여 자진하여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전에 그것이 위법으로 간주되었을때는 그라몽 사제가 물었을때에, 만약 그의 신앙을 비위로 간주하면 진리라고 확신하는 한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와 5년간 선교하여 약 4천명을 헤아리는 신자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 실제 카톨릭의 시작은 이벽으로 돌린다. 이승훈에게 카톨릭 신앙에 대해서 배우고 세례를 받아오라고 부탁한 사람이 이벽이다. 그래서 이승훈으로부터 이벽이 다시 세례를 받고, 이벽이 전도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인도하고 성례를 집행하였기 때문에 효시를 이벽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4. 이벽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종 등의 형제와 함께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교리강습을 하고, 이벽이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주일마다 모여 스스로 교회조직, 성례식을 행하고, 고해성사를 가졌다. 오늘날 이대목을 가만히 보면 카톨릭 교회의 교회설립과는 달리 오늘날 개신교 선교사가 개척교회를 하는 식이다. 카톨릭 교회가 제도적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척교회와 비슷하다.

 

한국천주교회의 효시

한국 천구교의 효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은 이벽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관 때문이다. 카톨릭은 사제가 교회이고, 평신도는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다. 교황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계급체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벽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카톨릭계 신학자는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민경배는 이 대목에서 이벽이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여 미사와 고해성사를 한 대목에서 사제의 역할을 다했다고 쓴다. 그러나 사제의 역할이 아니라 전도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아마 그 뒤에 이벽이 그쯤에라도 개신교회와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틀림없이 개신교회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민경배는 주로 카톨릭 교회의 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어쨋든 이 대목에서 한국 천구교회가 이벽을 중심으로 천진암에서 모여서 강학회를 하였다.

천진암 강학회

암자 비슷한 곳에서 모여서 철학자 즉 유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한문으로 된 ‘계’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서를 공부하던 가운데 그들이 추구하고 찾던 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종교적 실천을 했고, 모여서 예배하고 ?을 신앙했고 안식일을 가졌고 전도하였다. 그러면서 이벽의 친구의 친구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승훈이 영세를 받긴 하였지만 평신도였다. 평신도가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이벽이 또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행했다. 그래서 카톨릭은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국 연변의 과학기술대학의 김진경 총장이 철학을 가르쳤다. 상당히 진취적인 생각을 하는 분이다. 이분이 지금 미국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소속 선교사이다. 신학공부는 했지만 목사는 아니다. ‘성례집행 권한을 달라’고 하였다. 안주기로 하였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줄수도 않있겠는가?(최덕성 교수) 함부로 시행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가능하지는 않을까? 이런 것 때문에 침례교회는 꼭 목사가 안한다. 공동의회가 정한 사람(집사, 장로교회의 장로와 같다)이 세례를 베푼다.

 

어쨋든 이들도 학문연구의 일환으로 카톨릭을 접하게 되었고, 철학자가 진리 탐구의 과정에서 접하게 되었다. 이문제에 대해서 김성대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와 유교’라는 학위논문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의 첫 번째 순교자는 진고개에서 예배하던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5. 진고개, 김범우 수난(1785, 제1차 수난)

충청도 산골에 유배되었다가 김범우가 수주일후에 세상을 떠났다.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이 진고개있데, 현 명동성당자리이다. 주교가 곧 교회이고, 주교의 말이 한국교의 견해이다. 안중근에 대한 일제 제공하고 대신 얻어낸 것이 진고개 앞에 도로를 확장한 것이다. 현 명동성당의 광장은 안중근을 넘겨주고 받아낸 선물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김범우라고 한다. 명동성당을 볼 때 이 사람의 집이었구나. 명동성당을 지을 때 왕실에서 왕실보다 더 높은데 지었다고 해서 시비가 걸리곤 하였다.

 

두 번째 수난은 신해교란이다.

6. 辛亥敎難(신해교란, 1791, 제2차 수난)

영조의 대를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임금시에 해서지방과 관동지방에 서교가 보급되고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유교사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유혹하는 종교라고하여 참형이 내려졌다. 그래서 카톨릭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위해서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그런데 현재의 카톨릭교는 제사를 허락하였다. 신사참배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우상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다시 찬성하였다.

카톨릭교는 로마가 말하면 끝이다. 교황청이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천주교는 ‘문화적응주의’라고 한다. 이것이 카톨릭 선교의 파리 외방선교회(중국, 한국 선교)의 기본적인 신념이었다. 문화와 종교가 서로 적응하는 것이다. 카톨릭교 자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제사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조상숭배, 절하는 것은 다 우상숭배이다. 죽은 조상이라고해도 기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우상숭배의 형태가 아니라면.... 오늘날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추도예배, 그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세 번째 수난은 신유교난이다.

7. 辛酉敎難(신유교란, 제3차 수난): 황사영백서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세에 즉위를 하였다. 나이가 어림으로 뒤에서 왕후나 천정을 하였다. 영조의 젊은 왕후(정순왕후)가 수렴천정을 할 때, 천주교를 사학으로 정하고 어려움을 주었다. 신도들의 동등개념으로 조선의신분제도에 위협을 준다고하여 씨까지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없이 백성됨이 없다는 것이다. 이수봉, 정약종 등이 참수되고,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그러부터 30년간 사제없는 천주교가 되었다. 그후 순조도 빨리 죽었다.

응원군을 강화도에 유배를 보내고, 자부로 사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사건은 종교적인 이유의 박해라기 보다는 정치적 당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론과 노론이 대결하고,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가 노론의 힘을 빌려 집권하여, 남인 중에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학자가 있었는데, 정조가 집권하면서 남인계를 대거 등용하였고, 벽파와 시파로 다시 구분되어 벽파가 사도세자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는 등의 정치적 당쟁관계속에서 카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당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기독교가 비밀지하조직으로 유교적 질서를 파괴하고, 수평개념을 가진다는 문제로 사교로 적발 징치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세상은 바른일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이 사건이 있을 때에 남인 축출을 구실로 노론 세력이 득세하면서 신유교난을 일으켜서 많이 사람이 유배, 사형, 귀향갔다. 이때 황사형이 황사형 백서를 만들었다.

정약종의 사위이고, 주문부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북경에 있는 카톨릭 사제에게 국내의 상황을 보고하고, 순교자 이야기, 당쟁의 상관관계를 설명, 북경 지대의 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연락망을 만들어 달라. 청나라 황제로 하여금 조선이 천주교를 인정하도록 해달라. 청나라 왕실의 여자를 조선국왕과 결혼을 하도록 해달라. 이나라를 처들어 와달라. 그래서 천주교를 승인하도록 만들어 달라. 이 나라가 없어져도 거룩한 종교의 표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이 배가 뜨고 직전에 발각되어 전국이 발칵뒤집히고 천주교가 역도로 몰려 능지처참되었다. 순교자 황사영이 생기게 되었다.

기독교를 복음의 자유를 위해서 국가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거나 지연해야 할것인가?

중국이 삼자(자립, 자전, 자치)원리를 도입하였다. 정치적 차원에서이다. 중국인에 의한 자치, 자립, 자전이다. 이 배후에는 기독교인들이 때때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중국을 배신하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아편을 팔았다. 그리고 그것을 영국으로 가져오는 자는 철저하게 처단하였다. 그런데 영국이 이를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영국의 국교가 무엇인가? 기독교이다. 국각가 종교가 분리되어있지 않은 기독교 국가이다. 예수이름으로 재배하여 자국인에게 팔지못하게 하고 타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그때 중국인가운데 영국에 협조했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민족은 망해도 기독교 복음은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역사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중국의 교훈들 때문에 삼자원리를 철저히 시행한다.

황사영의 백서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애쓴 것은 이해가 가지만 나라를 해하면서 까지 그러려고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연구과제로 남는다. 교의학에는 정답이 있지만,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계속 배워야 할 것중의 하나가 초월적인 시각이다.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네 번째 기해대교난이라는 것이다.

8. 己亥大敎難(기해대교란, 1839, 제4차수난): 헌종의 “斥邪倫音(척사윤음)”, 정하상의 “上帝上書(상제상서)”

113명이 순교자가 생긴 박해이다. 교황청이 조선교구를 청나라 교구에서 떠나 독립된 교구로 만들려던 차이었다. 9000명의 신도가 확보되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이 정치적 이해관계가 겹쳐서 그 박해를 12년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앙벨 등의 주교가 숨어있지 못하고 관원에게 그 몸을 맡기고 1839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에 현종은 국한문 변용 교서 척사윤음을 발표하였다. 바른 학문의 연원을 말하고 천주교의 죄를 역사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내용은 예수가 가장 흉악한 죄로 죽었는데, 이를 믿는 종교야 말로 가장 사악한 종교가 아니냐? 이 종교가 어리석은 자를 유혹하고 하류층 사회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아 사교이다. 또 예수라고 하는자가 도깨비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고, 죽었다고 부활했다고 하니 말이다. 정숙과 덕을 위해 교인들로 독신주의를 조장하는데, 만고불변의 도리 즉 결혼하여 대를 이어가는 유교적 인간관의 핵심을 부정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종족이 그치고 심각한 위험이 닥칠 것이다.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였다. 왕실이 카톨릭을 이단이라고 하였다. 백성이 하늘의 덕과 자연의 법을 준수하기만 한다면 바른 길을 따를 수 있을 것이며 이단은 사라질 것이다.

이럴 때 정하상이라는 사람이 영의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상제상서’이다. 신앙고백서로 기록된다. 충효를 강조하는 것이지 기독교가 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불교를 공격하고 그렇게 함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하고 불교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경고가 왕실의 보호하에 중흥했다는 내용을 적고, 공맹과 주자사상에서 기독교가 빗나가시 않는다. 성경이 정통 고전서와 다름이 없이 하늘을 섬긴다는 내용이며, 천주교는 나라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아님을 왕과 왕의 애호와 자비에 호소하는 천주교인들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글이다.

황사영과는 매부지간이다. 1839.9.20일에 처형을 당했다.

 

9. 丙午受難(병오수난, 1846, 제5차 수난), 김대건의 순교

새남터에서 죽어간 조선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순교로 이어진다. 김대건은 충남 당진 사람이다.신부 모방의 권유로 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에 마카오에 유학하여 1845년 8월에 서울로 달려간다. 연평도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1843년 프랑스 함선 세척이 충청도 근처에서 닻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의 죽음의 원인을 묻고 있다.

김대건이 1846년 10월 16일 25세의 나이로 순교한 한국 최초의 성직자이다.

 

10. 丙寅敎難(병인교난, 1866), 불란서의 강화도 살상

대원군 치하에서 대원군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시대에 정치적 동학혁명으로 인한 시련, 경회루 건축으로 인한 어려움, 러시아의 침략하에서 천주교를 탄합해야만 하는 박해사건이다.

이것이 대원군이 나중에 신부 5명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물러가라 요청에도 끝내 거절하였더니 새남터에서 참형하였다. 이것이 불란서에 보고되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강화도에서 살상한다. 강화도의 귀중한 문헌들을 가져간다. 정치입장에서 보면, 떠나라하였을 때 듣지 않음으로 참형한 것은 당연하였지만 불란서가 인민을 죽이고 문헌을 훔쳐간 것은 문제가 있다.

한권으로 때제배와 맞바꿀 수 있는 수많은 고문헌들을 훔쳐갔다. 외국 박물관에 가보면 모두 훔쳐온 것들이다.

 

11. 辛未敎難(신미교난, 1871), John Rogers, 대원군의 척화비

1866년 8월에 미국 상선 저널 제널호가 약탈을 하다가 배가 불탔다. 배의 통역관으로 침략의 압장이였던 토마스 선교사가 죽었다. ‘그가 과연 순교자인가?’ 근연에 이만열 교수가 주도하는 역사잡지에 이에 대한 논문이 하나 나왔다. 한국 교회가 토마스 선교사의 피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가 순교자인가? 비평적 시각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때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를 위해 John Rogers 제독이 5대의 군함을 끌고 영종도를 거쳐 방성진에 들어온다. 이 배는 압서 말한 카톨릭 신부 리텔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가 앞잡이 노릇을 하며 들어왔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이 전쟁을 하였다. 미국의 가장 작은 전쟁. 미국이 참패를 하였다. 문책하려고 쳐들어 왔는데, 밤이 되면 이 배에 카톨릭신자들이 찾아가서 연락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다. 양의와 교류하는 자는 나라를 배신하는 자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제시되는 것은 기독교인이 때로는 자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스파이 노릇도 한다는 것이다. 박해를 하면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고민이 민족을 배신해야 할 것이냐? 민족을 배신할 수도 없고 박해도 견디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이 주어진다. 민족도, 종교도 배신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이 때때로 외적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으로 처형되기도 한다.

 

교회론적, 신앙고백적 메시지

천주교의 한국 전래의 수난에 있어서 설명을 했는데 요약하면, 수난을 통해서 등장한 주제가 무엇인가? 민족 또는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해야할 행동에 관한 것이다. 민족과 복음의 관련성 사이에서 기독교인이 처할 행동이 무엇이냐가 문제라면 그것을 주제로 쭉 엮어가야하는 것이다. 역사연구는 단순히 사건나열이 아니다. 큰 주제가 등장할 때 거기에 한줄로 꿰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조선 천구교인의 70년동안 수난이 고대 로마치하의 기독교인의 수난보다 적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로빈슨). 강의 자체도 서울의 새남터에 카톨릭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거기 가서 강의를 하면 더 좋다. 거기도 한 번 가볼만하다. 인상적인 사건은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포기하고 부인하라고 하니까?’ 순교를 자원하면서 칼로 자신을 자해하며, 나를 크리스찬이라고 말한 사진이 하나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이다. 순교하면서조차도 신앙을 유지하려고 했던 위인들이 많이 있다.

목회현장에서 카톨릭 교회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교리적 측면에서 이단적 요소가 있다. 근본적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와 교황을 중심으로하는 카톨릭 사이에 교회관이 다르다.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이단이냐의 문제는 숙제로 과제로 안고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1999년 4월 2일 금요일 (3강)

 

III. 개신교의 한국전래와 초기선교

 

개신교와 한국교회의 접촉은 박연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하멜이라는 화란사람에 의해서이다. 실제적인 개신교와의 접촉은 구추라프였다.

 

1. 칼 쿠츠라프(Karl Gutzlaff)

충청도 원산에서 한달간 복음을 전하였다. 중국인 옷과 모자를 쓰고 생기기는 서양사람이다. 독일의 할례대학 출신이다. 독일 국가 다음으로 많은 고용으로 가진 기구는 독일 교회이다. 마틴 루터와 관련이 있는 비텐베르그는 아주 작은 도시인데, 갈릴리 촌 사람들이 로마를 점령했듯이 비텐베르그의 시골 사람들이 독일을 정복하고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할례 대학은 ‘경건주의의 요람’이다. 헤르만 프랑케도 이곳 출신이다. 우리와 할례 대학은 무관하지 않다. 화란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로 1826년에 다시 런던 선교회에 적을 두고 선교사로 파송받아 중국에 와서 한문을 익히고 중국인과 통달하고, 일본인과 친해져 일본말 요한복음을 번역(1836)하기도 하였다. 경건주의와 선교는 무관하지 않은 관계이다.

구츠라프가 한국을 찾은 것은 황해도 장연지역에 도착하였다. 배의 선목으로써 통역인으로 왔다. 통상 요구에 실패하자 다시 충청도에 닻을 내렸다.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는 감리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한국 선교사 구츠라프]인데 이땅에는 아무 한적이 없다는 연구 결과이다.

원산도에 닻을 내리고 배의 사람들이 지방 관리들을 통해서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회답을 기다리던 중 남긴 문헌이 있다. 거기에 보면, 관리들이 자가용(가마)을 타고 다녔다. 천천히 행동하였다. 여기서 남긴것중에 원산도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고, 중국말 성경을 배포했는데, 일련의 사람들이 찾아와 교제를 하려고 하는데, 주기도문을 가르쳐주면 죽는다고 하였다. 죽음을 겁네더라는 것이다. 인상깊었던 것은 조선인 여인들의 얼굴의 침통하였다가 복음을 깨달으면서 밝아졌다고 보고한다.

외국 선교사들이 웃기려고 많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선교사가 산을 높고 물을 건너 전도를 하고 돌아오다가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달려드니, [오! 주여 내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더니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가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절에 가면 ‘해우소’라는 곳이 있다. 근심 푸는 곳=화장실이다. 선교사가 앉아서 근심을 풀고 있는데, 그런데 앉은 나무가 얇아서 풀다가 빠졌다. 그런데 팔을 벌려서 다행히 살았는데, 감사의 기도를 한다고 손을 모으다가 결국 빠졌다는 얘기 등이다.

구츠라프는 급하지 않고 주님께서 붙여주시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속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선박사정 때문에 한달만에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2.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최 남헌’이라는 한국명을 가진 사람이다. 1840년에 웨일스의 토마스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웨일즈에 가면 토마스 기념교회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다 찾아온다고 한다. 조그마한 대중교회이다. 그들은 토마스를 순교자라 말하지 않는데, 우리 나라는 순교자라고 한다. 대동강에 뿌려진 토마스의 피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런던 대학을 졸업하고, 켈롤린과 결혼하여 중국으로 왔는데 내리기전에 아내가 죽었으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성격이 괴팎하였다. 싸워서 사표를 내고 청나라 세관에 통역하는 사람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조선인을 만나 조선선교에 꿈을 가지게 되고, 다시 런던에 선교사 지원서를 내놓고, 선교사가 아닌 상태로 왔다가 황해도에서 배가 파선되어 다시 돌아갔다가 나중에 제너럴 셔어먼호로 대동강에 왔다. 이 배는 미국 상선인데 무장을 하였다. 조선이 수교를 거절하고 빨리 나가 줄 것을 요청했다. 식량을 공급해주면서 물러 가기를 바랬지만 약탈을 일삼지 조선들이 화공법으로 배를 불태웠다. 그때 토마스가 성경을 들고 배를 빠져나왔을 때 성경을 건네주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군인의 칼에 처형되었다. 그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다.

그동안 최초의 순교자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왔는데 과연 그런가? 토마스가 탔던 배는 침략 상선이었다. 토마스는 월급을 받았다. 항로 안내자였고, 통역자였으며, 선목이었다. 침략자의 앞잡이가 처형당했는데 순교자라고 할 수 있느냐? 죽기 직전에 성경을 건네주었다고 순교자인가?

토마스를 한국으로 보낸 윌리암슨이라는 사람이 요동지방에서 한국인을 만나서 서적을 주면서 진리를 말하고 대화를 하였다. 그가 남긴 글가운데, ‘조선인들은 결단력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조선에 지하지원이 풍부하고 수원이 편리하다. 그러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서양종교와 문명과 그것에 관한 가르침이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다. ‘대영 제국과 같은 나라들이 조선을 깨우도록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라고 믿는다. 전쟁이 악인 것은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사용해도 좋다’고 피력하였다. 강경한 선교 정책이다. 제국주의적 선교정책이다. 서구 침략주의적 선교론이다. 특히 국가교회의 체제하에 있는 선교회는 미국식 선교정책보다 침략주의적 선교방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19세기에 개신교 선교를 ‘선교의 시대’라고 한다. 아시아와 남미로 파송하였지만, 배후에 그들이 가진 정신은 ‘침략주의적 저책’이었다. 서양문화와 힘을 정당화하면서 피선교지 국가는 복음뿐 아니라 문화수용에서도 서양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선교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행히 한국 교회는 국가의 어려운 시대에 서양선교사들이 도와준점에서 기여를 하였기에 서양 사람들을 만났기에 많은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동양에서는 서양선교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로 갈 때 조심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 신학교 도서 관장으로 수고했던 선교사가 있는데 ‘데오도로 하드’이다. 이 사람이 한번은 일본하고 전쟁때 일본인이 죽는 것을 보고, 선교사되기를 각오하고 우리 나라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헌신, 봉사, 구제에 열정적이었다. 한국 사람들의 이상항 습관을 책으로 적어서 교육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백인우월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서양사람의 분위기를 나타냈을 뿐이다. 한 번은 거창지역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첫날에 전도사님과 같이 거창에 갔는데, 전도사님이 대접할것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물을 가지고 개울에서 가물치를 한 마리 잡았다. 요리를 하려고 하는데 선교사님이 갑자기 일어서서 전도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는 것이다. 동물애호가적 기질이었다. 그래서 사경회가 무산되어 돌아왔다. 그 다음주간에 학교로 돌아와서 강제 타협을 하였다. 수업료와 생활비 등을 요구하였다. 3년동안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할 때 양을 몇마리 사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양을 사주었다. 그후 진짜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에 또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3. 서상륜(John Ross & John McIntyre)과 이수정

최초 세례받은 한국인이 서상륜이다. 이 사람이 로스를 도와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선교사 위주로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인 위주로 하여야 한다. 서상륜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서상륜은 존 로스가 만주의 고려문에서 이응창과 함께 만나서 성경을 가르쳐 주면서 조선어로 대역하였다. 1882년 가을 심양에서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 ‘예수성교요한네복음선교’라는 쪽복음을 번역하였다. 로스와 맥킨타이어어는 계속 이런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예수성교말코보’와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1887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서상륜은 권서인(책을 권하는 사람)으로도 활동하였다. 남만주 지역에서 반포하였고 서울을 내왕하면서 공급하였다. 교통의 어려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일본에서 아펜셀러와 함께 조선으로 올 때 일본을 거쳐왔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해 놓았다. 놀랐다. 한국에 와보니 훨씬 좋은 성경이 번역되어져 있던 것이다. 선교사전에 조선인 성경이 있었다.

서상륜은 황해도 장련에 도착하여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이성하와 함께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소래’ 교회이다.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자생 교회이다. 내면적으로 스코틀랜드 선교사와 연관이 되어져 있다. 58세대중 50세대가 성도가 되었다. 서상륜은 중국과 교역을 하고 이응찬은 한약제를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일련의 과정통해 전도받고 예수 믿었다.

언더우드가 공식적인 세례를 집행했는데, 그때 이미 개신교인들이 있었고 언더우드의 지도를 받아가며 살았다.

이수정은 고종 왕비 민씨를 구해준 사람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민영익, 김옥균을 따라 도일하여 일본에 갔는데, 일본인 집에서 마태복음의 산상교훈을 보고 맥클레이, 루이스 선교사 등을 이쯔라가 접촉하도록 만들어 주면서 학문적으로 관심갖고 세례를 받고 예수믿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1884년 토를 단 한문성경 4복음서를 번역하고, 마가복음이 순수히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1885년 요코하마에서 1000부가 발간되었다.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언더우드가 이를 들고 한국으로 왔다.

역사에 의하면 1886년 5월에 귀국하자마자 처형되었다고 한다. 처형되기 전에 배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윤태목사(역사학자)에 의하면 귀국해서 병사했다고 한다.

 

4. 알렌(Horace Allen)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으며, 의사였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만 가는 의대, 법대, 신학대 교수가 전통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의사로서 중국에 와 있다가 한국선교사로 발탁되어 1884년 9월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의사자격으로 왔다. 그 후의 언더우드는 복음에 열정적인 경건주의적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복음전도에 열정을 보였다. 반면 알렌은 순리를 따른다고 하면서 의사로서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갑신정변때 의정국사건시 민영익이 알렌의 치료에 의해 살아났다. 그때부터 왕실에 개신교 선교사가 드나들게 되고 사랑을 받게되고 왕실의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우호적이었으며 밝은 빛을 비치게 되었다. 선교사역에 있어서 이런 사회와 민족과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 복음사역에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5.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이고,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였다. 1884년 4월에 부천에 상륙하였고 아펜젤로 부부는 들어오지 못하고 7월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 언더우드는 곧장 서울에서 복음을 전했다. 런던에서 출생,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번스 신학교(화란계가 세운 신학교, 서부신학교도 있음)에서 공부하였다. 신학교는 리폼드 계열이었으나 파송은 북장로교 선교부에서이다. 그 자신이 화란계이지만 어떻게 뜨거운 전도자가 되었는지는 연구해볼만 하다.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알렌을 도와 일했다.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사역했다. 당시 26세였다.

아펜젤러는 인천에 왔다가 다음에 왔다가 부인의 임신으로 입국을 보류하고 1902년에 목포로 가는 도중 난파로 죽었다. 장로교 교인이었는데 종교적 체험후 감리교로 전향하였다. 열정은 감리교인이었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다른 교파와 공존해야 하는데 감리교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소수의 짓굳은 신학자들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그 가운데는 열정적 전도자가 많다.

언더우드의 선교보고를 듣고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왔다.

 

6. 각 교파 주한 선교사들

장로교에서는 샤무엘 마펫이 있다.

윤치호라는 사람이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을 하였다. 지금도 윤치호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감리교 선교부에다가 200달러를 기부하면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놀라서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하였다고 한다. 윤치호가 1896년에 입국하였다. 귀족계열이었다. 테니스를 배워서 돌아왔다. 더운 여름날 테니스를 치고 있으니까 관리들이 와서 ‘그것은 종자들이나 하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직접 땀을 흘리시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외국인으로만 모인 최초의 주일예배가 1885년이었다. 솔래 교회에 이어서 선교사들의 교회가 생겼다.

1886년 4월 24일에 최초의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고, 한국인으로는 ‘노도사’(노충경)였다. 언더우드가 전도하여 솔래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금지된 상황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 한복판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많았다.

영국 성공회 소속 도르트 선교사가 제물포에 와서 최초의 성공회 교회를 세웠다.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데리스가 경상남도에서 선교하였다.

카나다 선교사 멕켄지 목사가 개인자격으로 내한하여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으며, 음식을 거침없이 먹으면서 선교하였으며, 함경도 지역에서 제임스 게일이 선교하였다. 최초로 한국말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도 전도하였다. 학자적 관찰력도 뛰어났다. 게일이 선교를 하는데 눈이 파랗고 얼굴을 하얗기에 한국인들이 따라다니면서 신기한 듯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지방관리인 목사가 문초를 하였다. 어디서 왔느냐? 카나다에서 왔다. 어디냐? 설명하였다.

침례교에는 말콘 텐 윅이 와서 언더우드를 도와서 선교를 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를 하였다. 지칠줄 모르게 순회하였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성과가 좋았다.

이때 일본을 통해서 안식교도 들어왔다.

성결교는 동양선교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들어왔다. 성결교 신학은 감리교에 바탕을 둔다.

구세군도 들어와서 사회악 방멸에 기치를 걸고 군복차림으로 선교를 하였다. 군복차림이었기에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의 역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희랍, 러시아, 루마니아, 이집트 정교회등이 이에 속하는데 개 국가단위의 독자적인 교회를 이루었다. 서방교회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동방교회를 그렇지 않았다. 동방정교회가 한국에 왔다면 그것은 한국정교회이다. 부산에도 대청동쪽에 있다. 정교회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많이 전도하였다. 우리 나라의 정교회 역사는 이만열 교수의 책에 조금 기록되고 있다. 나중에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교파주의 체제하에서 활동하였기에 하나의 한국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각 교파교회를 세웠다. 어떤 면에서는 교파교회를 확신하기 위해서 열심히하여 부흥한다는 점도 있지만 하나의 단점이기도 하다.

7. 선교지 구분과 선교 정책

선교사들끼리 이런 문제점을 교려하여 선교지를 분할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분할하여 경기, 강원, 충청은 감리교가 맡았고, 경북과 평안남북은 북장로가 맡았고, 함경남북은 카나다장로교가 맡았으며, 경남은 호주장로교가 맡았다. 전라남북은 미국남장로교에서 맡았다.

이러한 지역적인 분할이 한국교회의 분열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만열은 주장하기도 한다.

어쨋든 선교지 분할해서 하다가 하루아침에 교회가 감리교로 장로교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들이 통합을 시도해보았지만 알미니안과 칼빈주의가 합칠 수 없다고 확인하고 말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패하였다.

가장 성공적인 1945년 7월에 가장 완벽한 에큐메니칼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를 없애고 일본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에큐메니칼에 거부를 갖는 뿌리가 되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일본의 조그마한 교단이 NCC를 찾아와 일본의 죄악상-신사참배가 우상숭배였으며 이것을 강조하였음-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8. 초기 신앙형태

초기 신앙형태는 복음적이었다. 부흥회적인 형태와 감리교적인 성향을 가졌다. 신학에 빈약하고, 교회론이 약하고 사죄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였으나 영혼구원에 열정이 있었으며 정치와는 무관하였으며 합리성이 결여된 교회였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토양, 불교적 신비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유교적 경건주의와 어울려서 독특한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신앙은 은혜를 받으면 말을 안하고 묵상하는 형태이다. 한국사람은 ‘주여’가 튀어나오는 열정적인 모습의 신앙형태이다. 민족적인 기질과 관계된 것이기는 하지만 목사들이 너무 말이 많다. 신학이라는 것이 말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회의를 가지기도 한다.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언어로 표현됨을 넘어서는 직관적인 경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려고 한다. 하나님과 합일에 이루는 경지에 까지 들어가자는 갈망이 중세를 지배하였다. 그런 것이 경건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것이 종교개혁과 또한 무관하지 않다. 신학이 말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넘어서는 경지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이 가진 진리탐구의 갈망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에 대한 탐구열을 가지게 한것과 무관하지 않다. 왜 성경을 한국교회가 많이 읽느냐?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이 도를 추구하고 ‘아침에 도를 발견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열의가 복음에 대한 강력한 매력을 부채질 하였다고 보여진다.

 

9. 네비우스(Nevius) 선교방법 : 자치, 자전, 자립

핵심은 자립(self-support), 자전(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이다.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교회,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교회, 스스로 전도해가는 교회를 말한다. 그외에도 순회를 통한 선교사 개인전도, 개인 성경연구, 엄격한 훈련과 치리, 타교회간의 협조, 소송 사건에 있어서 타교회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 등이 있다.

다른 것은 거두절미하고 자립, 자치, 자전은 중요한 공식이다. 이것이 네비우스라는 선교사가 우리나라에서 전한 것인데 네비우스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선교이론가인 루파드 엔더슨(Rufas Anderson)이 내세운 이론이었다. 이 선교방법이 그후 100년을 지배하였다. 이 이론이 영국의 헨리 벤(Henry Venn)이 유사한 이론을 폈다. 선교회 총무로서 교회는 자치, 자전, 자립을 목표하였다. 1899년에 그의 책에서 말했다. 이 이론을 통해서 영혼구원을 강조하면서, 서구 교회의 선교제국주의의 침략적 앞잡이로서의 선교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교회를 주장하였다.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이 방법때문이라고 자주 말한다. 기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네비우스 선교방법만이 성장의 주요 원인일까? 한국교회의 성장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도, 네비우스, 성경열심 등을 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사람들은 열심히 안하는데 한국인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어려우니까, 지식이 부족하니까····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은가? 다른 나라에서는 네비우스가 효과가 없었는데 왜 한국에서는 효과를 나타냈는가? 이것보다 ‘한국인 자신들이 가진 문화적 요인들이 더 크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것이 바르지 않을까?

초기 한국교회를 연구하는 책들이 있다. The Korea Mission Field, The Korea Repository 등이 있다.

 

다음시간에는 한국장로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다음에는 일제시대 말기에 대해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1999년 4월 9일 금요일 (4강)

IV. 한국장로교회의 설립과 부흥

한국 장로교회가 한국 개신교회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 가면 침례교가 가장 많고, 다음이 감리교, 장로교 순이다.

 

1. 장로교단의 조직(1907)

교회직제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에서 기원한 개혁주의교회인 장로교제체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이다. 아일랜드는 수도원중심에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스코틀랜드와 합쳐져서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고, 장로회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미국의 북, 남장로교회, 카나다, 호주 장로교회가 받아들여 왕성하게 발전하다가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 4장로교회가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교회는 카나다 감리교회와 합쳐져서 카나다선교회로 바뀌었다.

경남권은 호주장로교회의 영향이 있었는데, 나중에 북장로교회로 옮겼다. 진주의 대동병원, 부산의 일신병원을 북장로교회가 세웠다. 데이비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남장로교회는 Thorowell이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남북전쟁당시 노예제도를 강조하며 다닌 사람이다. 북장로교회의 챨스 하지의 오점도 노예제도를 지지하였다.

 

교단조직

1907년까지 교단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1884년 시작한 선교회가 23년이 지나기까지 교단을 조직하지 않았다. 상당히 교회 성장이 더디었다는 것이다. 장로교단이 1907년에 조직되고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한국인들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갑자기 부흥하였다.

교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 말기의 꼭두각시였던 일본교단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라고 선언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서 하나의 일제말기의 국가 권력에 의해 통합되어 교단으로 형성하였다. 일본 폐전후에 각기 분리되었는데, 교단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Presbyterian of Church in Korea(고신)이라고 쓴다. 화란개혁교회는 Reformed Churches라고 쓴다. 총회단위의 교단을 이야기할때는 -es의 복수로 사용한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조직되기도 전에 조사(助師), 영수, 집사 제도가 있었다. 영수는 집사와 조사의 중간 계층정도 된다. 우리나라에는 독특한 ‘권사’제도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것을 계급시하는데, 이것은 다만 직무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장로, 집사, 서리집사 등의 제도가 있다. 성경에 서리집사, 권사, 영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하고 있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제도가 꼭 2000년전의 것과 같이 할필요는 없다. 교회 본질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신학교육

선교사가 들어온지 20년이 경과된 이후에 신학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다. 신학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해야 교회가 부흥하는데, 왜 이렇게 오랜세월후에 시작했을까? 1902년에 6명의 신학생이 있었으며, 1년에 3개월 신학교육을 받았고 9개월동안 조사로 봉사를 하였다. 그래서 공부를 5년만에 마쳤다. 이것이 장로회연합신학교로 발전하였다. 40명의 신학생이 있었으며, 1907년 7명의 신학생이 1회 배출되었다. 감리교도 따로 합성신학교를 세웠다.

선교사들이 가르쳤는데, 얼마나 한국말을 잘 하겠는가?

장로교 연합공의회가 선교부공의회, 장로회 공의회로 1907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라는 것으로 생겼다. 이때 한국인 장로 36명, 4개 선교부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이 참석하였다. 찬성회는 교단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노회만 참석하는 목사(YMCA 등). 이해 7명을 목사로 안수하고 선교지로 보냈다. 특히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보내졌고, 마지막에는 순천노회에서 목회하다가 죽었다. 순천 노회내에서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역자는 이기풍밖에 없었다.

 

신조·신앙고백서

독노회가 1907년에 신경 제정을 마무리하고 채택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경은 ‘12신조’이다. 헌법책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본래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한 신앙고백서를 모방하여 수정후 채택하였으며 선교사 주도이다. 내용은 칼빈주의와 함께 복음주의적이다. 성경의 무오, 창조, 타락, 속죄, 성령의 말씀, 예정론, 성례, 신자의 본분, 부활과 심판 등의 내용이다.

특이한 것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였지만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적오도 1970년대 초반까지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를 제일 먼저 채택한 교단은 고신교단이다. 이는 화란 31조파라는 작은 교단과 자매관계를 추진하면서 거기서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이 무엇이냐?’에 따라 12신조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그래서 부랴부랴 채택한 것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이다. 합동측도 맥킨타이어에게 도움받기위해 채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회가 적어도 자신이 믿는바를 지성적으로 체계화해서 고백하는 수준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한국 교회는 지성적 자기 관리가 부족한 상태였다. 고신교회는 원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본이 완전하지 못하였다. 원본에 보면,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는 말이 나온다. 지금은 없지만···· PCA교단에서는 이를 빼고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 교단도 필요한 부분은 첨가하였다. ‘성령론과 선교론’을 첨가하였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자체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간명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유익한 것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필요는 있다.

 

1907년부터 5년후에 191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된다. 221명이 모여서 언더우드 목사를 회장으로 뽑고 산동성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당시 노회는 7개이고, 당회는 134개이고, 미조직교회는 1920개였다.

 

2. 초기 선교와 성장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성장 - 감리교회도 같다 - 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에서는 ‘기도’라고 한다. 카나다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고 하기도 한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내던 해에 일본의 폭도에 의해 빈비가 살해되는 무렵, 한 나라의 왕후를 침략자가 살해하는 것은 불행한 일중의 불행이다. 이때 선교사들이 조선 왕조의 친구가 되어주고 불침번을 서주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정의감을 가지고 민족의 시련에 동참하였던 것이 교회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상당히 처음부터 3세계 선교지와는 달리 민족의 친구로서 선교사들이 역할을 하였다. 좋은 감정을 갖는데 기여하였다. 많은 나라들이 선교사를 물러가라는 상황인데도 한국에서는 서양선교사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증가하는데, 환경적 요인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환경적 요인

기독교를 찾는 사람중에서 보호와 힘의 획득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라의 위협에서 서양선교사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국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였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권위자를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베이튼(재세례파 후예, 종교개혁사의 대가)이 은퇴를 한 후 특강만 할 때, 역사공부의 흥미를 갖게 되었다(최덕성교수). 라또렛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선교사의 대가이다. 자신을 침례교 선교사라고 생각하였다. 라또렛이 한국교회에 대해서 쓰기를 ‘한국교회가 격는 비운 때문에 정서적 안정을 위해 교회를 많이 찾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선교방법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 3자(자립, 자전, 자치)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발전하였다. 간하베의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도 보기도 하여야 한다. 그러나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교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다른 외국에서도 많이 적용되었지만 별 열매가 없었다. 지금도 이런 방법이라고 해서 교회가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이 도움을 주기는 하였어도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종교적 진공성

당시 뚜렷한 종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교도, 불교도, 샤머니즘도 아니다. 한국의 토작 종교는 샤머니즘이다. 그런 정서속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방방뛰는 것’을 본다. 서양사람들은 대체로 부흥한다고 하면 조용한 편이다. 침묵이 주이다. 흑인 교회의 정서가 우리와 비슷하다. 서글픈 한을 토해내는 듯한 분위기이다. 그래서 백인식의 기도방법이나 종교적 표현을 한국교회 모델로 삼는 것도 문제가 있고, 종교적 열정도 평가해 보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의 심성속에 그런 점이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재례 종교가 부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보고는 불교도 왜래 종교이고,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바라를 지고 구걸하러 다니는 것(수행의 한 장면)으로 보고, 중놈왔다고 하니 ‘놈’은 욕이라는 것을 알기에 천대받는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불교도, 유교도 별로라는 생각에 종교적 진공성을 말하였다. ‘한국 교회 성장사’라는 책이 있는데, 서명원이라는 사람이 썼다. 이런 책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조직적 반대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기대

민경배의 생각이다. 메시야적인 구출과 동시에 일어난 부흥운동에 맞추어 교회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교회로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

 

애국·애족적 동기

왕실의 비운을 생각하면서 예수믿고 기도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는 생각에서이다.

 

개화목적

이승만의 입교 동기가 성경과 천로역정을 읽고 들어왔고, 남궁억 등도 이승만의 전도로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문화적 개화가 학교, 병원 설립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개화와 일치한다고 해서 기독교로 옮기게 되었다.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한국말 발전의 기여가 크다. 교회가 나름대로 신문 반행, 회보 발행하면서 한글에 대한 인식이 높아갔으며, 일제말에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기구가 교회였다.

 

그런데 ‘과연이런 것들이 한국 교회가 성장하게된 주요 요인이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요인들 중에 뚜렷한 것을 하나 말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교수님의 시각에서는 앞의 것들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수용하고 개종하게 된 동기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있지 않겠는가? 다른 나라에도 다 있는 것인데 왜 한국에서만 그렇게 부흥이 있었는가? 한국인만의 ‘영적 갈망’이 아닐까? 道를 찾을 수만 있다면....

영적갈망

‘영적 갈망’이 아닐까? 道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한국인의 종교적 갈망이 주요 요인이 아닐까? 도를 찾고자하는 영적 갈망이다. 그래서 카톨릭이나 개신교 시작이 공히 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첫째는 문화적 요인, 둘째는 역사적 요인이다. 역사적 요인은 신사참배를 통해 경험했던 신앙적, 신학적, 민족사적 측면에서도 기독교가 뛰어났다. 또한 문화적 요인에서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진리이해인데, 진리 이해하는 개념자체가 기독교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인데, 한국인들이 유교전통주의와 기독교 개혁전통이 서로 만나는데 진리관에서 만나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라는 것은 ‘Fixed 고정되어있어야 한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진리이며, 오늘의 진리는 내일의 진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Immutable 불변해야 한다‘ 진리는 변해서는 안된다. ’One 하나여야 한다' 둘이면 진리가 아니다.

다른 진리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리를 반대로 이야기한다. 고정되어져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진리가 변한다는 것이며, 하나가 아니라 항상 여럿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이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도 쉽게 야합하고 변한다. 진보주의자들이 많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이들은 ‘진리라는 것은 Precarious(변할수있는), diffuse(퍼뜨리다)하다’고 한다. 진리는 불편하고 고착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불확실하고 산만한 것이지 고정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주의자들이 갖는 진리관이다.

현대 진보주의자들 : 종교다워주의 뿌리가 있다. 포용적이다.

보수주의자들 : 배탁적인 진리관이다.

둘다 문제가 있다.

철학에서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정합론, 진리대응론, 진리가치론이 진리 판단의 척도이다. 진리가치론은 진리라면 실용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 이것은 차원이 다르다. 주로 진리 대응론과 진리 정합론에서 진리를 다룬다. 진리대응론이라는 것은 객체자체가 찾아와서 이야기해주니까 그렇게 대응해서 나와 객체사이에 진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진리 대응론은 객체를 중시한다. 전통주의 진리론은 대응론적을 따른다. 진리 정합론은 칸트의 인식론과 더불어 발전된 진리이론이다. 진리란 고착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객체가 나에게 정보를 주기 때문에 대항해서 진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아느냐? 칸트의 인식론의 핵심-순수이성비판-은 지식의 능동성이다. 칸트이전의 사람들은 지식이 수동적으로 대응해서 결론을 얻게되었지만, 칸트는 그렇지 않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가 객체에게 다가가서 ‘무엇이다’라고 판단내렸다는 것이다. 지식이 거기서 형성되었다. 객체라고 일컫는 모든 것은 하나의 무형의 뚜렷하지 않은 인지 덩어리인데, 나라고 하는 기본적인 범주(12범주와 시·공간의 범주)들이 이성적인 판단의 기능이 종합적으로 찾아가서 분석을하여 결론을 유출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살았으면 컴퓨터를 가지고 설명하였을 것이다. 컴퓨터는 프로그램 된대로만 일을 한다. 칸트는 생각할 때 인간의 인식기능이 프로그램되었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것은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석을 하려면 내가 가지고있는 것만큼만 분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14범주에 의해 맞추어져 있는데, 여기에 따라 분석하고 인식해야 진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나’라는 것이다. 물체는 무형의 인지덩어리인데 나라는 주체가 판단하여 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란 오로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진리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변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사상계를 지배하는 인식론적인 구조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파라다임은 진리의 객관성을 많이 강조한다. 다른 것은 진리의 주관성을 많이 강조한다. 자기 사상은 항상 옳고, 남의 사상은 판단되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 입장이 전통주의자들의 파라다임이다.

 

한국 교회가 성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화적 요인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구도에 있고, 전통주의가 들어왔을 때,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바탕위에 던져졌을 때 반응과 성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99년 4월 16일 금요일 (5강)

3. 1907년 대부흥운동

한말 기독교역사의 큰 세 사건

1) 1907년 대부흥운동 2) 3·1운동 - 민족, 사회, 이웃 향한 3) 1935년 신사참배 운동

한국 사회 정치적 좌절, 일제 탄압, 을사보호조약, 일제의 수탈과 착취, 정치의 무기력함 등 이런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 부흥운동이다. 사실 이 대부흥운동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전세계를 휩쓴 사건이다. 영국의 웨일즈에서 시작하여 구라파, 북미, 아시아 등등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대영적각성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다. 민족의 암울함에서 일어났다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다.

John Sung(宋相節) - 미국 유니온 신학고, 중국 내륙 돌아다니며 전도, 대부흥운동 일으킴, ‘불타는 전도자’였다.

1903년의 원산의 장로, 감리, 침례교 선교사 성경공부 및 부흥 집회 M.C. 와이슨 방문(여선교사), 원산 창전교회 부흥집회,

R. H. 하디 - 의료 선교사, 집회 중 은혜 받음, YMCA 파송 선교사, 1898년 남감리교 선교사, 거듭난 경험도 없고, 전도에 결실도 없어 고민하였다. 전도한 한국인이 거듭난 체험하는 것을 보고 아주 부러워하였다. 고민중에 이 집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성령체험하였다.

1904년 A. Robb이 큰 은혜 받음. 4개 연합장로교단 집회에서 길을 걸어가면서 기도하였다. 한국인과 함께 전도하며 아주 열기가 뜨거웠다.

부흥의 핵심인물이 ‘하디’였다. 하디 선교사가 초청하여 서울에서 집회하였다. 평양에 있던 20여명의 선교사들이 열심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였다. 1개월을 기도했는데 별 응답이 없다.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소수가 계속 기도하였다. 1907년이 되기 직전에 시골교회에서 기 현상이 일어났으며, 1907년 1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교인 700명이 모여 부흥회를 하였다. 수양회 일주일내도록 성령을 기다리도록 기도하였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다가고 1500여명이 회집한 가운데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그런데 별 반응이 없었다. 이 밤이 지나면 각각 자신의 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시간에 그 교회의 유력한 장로인 길선주씨가 일어나서 죄를 자백하였다. ‘나는 아담과 같은 죄인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영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1년전에 친구가 죽으면서 친구가 부탁하기를 재산을 정리하고 처리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관리중 상당한 양의 재산을 착취하였다. 미화 100$이었는데 이것이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 같다’고 회개하였다. 그러자 무겁게 짓누르던 장해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서 회중은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밤7시에 시작한 회개가 새벽 2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런 이후에 날마다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정결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셨다.

이에 대해 마귀의 역사냐, 성령의 역사냐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장대현 교회의 장익현 장로가 기록하기를 ‘길선주장로의 얼굴은 성결하였다.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나는 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이길함 선교사가 다음주일 밤에 설교후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20여명이 함께 기도하였고 온 성도가 함께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래함 리의 말이 사람들이 죄의식을 경험하고 죄를 자백하고 온 청중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 음행의 죄, 절취의 죄 등등이 회개와 용서의 무드가 일어났다. 또한 이일을 구경삼아 왔다가 회개하고 예수믿게 되는 역사도 일어났다. 어떤 이는 자신의 죄로 경찰을 찾아가 죄를 처벌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고발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풀려났다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조차도 영적인 일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일들이 있었다. 부흥의 불길이 한국 전체로 퍼지고 공부하는대신에 부흥회하고, 숭실대학은 정상 수업을 하지못하고 기도와 참회의 역사가 일어나는가하면, 서울·평양·원산·폭포 등의 학교로 계속 이어졌으며 교인들도 폭발적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교회당이 좁아서 2,3부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해 10월에는 평양에서만 4천여명이 세례 받고, 5만여명이 회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향아 확산되어져서 1907년에 장로교회에 큰 사건이 있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시작되고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목사안수를 위해서 노회가 조직된 것이다. 그중에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산동성에 한국 장로교회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곳의 스코틀랜드 선교사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사역하였다.

각 교단마다 성령의 역사가 이어져 갔다. 전국을 성령세례의 역사가 휩쓸었다. 가정제단, 눈물, 선교사 파송, 죄를 고백하는 일들이 또한 헌금을 내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순수한 영적인 운동이지만 도덕적 운동으로 이어져서 평양시내가 주일이면 상점이 문을 닫고, 술집이 운영되지 않고, 깡패가 회심하는 영향등이 있었다. 이것이 선교사와 한국교회 사이에 상호 이해를 도왔으며, 공동체적 무드를 조장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부흥운동과는 달랐다. 그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회개하는 일들로 인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칼빈주의적인 통찰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성령세례를 받기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모하고 영적 부흥을 갈망하고 말씀보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중에 일어난 것이다.

1950년에 고려신학교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날 박윤선 교장이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통회하며 자복하는 일들로 수업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다. 동시에 2해 전에 있었던 경남 법통노회안에서 일어난 대각선 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주남선 목사가 경남 노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길창이라는 사람이 노회장이 되었다. 그 직전에 과거사의 문제로 두달간 자숙하기로 작정하였는데 자숙도 않하고 설교하다가 다시 노회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비를 걸자 김길창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의 봉사목사인 친일파 하수인 비슷한 사람이 신사참배와 불참배의 별차이가 없다는 똥바가지 사건을 일으켰다. 그것이 고려파가 분리되어지는 상황에서 오히려 신사참배자가 기가 등등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노회장으로 김길창이 물러나고 주남선을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노회장 취임 메시지에서 신사참배자를 욕하고 비난할 줄 알았는데, ‘옥에 있는 여러분이나 밖에 있는 여러분이나 지키느라고 수고많았다.’ 그랬더니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통회하고 회개하였다. 이것이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어지고 고려신학교 부흥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초량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집회를 하였으며, 제주도까지 가서 집회를 인도하며 부흥운동이 확산되었다. 이것이 삼팔선 이남이라고 되찾은 것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고신의 초창기 부흥의 운동에 관해서 상세히 살펴볼만하다.

 

 

V.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1.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

한 교회가 그 교회의 구심점으로 삼은 신앙 혹은 신학은 그 교회의 초기에 신앙을 심어주었던 개척자들에 의해서 설정된다. 초기 교회가 어떤 신앙을 가졌느냐가 정통이 되어진다.

 

청교도적

한국 장로교회 초기 신학은 첫째 청교도적이었다. 이 신학은 북미 장로교를 통해서 건너온 사람들이 주도적이었으며, 카나다·호주·남 장로교회도 이 신학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경건한 삶과 정통 신앙 - 우리 교단의 이념 중의 하나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다 - 이다. 정통 신앙이 무엇이냐?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를 말한다. 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학이 칼빈주의적 신학이었다. 그래서 화란 개혁파교회는 정통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건주의적, 청교도주의적 요소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서 제일 바람직한 모델이다. 로이드 존슨은 감리교적 열정과 칼빈주의적 신학이 결합될 때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 사실 청교도들은 이를 결합시킨 사람들이었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청교도적 경건과 개혁파 정통주의적 신학이었다. 바람직한 형태의 신앙을 전수받은 것이다.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이 청교도형 인물들로써 뉴잉글랜드 선조들이 100년전에 시행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불경건한 것을 금지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들이 빠져서 안되는 죄악들을 멀리하도록 가르쳤다. 신학과 성경 비평학에 있어서 강력한 보수주의적 입장, 전천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한국 교회가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수용했는데 일제말기에 고난속에서도 인내하였던 것은 이것 때문에 위로받은 것이다. 원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은 세대주의적 종말과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한국 개혁주의 선교사들과 목사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연구해 보라.

 

복음주의적, 성경적

이때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은 복음주의적한 이들이었다. evagelical(복음주의)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에 따라 개념이 다르다. 독일 복음주의는 개신교를 말한다. 루터파 독일교회를 말한다. 영국에서의 복음주의는 존스타트, J.A. 페커를 중심으로 국교회에 소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복음주의는 퓰러신학교 등은 학문적으로는 문을 열어놓고 진보적인 신학도 받아들이고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트, 리폼도, 카버넌트 신학교는 우리 학교와 신학입장이 같다. 그냥 보수적(개혁주의)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를 모델로 삼는 경향이 복음주의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졸업한 신학교는 프린스톤, 맥코믹, 샬 알셀모(현,센프란시스코), 뉴욕의 뉴니온, 뉴욕, 리치몬드의 뉴니온 신학교 등을 나왔다. 이학교들이 다 진보적인 경향의 학교로 탈바꿈했다. 신학석사과정(Md.V.)은 이런 학교에서는 유익하지 않다. 석사과정은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학교가 고려신학대학원이다. 선교사들이 북장로, 남장로에서 주로 왔으며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이 복음주의적이었으며, 성경적이었다.

 

근본주의적(1920)

근본주의라는 말을 한국교회사에서 자주 사용한다. 장신계나 한신계의 신학자들이 고려파를 근본주의라고 사용한다. 신학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1920년대 용어이다.

Auburn Affirmation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다, 성경이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 등의 항목이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고 믿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장로교 목사 1200여명이 싸인하였다. 교파를 초월하여 전통적 기독교인들이 책을 발간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근본주의 5대 교리를 발표했는데 이것을 믿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하였다. 반대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고려파, 합동 등이 근본주의가 맞다.

 

개혁주의

당시에는 사실 개혁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칼빈주의라고 사용하였고, 장로주의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 개혁주의의 신학이었다. 그것이 12신조에 나타난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와 평양신학에서 나타난다.

 

1999년 4월 30일 금요일 (6강)

2. 조선장로교신학교와 ‘평양신학’

평양신학교의 공식 이름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였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로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별명이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는다. 최필근 목사로 인해 다시 세워진 학교도 조선장로교신학교였으며, 목사가 아닌 교회사(뉘우치도록 가르치는 선생)를 양성하였다. 일제의 교사로 양육하는 학교였다. 속칭 최필근 신학교라한다. 최필근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많은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썼다. 교회를 배도의 길로 가게한 인물이었다. 최필근 신학교가 1939-45년까지 계속되다가 광복이후에 또 다른 이름의 평양신학교로 개편되어 최필근은 월남하고 이북 5도 노회의 신학교로 3차 출범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에 이성휘 목사(구, 평양신학교 교수)를 주축으로 공산당 아래의 신학교로 바뀌었다. 그 아들 이 바울은 유명한 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평양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또 문을 열었다. 학생을 3년마다 한 번씩 받아들인다. 50여명이 졸업한 것으로 보고된다. 장로교 형태의 신학을 가르치고, 교회 정치도 장로교 형태를 가르친다고 한다.

요즘 평양신학교 다녔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의심스럽다. 여러종류의 신학교인데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오늘 우리가 공부할 신학교는 38년 문닫기 전까지의 평양신학교이다.

평양신학교가 신학교육을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장로교 신학,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1920년대의 용어로는 근본주의라고도 한다. 기본적인 신학 사상은 개혁파 정통주의라고 한다.

개혁파 정통주의 Reformed Orthodoxy = Calvinism

칼빈과 칼빈주의는 다르다. 칼빈의 사상을 보다 더 세밀하게 체계화해서 너무 지나칠 정도의 의심을 받을 정도로 체계화한 것이 칼빈주의이다. 칼빈은 heart와 성령을 중시한 반면, 칼빈주의자는 head와 신론을 중시하였다. 지금의 칼빈신학교의 리차드 밀러 교수는 이 분야에 대한 논문을 많이 쓴다.

개혁파 정통주의가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기초였는데, 그 당시 까지는 개혁주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주로 칼빈주의라는 말을 썼다. 1930년대부터 잘 나타나지만 주된 신학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 삼고, 성경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형태의 신앙이었다.

박윤선 박사가 논문에서 이에대한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다. 칼빈주의는 고도의 지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당시 평양신학교의 교수도 학생도 그것을 이해했겠느냐는 것이 논지였다.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의 수준이 상당히 낮았다. 윌리암 블레어는 Ph.D.를 마쳤으나 나머지는 명예박사가 대부분이었다. 수준이 좀 낮고 학생들도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지 않았다. 수업도 년간 5개월 교육이었고, 나머지는 목회현장에서 사역하는 형태였다. 당시 문헌에 보면 학식있고 돈이 있는 이들은 평양신학교 수준이 낮아서 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교회 환란이 왔을 때 그런 사람이 다 친일파였다. 한명동목사를 제외, 한목사는 중앙신학교를 나왔다. 패전이후에 참회선언을 했는데, ‘우리가 전시중에 황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였다. 1967년에 참회고백문을 내었는데, ‘전쟁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 이상한 것이다. 지식이 높았던 이들이 배도의 길을 많이 가고, 우직했던 이들이 한국교회를 빛내었었다. 주기철 목사같은 이도 있었다. 비록 수준은 낮았지만 칼빈주의가 수준이 높은 사람만 신앙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박윤선의 그러한 말이 환영을 받지 못했다.

평양신학교의 신학 사상은 칼빈주의였다. 박윤선 교수가 별세하기 2년전에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청교도적 칼빈주의가 정통 신학이다’라고 하였다. 화란계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썼다.

 

그러나 평양신학교의 칼빈주의는 열정칼빈주의였다.

열정 칼빈주의

칼빈주의가 냉냉한 것만은 아니다. 칼빈이 성령과 심장을 강조한 것을 볼 때 열정이 있는 신학사상이다. 신학교육 자체가 이성적인 훈련만이 아니라 Heart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체계적으로 신학을 가르쳤고, 선교사들이 글도 많이 썼다. 「신학지남」지를 내기도 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은 실천신학의 ‘곽안련’, 조직신학의 ‘그레인’, ‘박형룡’이 있었다. 특히 그레인의 조직신학(김규남 역)은 한국교회의 조직신학을 정형화한 것이다. 그레인은 미국 남장로교 출신이며, 순천노회의 노회원이었다. 그가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한국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려면 그레인의 책을 읽어야 한다. 다음에는 박형룡이 있었다.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프린스톤에서 공부하고, 켈터기 푸이빌의 루이빌 신학교(침례)를 졸업하였다. 박형룡 신학의 대부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하지이다. 하지의 조직신학이 있다. 하지 역시 독일의 자유주의 풍토하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후 자유주의를 공격하면서 주관주의적 신학을 배격하고 성경중심의 객관주의적 신학을 정립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평양신학(평양 Theology)를 형성하게된다. 개혁주의를 근간으로 하지만 평양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는 유형으로 반전한다. 열정 칼빈주의이다. 월간고신에 ‘평형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적이 있다.

 

3.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그러던 중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였다. 한국장로교회안에 보수적 칼빈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이른바 자유주의가 등장하여 교회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1897년에 한부선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암은 ‘성경의 무오성을 절대적으로 믿지않는 선교사가 선교부안에 있다’고 함으로 신학사상의 다양성을 보이고 있었고,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있었기에 자유적이고 유화적이었다. 서고도 선교사가 이의 영향의 받았다. 스카트와 맥도날드와 같은 이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192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카나다 교회로 합쳐졌다. 카나다 교회의 총무가 지난해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개인적인 신앙을 표명한 것이다. 교회가 신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려된다. 카나다 교회는 한국의 기독교 장로교를 지지하고 있다.

 

김장호 사건

1918년에 김장호 목사 사건이 일어났다. 윌리암 커의 조수역할을 하였다. 윌리암 커는 신신학자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장호가 신신학적 설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첫 번째 이단자로 단정되어 쫓겨난 후에 제명되었다. 그 후에 조선 기독교회를 창립하여 황해도 경기지방, 충북 충주 지방에 상당수가 있었다. 중국 길림성에 길림신학교를 세웠다. 김장호는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반선교사, 반서양적 기독교’를 내세우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주의적 교회론을 표방하였다. 이 사람의 민족주의는 일본을 말한다.

민경배의 민족교회론의 뿌리가 어디 있느냐? 민경배는 동지사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구마모토 기독교 전통을 따른다. 일본의 남서쪽의 조그마한 반도가 하나있다. 일본기독교의 뿌리가 세 개-구마모토, 삿뽀르, 장로교선교사에 의한 기독교-있다. 구마모토는 선교사가 양학교를 세워 영어를 가르치면서 성경을 가르쳤다. 거기서 예수를 믿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의 학생은 무사계급이 많았다. 정치적 맥락속에서 이들은 몰락하였다. 몰락한 이후에 몰락한 무사 계급을 위주로 일본을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개혁을 시작한 것이 서양의 기독교적인 것을 중심으로 천황제도와 기독교를 합작시켜 일본식 기독교를 가지고 일본 정치를 개혁하려는 구마모토 기독교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것의 열매가 일제 말기의 천황숭배이다. 황도기독교이다. 형식만 기독교이고 내용은 신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의 황제주의가 핵심이었다. 이 들이 그 후에도 서서히 몰락하여 거기의 학생들이 대부분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하여 목사, 교수가 되어 교회사 학부를 형성하였다. 동지사 대학의 교회사 학부는 구마모토 전통을 따른다. 일본민족주의다. 교회를 일본군국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혼합주의적 기독교이다. 기독교라는 것은 그 기독교의 특징이 ‘국가가 있고 교회가 있다. 국가가 없이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이해한다. 나라와 함께 자기가 일하는 회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의 성경을 이해한다. 일본식 민족주의를 민경배가 배워 그것을 한국식 민족주의로 살짝 바꾸어 놓은 것이 뿌리이다.

김장호 사건은 김장호가 일본식 기독교를 말하고 성경과 과학이 조화를 이루어야 되지 무조건 성경적으로 옳다고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선교사의 교회론을 비판하고 백인교회라고 몰아부쳤다. 설교내용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바닷물이 썰물현상으로 물이 빠질대 건넌 것이라고 말하고 애굽군대가 바다에 침몰한 것은 만조때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이가 내어놓음에 감동되어 어른도 내어놓음으로 남은 것이라고 비과학적인 것을 믿지 않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않고 고등비평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비난하고 종교는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을 등지면 종교는 미신주의로 흐른다. 기독교가 성경을 하나남의 친필로 쓴 것이니 일점일획도 변개하지 못하는 것으로 믿기에 성경에 없는 진화론을 믿지않고 과학을 무시한다고 우겼다. 과학을 알았다면 진화론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기독교는 구마모토 기독교 전통과 흡사한 것을 가지고 있다. 에큐메니즘을 주창하고 교파나 파벌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예수도 하나이니 예수교도 하나여야 하겠고, 통솔자도 예수이외는 없다’고 하였다. 동양적 기독교는 철저히 일본식 기독교였다.

그러면서 국가를 사랑하고 국권을 신성히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황국의 시민이 된 것을 감헌해야함을 자주 하였다. 진보주의자들이 일제말기에 친일파 노선을 걸었다.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적 친일파 사상의 연관성을 강하게 발견하는데 민경배는 애써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승산없는 싸움이다. 여러 사건들이 진보주의의 인식론적 구조가 모호한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쉽게 강한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김장호가 이런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김장호와 김익두가 씨름을 시작하였다. 황해노회의 목사 안수를 하려고 강학린이라는 사람을 목사고시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김익두 목사가 시험 위원이 되었다. 본래는 아닌데 일부로 김장호와 대결을 위해 김익두를 집어 넣었다. 김익두가 강학린에게 먼저 물었다. 사실은 김장호를 고발하는 논고를 펼친 것이다. ‘성경을 믿겠는가? 과학적 해석을 따라 믿겠는가?’‘성경대로 믿겠습니다’ ‘사람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 무결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이에 대해 김장호가 반박하여 물었다. 강학린이 당황한다. 목사 문답에서 떨어졌다. 김익두와 김장호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1918년에 황해노회가 모일 때 김장호가 개회 설교를 하였다. ‘기독교의 말세학’이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종말론에 쐐기를 박고, 비유문학일 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익두가 벌떡 일어서서 ‘말세가 없다는 것이 어느 성경에 기록되었느냐?’고 물었다. 김장호는 문자적으로 종말이 없다는 것을 말했다. 노회가 수라장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선교사가 노회를 진정시키면서 하는 말이 재미있었다. 북장로교 피득 선교사는 ‘김장호의 말이 옳다면 그리 믿을 것이고, 김익두가 옳다면 그리 믿을 것이지 서로 싸울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한부선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암이 ‘각가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것이니 그리할것이요, 여기서 싸워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후 김장호는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이 당시에 교회안에 이미 자유주의적 경향이 들어와서 교회가 소요를 일으킴을 말해준다.

 

서고도 사건

1920년에 함흥에서 성경학교 사건이 일어났다. 20여명이 서고도(스캇트 목사)의 성경해석이 그 이전에 선교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해석임을 우려한 나머지 계획적으로 강의중에 중요한 부분에 대한 성경해석을 요구하였다. 한기춘이 ‘왜 하나님이 아말렉을 다 멸하도록 허락하였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서고도가 ‘이스라엘의 편견이니 진실은 아니다’고 하면서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급전도사들이 탄식을 하면서 이 중학교를 어떻게 이런 날날이 같은 선교사에게 맡길것인가를 탄식하였다. 그후 김관식(해방후 고신을 장로교에서 재거하는데 앞장선 인물)등이 유급교역자를 모이게하여 성경관, 종교관을 자유주의적 신학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그때 조희영목사가 성경전체를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을 잘못이다. 성경에는 문자적 오류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하자 상당히 무리가 일어나 장도원 목사가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끄집어 내렸다. 자복을 강요함으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조금 조용해지자 서고도가 강의하는 시간에 ‘공자와 예수를 비교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기세끼와 학두루마리를 어떻게 감히 비교하라는 말인가?’라고 불쾌감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주먹을 치니 강단이 갈라졌다. 이를 갈면서 서선교사를 향하여 응시했더니 좌중이 박수를 보냈다(김양선의 기독교 해방 십년사). 이때 배운 전도사, 장로가 실망하여 다른 침례교로 넘어가고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굉장한 소란을 주었다.

 

창세기 저자 문제

모세가 창세기를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나중에 사과를 받는 문제가 일아났다.

여성의 교회 내의 지위 문제

여자가 왜 목사, 장로가 될 수없느냐는 김충배 목사의 제안으로 일어난 것이다.

 

4. 김재준과 박형룡

아빙돈 주석

이방돈의 주석(자유주의자의 출판)을 당시 장로교 목사가 참가하여 번역을 하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사과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점차 성경관의 문제가 교계내에 일어났다.

 

김재준과 박형룡은 기독교 신학의 양대산맥이다. 박형룡의 규범신학이라고 한다면 김재준의 신학을 맥락적 신학이라고 한다. 맥락에 따라서 말과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맥락적 신학이고, 규범에 따라서 만사를 판단하는 것을 규범신학이라고 한다. 맥락적 신학은 상황신학과는 차이가 있다.

김재준이 신학을 공부하고 왔지만 당시는 주일학교 강습회만 갔다와도 대학교수를 하던 시대이다. 김재준은 많은 공부를 하였다. 프린스톤에서 1년, 웨스튼 신학(피츠버그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신학)교에서 졸업할 때 학위를 두 개를 받았다. 김재준은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박사학위자를 수하에 많이 거느렸다. 귀국후 평양의 어느 성경학교의 교사를 하였다. 그래서 1935년1월호 신학지남에 권두언을 썼다. 이것때문에 김재준과 박형룡의 갈등이 시작된다. ‘나는 전통주의로 통조림된 한국장로교회에 숨을 터주어야 함을 느껴··· 한국교회가 수준이 낮고 너무 전통주의이고, 신학교육이 직업학교이고 생각할 여유, 자유도 없고, 자기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입식이어서··· 세상을 악한 장망성으로 보고, 성경을 정확무호하다고만 믿는 것’을 말함으로 공격하였다. 이외에도 성경의 여러 가지등의 글이 총회에서 문제화 되었다. 총회안에 장로교신조(12신조) 제1조(성경관에 대한 것)에 위반하는 것임으로 이런 이가 교역자 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결단을 내렸다. 창세기저자문제, 교회내 여건문제 등이 김재준과 연결되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김재준을 불러놓고 전권위원회에서 심문을 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예, 그렇다고 믿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였지만, 그 배후에 바르트의 사상관이 있다는 것을 안 박형룡은 그것을 문제시하여 총회가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성경관

성경관문제로 김재준이 문제시되어 곤혹을 겪고, 유학을 하고 왔지만 교수도 못되고 하니 신학교를 따로 세워 가르칠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38년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의 힘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목표가 황실에 충성하는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설립목적이다. 그리고 한신대학 50년사를 읽어보면 일본 황국에 충성하는 기독교 교역자 양성에서 조선교회에 충성하는 기독교 교역자 양성으로 바꾸어 버렸다(역사 날조이다).

 

박형룡 신학과 김재준 신학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사를 읽어보라. 박형룡은 전통적이며 호전적, 변증적이기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김재준의 신학은 “Neither Theology"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신학이다. 바르티안 성경관이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에서 신정통으로 바뀌었다. 어떤면에서는 바르트와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라는 신학자체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주의는 고정되어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반면, 상황에따라 바뀌는 인식론적 모드를 가지고 있기에 어떤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신학이 김재준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학이다. ‘잘 모르겠다’ 신학이다. 박형룡은 거기에 비해서 "Pot Planting Theology" 꽃꽂이 신학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적절하게 하나의 화분을 만들 듯이 겪어 엮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형룡 신학이 고신과 연결되어 있다. 박형룡을 고신이 교장으로 청한 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을 가르쳐야겠다고 하는 의미로 모셨다. 박형룡이 고신에 있었으면 지금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형룡의 기여로 합동측이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박형룡의 신학이 다른 나라의 신학을 옮겨온 것이지만 당시로는 그 역할을 잘 감당한 것으로 평해야 한다.

민중신학이 등장함으로 생각히 달라지기도 하였지만 해방신학과 근본적이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다.

 

박형룡 신학은 규범적 신학, 김재준은 맥락적 신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전통과 신전통주의, 고려파와 기독교장로회, 성경무오설과 성경유오설이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1999년 5월 7일 금요일 (7강)

VI.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배교

이 사건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과거사 세우기 부재로 교파가 분열되고 한국교회 전체의 저변에 아직도 친일파적 기질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형식 지상주의이다. 지난 해 주기철목사 복권사건에서 극렬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그리고 도덕 불감증, 사회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의 부재, IMF사태 등의 큰 사건에 커다란 사건에는 기독교인들이 연류되어져 있는 실정, 다음 기독교 역사상 복음은 항상 창조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말기와 중세암흑기에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그와 같은 상태에 도래해 있다. 한국교회가 크게 번창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과 함께 도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이 모든 것이 신사참배와 관련이 되어져 있다.

이것은 신학적, 역사적으로 통찰함이 없이는 오늘 교회의 문제에 답을 할 수 없다. 앞서가는 사람은 대중보다 의식이 앞서야 지도를 할 수 있는데, 교회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역사바로세우기, 과거사 청산문제에 대해 입을 열고있지 않다. 이런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황민화 이데올로기 Japenization

피침략국의 정신을 일본정신으로 오리엔테이션 속인으로 만드는 작업니다. 문리적 뿐아니라 정신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민족 정신, 언어, 문화만아니라 정신적으로 일본 것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일제정책이다. 상투자르기, 개량옷 입기, 창씨개명 등등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의 최후이자 최강의 수단은 신사참배라는 것이다.

매월 8일에 황국의 국민은 신사앞에서 절을 해야 했다. 우선 가서 절을 90도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친다. 경의를 표함, 기도를 한다. 이것이 제일 간단한 형식이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기 직전에 일본의 천황신, 조상신, 잡신들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 행위가 일어서서 동방을 향해 절을 하고 기도하고 국민선서 낭독하는 등의 절차였다.

문제는 ‘그것이 제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느냐’, ‘국가의 의무사항이고 국민의례이냐’가 이슈로 등장한다.

사실 신사라는 것이 한국의 천황당 사상과 비슷하다. 정녕숭배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모든 만물에 신이 있다. 이것을 일본이 교리화 했다. 그래서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이후에 신도주의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도주의에 변화가 왔다. 일본 왕실이 하늘님의 후손이다. 그래서 일본의 왕은 성육한 하나님이라는 사상이다. 기독교의 성육신의 교리와 비슷하다. 일본 천황은 하나님이고 인간 형상으로 온 하나님이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 일본인들이 있다. 정령숭배가 신도주의를 형성했는데, 황실이 신으로 연결되어진 신의 후손들이고 팔굉일우 사상으로 세상을 일본이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은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는 나라가 있고 교회가 있다. 나라가 없이는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 기독교는 일본 천황이 교회의 주였다. 하지만 95년 전후를하여 교회의 주가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여 주장되어지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신사참배는 손뼉을 세 번치고, 절하고 기도하고 황국신민선서하는 의식과 함께, 신도주의 침례교가 있는데 물에서 잠수를 하는 것인데 신도사제가 집행한다. 하기 전에 일본의 천황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는 신앙고백을 해야 신도식 침례를 받을 수 있다.

일제말기 한국기독교 목사들은 다 신도침례를 받았다. 대표가 김길창 목사이다. 한성여대, 부산신학교, 남성여고, 개성여상 등을 만들었다. 김길창의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돈이다.

 

2. 신사참배의 이교성과 제의성(祭儀性)

일본식 침례를 ‘미소기 바라이’라 한다. 그것과 함께 신도주의가 아주 강력한 종교적 제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치유신 이후부터 종교의 신도와 국가 신도로 구분하였다. 국가의 돈으로 보호를 하고 지원을 하고 수단으로 삼는 국가 신도와 정통적 무속적 신도로 나누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이를 강조하는 이들은 국가의 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의 치하에서 로마의 신들을 섬기면서 동시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과 똑같은 사상이었다.

강조할 것은 제의성이다. 이것은 국민의례가 이나라 제의적이었다. 일본 기독교 각교파가 종교성을 가진 우상숭배라고 못박고 있다. 우상숭배임을 강조했던 이들은 한국교회를 지켰던 “선지자”들이었다. 한국교회사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파악해볼 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해석이 어디로부터 왔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이지유신때 일본이 국가신도와 종교신도를 구분하였다. 내용은 똑같다.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라고 기만작전을 썼다. 그래서 1938년 27차 장로교 총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오, 국민의례인줄 알고 솔선하겠노라’고 하였다. 배교 신앙고백서였다.

그러한 ‘신도는 종교는 아니다’는 해석이 교회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교회밖의 존재가 결정한 것인가? 교회가 신사참배를 해야될것인가를 누가 한 것이냐? 교회 스스로 종교가 아니다라고 검토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인가, 아니면 외부의 파워에 의해서 결정한 것인가? 구체적으로는 일본국가가 그렇게 결정을 하였다. 교회가 국가가 결정을 내린 것을 교회가 그대로 수용하였다. 어떤 문제가 드러나는가?

한국장로교회가 그것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국가가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그것이 제 일계명을 거스리는 행위일뿐아니라 ‘국가가 있고 교회가 있다’는 일본식 체제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신학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신앙을 교회가 아니라 국가가 결정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문제는 정교분리의 문제이다. 교회론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정교일치의 문제로 왔다는 것이다. 왜 국가가 우리의 신앙을 간섭하느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기본적인 외침을 하지 않았느냐?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외치기는 하였지만, 지금까지 해방 반세기가 넘어도 이 문제를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문제로 조망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항거를 해야 할 것이 우상숭배이기 때문만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목숨을 걸어야 했던 사건이다. 이 문제를 분석할 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정리하면 신사참배의 제의성의 문제(제일계명)만 아니라 강요하는 것을 국가가 해석하였기에 항거하는 것이 교회의 당연지사였다.

교회가 신앙해야 할 바를 국가가 결정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교회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국가가 관여해서는 안된다. 종교적 제의성을 지니고 있는 사건이기에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투쟁을 했어야 한다. 종교개혁가들은 전적으로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이후에도 국기에 대해서 절하는 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였다. 손양원목사가 앞장섰다. 문제는 지금이라도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서 명료한 답을 내려야 한다. 전원호라는 목사(벨지움에 가 있다)가 ‘국기경례는 괜찮다’고 하였다. 종교적 제의성이 확실하면 거부해야 한다.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국기우상주의가 나오면 반대해야 한다.

시온산 제국이 있다. 경북지방. 대한민국정부의 실체를 부정한다. 태극기안의 음양무늬가 종교적이라고 해서이다. 태극기가 동양철학적인 이미지가 담겨있다. 연구해 보자.

 

3. 한국교회의 우상숭배와 백귀난행(百鬼亂行)

백귀난행 : 백가지 귀신이 저지른것과 같은 난행을 교회가 저질렀다. 민경배는 교회속한 소수의 친일파 무리들이 했다고 하지만 교회가 한 것이다.

 

김선두의 신사참배 반대 활동

김선두는 장로교 총회장이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운동울 한 사람이었다. 일본각료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설득하여 기독교인들이 조선총독이 한국교회가 반대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왔다. 친일파 무리들이 김선두 일행이 성도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에 장로교 총회라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면, 일제가 일단 물러설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압장서서 신사참배하기로 결정하였다.

불가피하게 위협을 가하기에 했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가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책임을 조직기구로서의 한국교회뿐만아니라 신앙공동체로서의 한국교회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 배교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삼엄한 공기속에서 친일파 등에 업혀서 배교한 것이기도 하다.

평양친목회, 서울 기독교협의회가 있어서 교회내의 친일파 인사들이 공작을 해서 끌고간 것이다. 교회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다. 삼엄한 공기속에 있었지만 한국교회가 자의적배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불경죄에 가깝다”

홍병선이라는 목사가 ‘청년’이라는 잡지에 글을 썼다. 일제해방되기 마지막 7년동안의 잡지는 배교이단적 잡지였다. YMCA중심으로 나왔다. 홍병선이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님’이라고 글을 썼다. ‘조상숭배니까 마땅히 한국 기독교인들이 행해야 되고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는 자는 불경죄에 가깝다’가 주장하였다. 그정도로 한국교회에 배교적 목사들이 스스로 압장서서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솔선려행(率先勵行)

지금까지도 익숙한 말이다. 솔순수범. 일제가 우리에게 준 단어이다. 신사참배는 공택기 이름으로 발표된 장로교 성명서에 ‘솔선여행키로 결정함’으로 끝맺고 있다. 일제의 강요, 불가피론, 한계상황론, 목구멍 포도청론 등으로 정당화될수 없다. 당시 교회가 친일파가 주도해나감으로 스스로 솔선여행하기로 하고 실지로 솔선여행하였다. 7년간의 한국교회 역사는 배교의 길로 들어섰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1936년부터 기독교 학교들이 곤혹을 치르는 가운데, 1938년부터 심각해 지고 일제가 강요하니까 그 강요아래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강압을 할 때에 자유주의자들과 친일파주의자들에 의해 한국 교회 자체가 스스로 한 것이다. 이미 평양친목회 등의 친일파 단체의 이해 신사참배가 조율되어져 있었다. 각본대로 통과시켜 신사참배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한계상황론, 불가피론, 삼엄한 공기론 등으로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친일파에 의해 자의적으로 시행하고 배교한 것이다. 한국교회 자체가 참회해야할 과제를 확실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4. 신인공노(神人共怒)할 무시무시한 죄악상

신인공노할 무시무시한 죄악상을 한국교회가 범했다(최훈의 ‘한국교회 박해사’). 주기철목사 사건, 주기철 목사의 어머니 어제선 여사가 평양 산정현 교회 목사관의 헛간에서 얼마간 살다가 쫓겨났다. 같은 선생밑에서 공부한 사람이 순교하고 무시무시한 죄악을 저지르는 일을 한국교회가 행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는 교회가 쫓아내었다. 그리고 이기선 목사는 스스로 사표내도록 강요받았고, 주기철 목사는 목사 파면을 당했다. 일제도 깜짝 놀랄만하게 솔선수범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지에 나오는 말이다. 친일, 배도, 백귀난행을 저질렀다.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도 죄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우상숭배에 반대하지 않는 것도 죄인데, 우상숭배 하지 않는다고 면직시켰다는 것은 엄청난 죄악상이다.

손양원목사는 여수 애양원에 있다가 감옥에 들어가니 가족은 남해에서 숨어 살았다. 둘째 동인은 애양원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화동 옥종면 북방리에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다. 가족을 거지 만드는 백귀난행을 저질렀다. 신사참배 안한다고 고발하는 사건등이다.

일제말기에 배도하고 우상숭배하는 조직기구보다는 한국파 왈도파 공동체가 진짜 교회이다. 교회라는 조직기구는 교회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본질은 신앙고백이다.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 반인도적 처사 등이다. 한국교회가 민족 배신의 죄를 저질렀다. 끔직한 사건이다. 이 문제에 대해 광복이후 단 한마다의 참회 고백이 없다. 신사참배 문제도 1954년에 과거사 청산의 문제로 1938년의 결정을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행정적인 실수의 문제로 보았다. 죄의 문제인데, 참회를 해야하고 통회를 해야할 사건임에도 행정상 실수로 보았다. 그것은 죄상가죄(죄위에 죄를 더한 사건)의 사건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참회문이나 반성문이 없다.

일본교회는 1995년에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과거사 청산의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회개할 조짐은 없고 강단교류, 문화행사, 집회 등에 관심을 쏟고 있다. 한국교회사는 친일파 위주로 쓰여 졌다. 한국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재건파의 최덕지 여사(최초의 여성목사, 자유주의에 관계없이 한국교회에서 전래를 남겼다)였다. 현존하는 조수옥 여사도 귀한 분이다.

 

1999년 5월 14일 금요일 (8강)

당시의 교회가 정말 교회인가? 특히 민경배 같은 이는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슬기로 살아남은 교회로 묘사하는데, 정말 교회인가?

우선 신인공노할 무시무시한 죄악상을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 천인공노한다. 최훈목사가 쓴 ‘한국교회 박해사’에 나오는 용어이다. 한국 교회가 무시무시한 죄를 범했다. 무엇일까? 첫째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신사참배라는 우상에 대한 죄이다. 그 다음에는 교회가 민족을 배신하는 일이다. 일본교회는 일본민족을 위해 존재하지만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를 위한 것인데 이를 배신했으며, 셋째는 여러 가지 백귀난행을 저질렀다. 김득황이라는 이가 ‘한국종교사’에서 쓴 것이다. 백가지 귀신이 저지른것과 같은 난행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교회가 침략전쟁에 일조하였다. 교회안의 소수의 무리가 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지도하에서 여러 가지 일을 저질렀다. 전쟁에 일조하였으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러 내몰았고, 정신대문제를 기독교 지도자들이 전쟁에 나가서 일익을 감당할 것을 말했다(김환란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문제가 이화여대사에 문제가 되어서 메이퀸 행사 자체가 중단된 것으로 되어졌다.

‘한국 기독교’라는 주제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세미나를 하였다. 달라스에서 온 백인 교수가 김환란에 대해서 연구발표를 하였는데, 아주 환상적인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때 최교수가 ‘당시 김환란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나가도록, 일제 군인을 위한 창녀로 나가도록 주도하고 설득하고 민족을 배신하고 한국인사이에서 메이퀸 행사가 중단된 것으로 아는데,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반응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충격을 주었다. 그런면에서 연세대학교의 김낙준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면서 ‘일제를 위해 젊음을 불태울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상명여대의 이사장 송숙선도 친일파였으며, 모윤숙, 주요한 등도 친일계 인사들로서 일제를 위해서 부르짖었던 이들이다. 전쟁에 나가서 생명바치고, 정신대 나가도록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최근에 이를 위해 연구하는 이들이 있다. 김승태가 그 사람이다.

한국교회안의 소수의 인물이 백귀난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 교회당을 종을 때어다가 전쟁무기로 쓰도록 갖다 바쳤으며, 한국교회가 비행기를 사도록 돈을 주어서 ‘조선장로교비행기’라고 이름을 부치기도 하면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민족사로 보아도 심각하지만 교회가 악을 위해서 헌금을 바쳤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승리축하예배, 나라를 위한 기도회, 예배 드리기 전에 천황숭배라는 황국요배를 하고 기도하고 황국시민 선서를 읽고 요란을 떨었다. 그리고 대구 제일교회, 남산교회 문헌-당회록, 주보 등-을 참조해 보았는데 기가막힌다. 교회당을 통폐합시켜 하나를 교회로, 하나는 팔아서 전쟁에 쓰는 등의 난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사가 삼엄한 공기론을 제기하면서 마지못해 했다고 하면서 참회고백, 성명문하나 채택한 적이 없다. 문제는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신참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그것이 가결되게하기위해 준비하였고, 교회가 가결하고 친일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교역자들은 사직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목사등이다. 우상숭배하지 않기에 혼란스럽게된다고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압력을 가하기에 신앙을 지키려고 나왔다. 살펴본 중에 신사참배하는 목회자를 좇아낸 교회가 있었는데, 여수 애양원교회이다. 김문귀목사였다. 신참않하는 목사가 참 목사다하여 손양원 강도사를 목사로 청했다. 한국의 유일한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참반대한다고하여 내쫓았다. 뿐만아니라 장로교 총회가 결정했는데 따라오지 않는다고 제명을 시켰다. 선교사도 제명되었다. 한부선 선교사이다. 주기철 목사가 대표적 인물인데 목사직을 면직당했다. 결국 산정현 교회를 사표내라고 해도 안되니까 ‘당신은 누구의 종이냐, 그리스도의 종이냐 일제의 종이냐’고 물었고, 당시의 노회장이나 교회는 일제의 경찰서에 심부름꾼이라 할 수 있는 일을 앞서서 행했다. 일제의 충견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결국 면직시켰다. 그 사건에 대해서 지금까지 공적으로 참회하지도 않았다. 단순한 면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강단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들을 몰아내었다.

신인공노한다고 하는 것에서 인용하는 대목이 ‘주기철의 어머니 조재선’의 사건을 소개하면서 신인공노할만한 무시무시한 일을 저질렀다. 그당시 갈데가 없어서 헛간에 있었는데, 그를 불쌍히 여긴 경찰이 돈을 조금 내어서 조그마한 방을 얻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안식교 출신)이 자녀들에게 삼일 금식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자녀들이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회가 환란받는 이웃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이름으로 쫓아내고 길거리에 헤매게 만들고 거지로 만들었다. 손양원 목사도 쫓겨나서 화동 옥방리의 나환자 운동체에서 둘째가 기거하고, 부인과 나머지 아들은 산골공동체에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교회가 불의를 향해 침묵하는 것도 죄인데 한국교회는 앞장서서 배교를 일삼았고, 온갖 잘못된 악행을 했고, 가장 악한 것은 신참 안하기위해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고발한 사건이다. 그리고 신참 거부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신참 할 것을 권했다. 김길창이 주남선 목사를 찾아가서 신참을 해라고 하였다. 무시무시한 죄악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역사상 이런 예가 없다.

 

일본은 사무라이 기독교이다. 민족주의로부터 탈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교회들이 일제하에 참회 고백한 내용들은 ‘전쟁일조, 우상숭배 등’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저지른 일들은 끔찍한 일들이었다. 일본은 국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국가도 버렸다. 일본교회자체가 사무라이형이기에 쉽게 국가를 따라갔다. 그러나 일본은 우상숭배안하는 이들을 쫓아내거나 하지 않았다.

 

5.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교회론적 성격

“생존의 슬기로 살아남온 교회”(민경배)

과연 이 시대의 교회가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민경배는 ‘생존의 슬기로 살아남은 교회’를 강조한다. 양쪽다 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그르지 않다는 식이다.

교회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 무엇이냐? 허물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3세기 기독교인-도나투스 등-을 들먹이고 있다. 총신은 김영환이도 그렇다. 3세기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고 있다. 당시의 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옥에서 편안하게 지냈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키느리라고 고생했다. 그래서 당시 회개하자고 하니 총회장 홍택기가 더 수고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민경배 교회사 책을 살펴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관에 입각한 교회였다. 교회란 무엇이냐? 로마교에 의하면 ‘교직계급’자체이다. 교황 - 추기경 - 감독 - 사제 - 집사 ··· 평신도는 속하지 않는다. 예배, 신앙고백, 성도는 교회 구성요소가 아니다. 교직자 계급 자체만 교회라고 본다. 조직기구로 본다. 그것이 2차 바티칸 공회에 문제시 되고, 한스 큉과 같은 비평적 카톨릭 신학자는 실랄하게 비평하였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하였다.

반론, 교회에 있어서 조직 기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조직 기구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필요에 의해서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이 모이고, 신앙고백하는 그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칼빈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질서 제도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해 왔다. 말씀, 성례, 치리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에 대항해 조직체 자체가 교회로보는 것은 개혁파적이 아니다. 개혁파 전통에서 교회의 본질은 신앙고백이다.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장로회 형태, 감독주의 등일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 그것이 없거나 잘못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교회의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황이요’하면서 따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일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체제하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들은 로마교를 ‘가짜 교회’로 보았다. 그 조직교회로서의 카톨릭은 잘못된 교회(false Church)이다. 로마교회는 미신도, 우상숭배도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일제시대)의 교회는 신앙고백적인 의미에서 철저하게 배교였다.

역사의 왜곡은 용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찌가 유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한 것이냐의 문제도 그렇다. 일제시대의 교회를 살펴보면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것이 ‘일제시대의 신앙의 변절, 굴절’등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자세히 교회의 행습과 행태를 살펴보면 단순히 굴절된 정도가 아니라 배교였다. 배교의 극명한 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중왕으로 고백하는 모든 찬송가를 제거하였고, 성경도 계시록을 없애버렸다. 신학서적도 편집하였다. 말시온(극단적인 반 유대주의자)보다 더 심각한 이단성이 나타났다. 배교이지 신앙의 굴절이 아니었다.

 

일제의 조선기독교 정책

 

한국천주교회의 배교

한국천주교 안에도 소수의 사제와 수녀들이 신참에 반대해서 감옥에 들어간 이들이 있다. 그러나 교황청이 한국교회는 일본 추기경에 의해서 교황이 칙서를 보냈다. 한국교회가 신참은 우상숭배라고 정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로마교는 로마가 말하면 법이다.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다. 교황의 지시로 우상숭배를 하였다. 빌헬름 주교등은 철저한 친일파였다. 최근에 ‘안중근의 죄를 면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때 한국 교회의 감독이었던 빌헬름 주교가 온갖 친일행각을 일삼았다. 그래서 안중근을 비롯한 친구들이 고행성사를 한 내용을 일제에 제공하며 그 대가로 명동성당앞의 광장에 길을 터는 것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도 친일문서들을 지금도 공개하고, 배교하도록 한 교황의 칙서를 공개하여 참회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배교

일제 시대의 장로교회는 감리교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자진하여 신참을 결정하고 일제식으로 교회를 개편하였다. 감리교 신학교의 운동장을 일제 군사 연병장으로 내 주었다.

 

한국장로교회의 배교

1943년에 장로교회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름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회’라는 말로 고쳤다. ‘조선예수교 장로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모든 것을 폐기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다. 그러면서 신앙고백문이 나오는데 내용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의 주를 일본천황으로 고백하는 것이 나온다.

 

6. 사탄의 도구 한국교회

조선기독교혁신교단

먼저 감리교와 장로교 경기노회의 일부교회가 합하여 조선기독교 혁신교단을 만들었다. 이 혁신교단은 감리교회 전체와 장로교 경기노회와 그 외의 일부가 일부가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다. reformed를 일제의 하청기구로 사용하였다. 구약을 사용하지 말 것,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삭제할 것, 그런 노래를 부르지 말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 교단의 초대 통리가 누구인가, 일제 하청기구로 둔갑시킨 장본인이 누구인가? 전필순 목사이다. 친일파 중의 친일파이다. 광복이후 한국교회의 조직기구의 상층부를 잡고 한국교회를 이끌어 갔고, 장신대, 서울여대 이사장이었다. 아무런 반성과 참회고백없이 그렇게 했다. 통합측이나 장신대는 친일파 전통에 충실하게 이어져 가고 있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1884년에 형성되었다. 이는 조선예수교 장로회를 탈바꿈시킨 것이다. 소수의 친일파 인물들이 상치위원들이 구성되었다. 백낙준, 전필순, 최필근이 주도하여 조직기구를 바꾸었다. 이중에 일부는 완전히 바뀐 것을 알고 기구에서 탈피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1943년에 31회 총회를 완전히 없어졌다. 그리고 일본기독교로 되었다가 43-45년 사이에 행했던 백귀난행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극악무도한 처사들이 기록되어있다. 전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그러다가 1945년 7월말에 그 교단마져도 일본의 강제 통합 명령에 없어져 버리고 새롭게 등장한 것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다. 군소교단은 국가에 바치도록 하고 큰교단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일본기독교 등의 7개 교단이 통합을 하였다. 이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초대 통리가 김관식 목사이다. 해방후 장로교의 총무역할을 하였고 한국교회의 대표로 예루살렘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영문으로 한국교회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죽었다.

이번에 일본교회가 참회를 하면서 내용이 일본의 강제통합으로 ‘일본기독교단’이 폐전이후 다시 되돌아가서 옛그룹을 재생하였는데, 안 간사람이 황도기독교로 남아있었다. 그야말로 사쿠라이다. 아직까지 신참이 죄라고 고백하지도 않았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특징에 대해서도 연구해 보아야 한다. 국가의 하청기관이다. 교회라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시대에 안수받은 사람이 남아있고 또 안수하여 직분자를 세웠다. 죄의 전가라는 차원에서 참회해야 할 죄목이다.

 

7. 대한판 가롯유다 행전

이것은 김만섭의 책에서 ‘대한판 가룟유다들이 일제시대를 해놓고 해방이후에 아무 참회도 하지 않고 다닌다고 비난한 내용’이다. 교육학자로 당시 기독교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진필순, 전충수(나중에 카토릭으로 전향) 등이다. ‘대한판 가룟유다 행전’이라고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48년 홍택기 이름으로 성명한 성명서이다. 일종의 배교 신앙고백이다. 그후 황국서민선서 등의 여러 가지를 발표하였다. 장로회지, 청년회지에 배교문헌들을 많이 썼다. 그것을 ‘가룟유다 행전’이라 한다.

당시에 ‘한국판 사도행전’이 있었다. 합신의 김영재 교수가 하였다. 고백문중에 가장 탁월한 문헌은 일제 검사가 작성한 것이다. 평안 형무소에서 신참에 반대해서 투옥당했던 이들의 신앙고백과 고백을 기록한 판결문 ‘이기선 목사외 21인의 예심 종결서’(안용준의 글에 실려있다-한상동, 이기선, 최덕지, 주남선 ···의 기록이 나와있다.)가 있는데 하나님의 왕중왕이 잘 나와있다. 믿는바를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그것이 수난문헌이고 고백문헌이다.

만주지역의 교회가 한국장로교회 언약이라는 고백문서를 만들었는데, 이 문서가 나찌 정권에 항거하는 바르매니선언 이상으로 탁월하다.

 

다음 시간에는 참교회가 어떤 교회냐?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지하에 있었던 신참 거부의 무리들의 교회가 참교회였음을 진술할 것이다.

 

1999년 5월 21일 금요일 (9강)

VII. 수난 시대의 한국 교회

일제시대 교회이름으로 만든 여러 가지 성명서들은 일종의 배교성명서이다. 민족 배반만이 아니라 일제말기 일본은 종교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와 사회가 일치되어있는 것처럼, 일본은 신도주의와 일치되어 있어서 종교국가에 협조하는 것은 배교를 의미한다. 대한판 가룟유다(이만규의 저서에 나온 용어)들의 활동, 광복이후에도 계속 지배하여왔다. 친일파적 지배하에 있어서 일제잔제가 청산되지 않은 가운데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다. 일본에서 아주 소수의 그룹이 일제의 국가정책에 항거했던 적이 있었다. 이것은 이근삼박사의 화란자유대학 박사학위 논문에 다루어져 있다. 어떤 논지를 가졌다기 보다는 그 시대의 박사학위로서는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일본과 한국에서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항거했는가를 자세하게 엮어서 소개하는 내용이다. ‘신도내셔날니즘’ 일본내의 소수의 그룹들이 신참에 반대하고 항거하였는데, 일본판 성결교였다. 한국의 성결교와는 관계가 없다. 강력한 종말주의, 성경관을 유지하고자 했던 몇사람이 투쟁하다가 순교당하였다. 상당히 미미하였다. 두 세람이 수난을 당했을 뿐이다. 우찌무라 간도의 무교회 주의자들이 소수 항거하였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볼 때 소수의 사람을 빼면 일본 기독교는 무사(사무라이) 기독교로서 국가가 우선이고 교회가 차선이라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시대에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의 선지자들이 있었다. 한신대의 한순홍 교수가 한국교회사가 성경적 관점으로 양심대로 다시 써야 한다고 하면서 정말 그들(한상동, 주기철, 주남선 등)은 한국교회의 선지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실성(Fidelity)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신참거부의 중심적인 사상이다. 모든 저항과 신앙적 활동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유지하고자 함에서 이다. 어떻게 신부가 신랑에 대한 정조를 버릴 수 있겠는가? 신참하는 이들에게 대해서 영적 간음을 범한 이들로 생각하고 있다. 일제창기의 신분을 한국교회가 지금 청산해야 한다.

 

1. 한국교회 사도행전

그 시대에 한국교회의 사도 행전이 있었다. 왜 사도행전이라고 썼는가? 다른 서신서는 결론이 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서론은 있으나 결론이 없다. 그 사도행전은 오늘 21세기를 시작하는 성도들에 의해 조금씩 기록되어져 나가야 할 부분이다. 교회사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사도행전이 최초의 교회사라는 점에서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 수난문헌

합심의 김영재 교수의 글에 신앙의 선배들이 수난문헌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잘몰라서 하는 이야기이다. 많은 수난문헌들이 있다. 김승태씨는 일제말기의 한국기독교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다. 이 사람이 일제말기의 기독교가 어떻게 신참했는가, 또한 신참반대를 했던 이들의 문헌을 엮어 ‘증인’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증언록’ 자체가 한권의 사도행전이다. 한상동의 주님의 사랑, 주남선 ···· 참조하면 되겠다.

 

신사참배거부 항쟁자 “예심종결서” / 수진 수난자들의 신앙고백

신앙고백적 문헌이요, 신앙고백서 자체는 그들이 직접 친필로 쓴 것은 아니지만 일제에 의해 훈련된 검사들이 작성한 “이기선 외 21인의 예심 종결서”이다. 한용준(고려신학교의 제1대 교회사 교수)의 ‘태양신과 싸운이들’이라는 책에 부록으로 실려있고, 남영한 목사가 현대어로 번역한 것도 있다. 이것은 또다시 김승태가 ‘증언’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제가 신참거부운동 하는 이들을 취조하면서 부르는 내용을 받아적고 정리하여서 이들이 무엇을 믿고, 고백했는가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다음에는 이들의 행적을 80장에 걸쳐 기록하였다.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이가 한상동, 이기선, 최덕지, 이주열(이인재) 등이다.

이것이 가장 탁월한 신앙고백서요 사도행전이다. 신앙고백문 하나만 분석해도 대단한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걸고 일제와 투쟁하게 하였는가? 이기선 목사항 밑에다가 다른 21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기선과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행했다고 하였다. 이것을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제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보면서 철저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객관적인 신앙고백서이다. 하나님에 대한 · 그리스도에 대한 · 교회에 대한 · 종말에 대한 고백, 일제의 망할 것이라는 예언 등에 대한 것들이 실려있다.

 

“장로교인 언약”(1940)

신참거부운동에서 만든 신앙고백서 가운데, 만주에서 만든것이지만 바르맨 선언보다 탁월한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스코틀랜드와 국민들이 개혁주의와 장로회 원칙을 따르겠다는 것에 서명하며 세운 것이 스카티시 언약이다. 만주에 모인 교인들이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서명한 것이 있다.

한국교회 언약 / 한국교회 현상태를 볼진대, 한국교회는 배교하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들이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배교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우상숭배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고 우리는 믿는다. ···(성경구절도 열거다) ···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여러 성경구절이 보여주는 죄는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것이 죄라고 믿는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증인을 세우고 그래도 듣지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대하라고 말한다. 단절해야 한다. ··분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교회(association)를 새롭게 조직하고 ·· 우리는 이것이 참종교,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일의 종교의 진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있고, 신앙의 표준이라고 믿는다. ··· 이것에 의해 우리는 교인들을 받아들이고 믿고 ··

 

이것이 바르맨 선언 이상으로 탁월성을 가진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이다. 탁월한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 중의 하나이다. 그외에도 많은 신앙고백서가 있다. 이를 접하려면 김승태쓴 책을 참고하라. ‘일제치하 ·· 신앙고백’

 

2. 주한외국선교사들의 반응

회유분열책과 선교부의 결단

매큔과 홀드크로프트

언더우드와 쿤스

현실타협론과 양시쌍비론

미흡한 증인들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선교사들의 태도는 나누어 졌다. 찬반론이 등장하였다. 신참에 반대한 사람은 매큔과 홀드크로프트 등이고, 찬성한 사람은 연희전문대의 언더우드와 쿤스 등이다. 두 그룹사이의 글이 미국 잡지에 실리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야합과 타협해서라도 기독교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치했다. 연세대학교는 친일파 학교였다. 나중에 두 그룹사이에서 북장로교회 미국 선교부자 언더우드 편의 손을 들어주었다(회유분열책과 선교부의 결단). 그래서 홀드크로프트는 북장로교회에서 탈피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현실타협론(양시쌍비론)이라고도 한다. 함경도 지방의 선교사로 있던 카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서고도가 양시쌍비론에서 신참에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경배가 이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느니보다 차라리 학교를 문닫겠다고하여 평양장로교신학교가 문닫았고, 폐교되었다. 그래서 광주지역의 스피야 여고, 순천의 메산학교, 평야의 숭실 등이 문을 닫았다. 그러자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일으켜 서양인들 나라밖으로 쫓아내었다.

이문제에 있어서 통찰을 하도록 권하고 싶은 것은 과연 그들이 그 시대의 한국교회의 지도자(선교사들)들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바로 지도해야 했던 이들은 선교사들이었다. 그 시대의 지도자에게 요구되었던 바 과제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과제는 무엇인가? 신참에 반대하고 돌아가라고 하니 돌아가는 것이 었겠는가? No.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철저하게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일제의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한국교회를 지켜야 되고, 학교를 지켜야 했다. 투쟁을 했어야 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일제히 그런 태도로 항거하고 순교를 당하고 했더라면 일제가 손들고 말았을 것이다. 세계 여론을 집중시켜 해방을 앞당길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지도자였던 선교사들은 일제의 이데올로기에 순순히 따라가고 말았다. 과연 그들이 신실했는가? 미흡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순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유지하고 한국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3. 충성된 증인 선교사 : 한부선

“회장 규칙이요, 항의입니다”

“22번”

“귀환하지도 않겠다, 복음전도 활동도 계속하겠다”

선교현장에 대한 정확한 인식

 

그러한 시대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 있다. 청주지역에서의 선교사(북장로교회)인데 고문당하며 신앙을 지켰다. 그중에 한부선 이라는 선교사는 가장 탁월하다. 해방이후 고려신학교의 교수였다. 많은 이들이 일제 이데올로기에 몰려 나갈때에 한국교회를 지키면서 ‘떠나지도 않겠다, 우상숭배도 않겠다’고 외치면서 복음을 전했다. ‘증인이 되리라’(개혁주의 신행협회, 박종칠 역) 거기서 한부선은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신참에 한국교회가 가결할 때 일어서서 “회장, 규칙이요, 항의합니다”라고하여 외경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노회로부터 제명처리되었다.

한부선은 제명당한 이후에 ‘우상숭배가 죄’라고 지적하였지만 듣지않자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만주지역에서 작성하여 언약문을 가지고 교회에서 지도하고 언약에 동조하는 이들만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일제에 붙잡혀가서 고난을 당했다. 죄수번호 22번이었다. ‘22번은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의 번호이다. 아름다운 번호이다’ 등의 내용을 벾에다 글을 새겼다. 많은 고문을 당하다가 출옥되고 다시 잡혀가고 하였다.

그러다가 일제의 포로교환정책으로 일제가 교환하여 아프리카로 갔다가 미국으로 갔다. 복음전도적 차원이 아니라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회를, 나라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보여주었다. 조선을 향해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일제에 대해 연설과 글을 쓰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한국의 훈장을 주어야 할 것이다. 영어권의 잡지를 통해 우리나라를 위한 활동을 많이 하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선교현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일제침략에 의한 한국인 지배의 문제점, 신도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사람이다. 광복이 되자 한국에 달려와서 부산에서 신참거부운동 동지들이 세운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대한판 가룟유다들이 지배하는 장로교회가 말살정책을 쓰면서 한부선 죽이기에 앞장섰다. 고려신학교가 총회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한부선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신이 메이첸파라고 하면서 몰아부쳤다(김양선의 책에서). 어쨋든 한부선 죽이기, 메이첸파라고 하였지만, 실지로 메이첸파의 관계를 맺은 것은 총회였다. 정통장로교회와 공적인 관계가 체결되었다. 그래서 한부선이 ‘회장 규책이요’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칙혼동의 오류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사는 가룟유다들이 쓴 것이다. 철저하게 다시 써야 한다. 우리는 한부선의 ‘For Testimony'를 읽어 보아야 한다.

‘장로교회 언약’은 한부선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지도를 받은 당시의 전도사들이었다. 대표적인 작업을 했던 사람은 순교를 하였다. 매를 맞아 정신병자가 되었다. 만주지역 신참 거부운동의 주체가 사실은 한부선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전도사들 중심의 한국인들이었다. 한부선은 역시 그들의 구심점을 형성하는 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4.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 50주년 기념 논문집에서 다루고 있다

주기철의 시기 상조론

한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까닭

3세기 기독교인들

민경배의 교회 : “공교회성”과 통일성

 

민경배가 한상동을 분리주의자로 몰고가면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한다. 민경배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라고 하는 책에서 나온다. 주기철은 전통적인 장로교회의 교회론이고, 한상동은 분리주의 교회론이라고 한다. 일제말기 한상동을 중심으로 신참거부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노회를 만드려고 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교회가 허물이 있다고 해서 또다른 분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참거부는 분리주의라는 것이다. 연세대 강의실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첫째는 민경배가 하는 말이 주기철이 평양에서 세 번째 감옥에서 나와서 임시로 거주할 때 이인재 목사의 주선으로 경남지방, 만주지방, 평북지방의 사람들이 모였다.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기 위해서이다. 우상숭배하는 이들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신실한 노회를 세우자고 하였떠니 주기철이 그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하였다. 이것은 민경배는 해석하면서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단순이 ‘시기’가 좀 이르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둘째 민경배는 ‘예심종결서’에 주기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신참거부운동자의 이름에 주기철의 이름이 없다고하여 교회론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한 무리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손양원, 이기풍, 이양옥 등을 비롯한 여성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다.

셋째, 3세기 기독교인들과 같았다. 3세기 기독교인들은 노바투스와 도나투스 주의자들이다. 이들의 분열이 왜 일어났는가? 그것과는 비교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 있어서 고신계 학자들가운데도 소신이 없어서 고려파가 분리주의다로 하는 이들도 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민경배의 교회관(공교회성)을 기록하는데, 첫째는 교회의 본질이 네가지이다.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 통일성이다. 사도성과 거룩성의 문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그래서 보편성과 통일성을 다루다. 민경배는 공교회는 조직기구를 이야기한다. 통일성에 대한 문제도 한상동이 분리주의라고 하는 것은 단일성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분리주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관의 배후에는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민경배는 교회는 신앙고백의 공동체로 이해하지 않고, 철저하게 카톨릭적 교회 즉 계급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홍택기가 ‘교회를 지키느라 고생했다’고 하였는데, 교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천황이 교회보다 높다고 하고 찬송가를 찢고 배교하였던 집단이 말하는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 홍택기, 대한판 가룟유다, 민경배가 말하는 교회관은 일치한다. 계급주의적이다. 종교개혁가들이 싸웠던 싸움의 대상이었다. 교회론적 사건이다. 교황중심을 교회로보는 교회를 거부하고 신앙고백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천명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로마 카톨릭적 교회관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교회를 지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거기에 우주적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이 지역과 저 지역의 교회가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한 주를 고백하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통일성과 단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의 체재하에 종속시켜 이해하는 교회관에 한스 큉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개신교회의 통일성은 신앙고백적 통일성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고 할 때 기구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보다 신앙고백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민경배는 교회론이 잘못되었다. 카톨리적 교회관으로 개신교를 이해하려는 것은 논점일탈이다.

 

 

1999년 5월 28일 금요일 (10강)

VIII. 신사참배거부운동

1. 참배거부운동 : 교회

일제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즉 신도이즘을 채택한 종교 국가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다 순응했고 거기에 강력한 거부를 한 사람들이 경상도, 평안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왜 평안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저항이 일어났는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것이다. 신참거부 자체가 교회였다는 것이다. ‘한국판 종교개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장로교회는 개혁파 신학은 카톨릭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따랐으나 이에대한 개혁이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계(교회계급) 자체를 성직자로 보고 평신도는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다. 평신도가 아무리 있어도 사제가 없기에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거부하면서 교회조직은 필수적이나 이런 교회관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무교회주의자들,

케이크 < 쉐이크 < 버글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교회조직을 거부하였다. 영국교회가 개혁하면서 철저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하므로 이 문제가 제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파악하고 제도자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하였던 쉐이크는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고 공동생활하며 남·녀 각각 따로 생활한다. 거의 50개가 이제 하나 남아있다.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성령을 강조하였다.

개신교회는 제도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으나 그 제도는 교회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필수적이고 교회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본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칼빈의 가르침이고 종교개혁신학이고 교회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민경배등은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을 가지고 평가하고 있다. 교회사를 총회사 비슷하게 기술해 나가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신앙고백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 모든 것을 다 갖출수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배교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왕중왕되심을 거부하는 교회(그렇게 노래하는 것을 막고 찢어 버렸다)였다. 천도대신이 더 높다고 하는 집단이었다.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였다. 여전히 성례도 존재하고 말씀도 있고 구원받을 자도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었다. 그래서 광복이후에 교회지키느라고 고생했다(홍택기)고 하면서 과거청산을 거부하였는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홍택기와 민경배의 교회관은 일치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면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되어진바 없다.

경상남도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이를 결속시킨 사람이 이인제 목사였다. 하나의 거부운동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그 기구가 노회도 총회도 아니었지만 어떤 류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참거부운동을 교회로 보아야 한다.

 

2.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신학

모든 교회운동의 배후에는 신학이 자라잡고 있다. 김재준이나 친일파 그룹이 주장하는 것처럼 계율주의(안티오커스의 군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 때문에 칼을 잡지 않음으로 순교를 많이 당했는데 이를 예를 들며)라고 하는데, 사실 계율주의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이에 대해 한국교회 순교 신앙이라는 책안에 다 들어있다). 한상동은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교회에 대한,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참거부자들이 진술할때에 참여하였던 일본경찰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이 판결문 형태로 나타나있다.

성경관

성경 자체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High view of the Bible)하는 성경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관, 인간관, 국가관

하나님 만이 진정한 하나님이고 천도대신은 피조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구타당하면서도 신관을 정확하게 주장하였다.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는 ‘하나님이나 천도대신은 이름만 다를 뿐이다’(이명동신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합측 보고서가 나왔는데 이를 극찬하면서 그 시대의 신앙에 대한 이중성 자체를 미화시키고 있다. 김승태가 그렇게 하였다. 순천노회 교직자들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런 이중성이 아니다. 고백하는 대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확실한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에 입각한 신론이었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와 12신조에 정확하게 되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관에 대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말했다. 그리고 국가관에 대해서도 모든 국가는 하나님께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기독관, 구원관

말세관, 천년왕국관

특히 이들이 강조했던 것은 종말론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해서 못하게 할 때도 분명히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교회관

사회적 책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된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신학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3. 신사참배거부운동과 민족주의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의 창씨개명

주기철의 묘(실제 시신은 평양 돌밭산에 있다)가 동작산 국립묘지에 가면 있다. 민경배 등은 주기철을 민족주의자로 몰려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주기철은 창씨 개명을 하였다. 일제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배교한 한국교회와 배교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항거하였다. 민족주의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일제 천황을 향해서 동방요배를 해도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것조차도 반대했던 사람이 재건파였다. 심군식 목사에 의하면 한상동 목사는 동방요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방요배에 대한 견해가 고신계(한상동, 주기철 등)에서 모호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하지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의 민족주의 활동

일련의 학자들은 거부운동자들이 계율중심으로 한 것이지 민족을 위해서 한 것은 아니다. 또는 일제천황에게 절하는 것은 거부했지 조상, 단군등에게는 했을 것이다(김재준)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참거부운동자들의 배후에 민족이라는 것이 없었느냐? 아니다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첫째 동기는 하나님 백성의 신실성과 계명준수였지만, 그것을 가속화시켰던 힘은 민족주의적인 생각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독립신보’라는 비밀 신문을 만들었으며, 거창지역에서는 비밀 모금을 해서 보내기도 하였다. 광복이후에 그 지역인들이 찾아와서 정치인으로 나서라고 까지 하였다. 또한 이것을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면서 훈장을 준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일제시대에 옥에 갔다온 잡범들조차도 ‘신참거부하였다, 독립운동을 하였다’하여 훈장을 받고 상도 받았다. 잘못된 것이다. 상받아야 할사람은 받지 않고 ···· 진짜 받아야 할 사람이 한상동, 주남선 등이다. 그들은 상받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성을 지키기 위해서 했다는 것이기에 거부하였다. 당시의 최덕지 여사(재건파) 같은 분들은 일제청산, 민족주의 운동을 강조하였다. 애국 애족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현상과 결과로서의 민족주의적 기여

민족주의와 관계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제 말기에 일제에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주의에 대한 동기가 없다면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민족주의적으로 기여를 했는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단순히 계명준수와 신실성을 유지하기 위함에서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둘째는 역사의 평가는 동기뿐 아니라 현상과 결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큰 기여를 하였다.

 

4. 시온산제국

한국장로교단 가운데 시온파(시온장로교회)가 하나남아있다. 일제 말기에 경북 의성 지역에 있었던 시온산 제국이라는 공동체의 후손들이다. 시온산 제국은 박동기 라는 전도사 중심의 공동체로서 신비주의적이고 종말론적 사상에 기초된 비밀 은둔 저항 공동체이다. 신사참배만 반대했을 뿐만아니라 훨씬 넘어서 일본이 몰락할 것을 내다보면서 일본까지도 지배할 기독교 국가의 틀을 만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는 다소간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해야할 공동체이다.

중세시대의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된 것처럼 이들도 기독교 종교국가를 만들어서 내각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 총독까지 임명해 놓은 상황이었다. 1944-5년 경의 일이었다. 일제의 핍박이 발악을 하는 상황에서 일제를 지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가는 시온산 제국, 성일제국 등으로 명칭하고 국기를 만들어 놓았었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조선의 해방을 가져다 주고 주님께서 재림하고 시온산 제국이 천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박동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성업책을 많이 쓰기도 하였다. 거기의 내무대신의 아들이 계명대학의 구약학 교수로 있다.

그 배후에는 두 가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는 천년왕국사상(종말론)과 둘째는 성경모든 구절에 대한 알레고리칼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쳐서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대구에 있는 친일파 목사 유재기(이사벨 여고 교장의 부친) 등에 의해서 시온산 제국을 일경에 고발하였다. 유재기가 노무에 사건으로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그후 열열한 친일파가 되었다. 어쨋든 친일파 목사들의 고발로 비밀공동체가 탄로가 나서 약 700명의 적극적 회원 중 33명등이 붙들려 가서 4개월간 혹사를 당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나왔다. 예언한 날짜보다 3일먼저 해방이 되었다. 아직도 이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광복이후에 태극기가 이방종교적인, 유교적인 제 2의 우상숭배라고하여 거부하고 주민등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에 친일파였던 이들이 민족주의자가 되어 구타하기도 하였다. 어느 교회는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고하여 나체로 예배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지리멸렬하여 현실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박동기 전도사의 아들이 목사로 대구에 있다.

이 공동체를 한국교회는 이단시하고, 탁명환의 이단종교에서도 그렇게 평가하는데 잘못된 평가이다.

 

5. 순천노회 수난교직자 사건

허순길 박사 논문집 안에 있다.

요점은 한국교회사가 너무 왜곡되어져 있다. 모든 형무소에 간 사람을 신사참배 반대하였다고 하는데, 그것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순천노회는 일치감치 신참에 결의하고 실행하였다. 이기풍 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참하였다.

손양원을 통합측 거두로 묘사하는데, 당시 손양원은 애양원에 속해있었고 선교사들이 우상숭배에 반잘하여 노회에서 탈퇴하여 신참 거부운동을 하였었다. 그래서 애양원교회는 신사참배 않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하였다. 손양원은 해방 후 김길창이 노회장일 때 목사안수 받았다. 손양원을 통합측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순천노회의 박용희의 이중적 기질은 신앙의 모범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사가가 미화시키는 것자체가 잘못이다.

 

6. 평신도들의 순교와 수난, 교직자들의 배도

중세 암흑시대에 일어났던 현상가운데 하나는 황이나 평신도는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성직자들은 배교하고 타락하고 부패하였다. 거꾸로 된 세상이 중세이다.

일제말기의 교직자들은 타락하여 배교하고 교회를 망가뜨리는데 당시의 평신도와 소수의 교직자들 가운데 신참거부하고 순교한 이들도 있다.

 

7. 대응양상의 차이

진보신학과 정통신학

왜 박해가 왔을 때, 어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살고 어떤 이는 생명을 내걸고 반대했는가? 가장 기본적인 motive가 무엇인가? 진보주의자들은 찬송했고 정통주의는 반대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고 민경배는 강조하였다. 승산없는 싸움이다. 일제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이들은 거의 다수가 정통신학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이 친일하고 보수주의자들이 항일한 구도가 사실이다.

 

민족주의 정신, 사회참여 의식

대응양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을 다룬는데, 민족정신이 있었느냐, 사회참여 의식이 있었기에 대응했느냐?의 문제이다. 김재준 교수가 사회참여를 부르짖으면서 신참에 항거한 사람은 사회참여로 항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참여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었다.

 

신앙심

신앙심이 강한 사람은 반대하였고, 약한 사람은 찬성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이 갔다. 그들 생각에는 평양신학교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에서 공부를 한 사람, 특히 일제말기에 일본은 ‘교회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하였었기에 일제말기에 교육을 받은 이들이 대개는 그런 식으로 한국 교회를 섬겼다. 일제에 아부하였다. 한명동 목사(일본 중앙신학교)는 예외적이다. 일제 교육을 어디서 받았는가 일제나 미국에서 진보주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친일파였고, 평양신학교 출신자들은 신참거부자들이었다.

 

상이한 진리이해의 틀

인식론적으로 분석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가 보수전통주의자들이 유교주의와 비슷하다. 일치하지 않은 것은 항거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고착되어져 있지 않고,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고 항상 다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통주의(보수주의자들은 진리가 fixed, immutable, one라고 생각하였다.

사고의 인식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였다. 저항과 야합의 차이였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순응과 문화적응주의

정통주의적 사고의 카톨릭의 왜 순응했느냐? 로마가 말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곧 법이다. 교황청에서 칙서를 내려서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최교수는 참회하라고 외치고 있다(그의 책에서).

그리고 문화적응주의라는 것이 근간이 된다. 조상숭배에 대해서도 반대하다가 지금은 하고 있는 것이 문화적응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1999년 6월 4일 금요일(11강)

IX. 한국교회 재건 운동

1. 조국 광복과 과거사 청산 문제

1948년 8월 15일에 광복과 더불어 한국교회도 해방을 맞았다. 815해방이라 안하고 815광복이라 한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되찾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불란서나 과거사에 대한 참회고백을 하였다. 2차 대전후에 독일 리뵈르트 국제 제판소에서 나치 정범자들에 대해서 처형하였고, 동경에서는 극동 제판소가 열려 일본에 협조하고 아부하는 자들을 많이 처형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사를 청산하려 하였다. 한국에서도 반민특위를 결성하여 일제시대 동족을 괴롭히던 이들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학가를 불게 물들게 하고, 파출소가 방화되는 민족사를 청산치 못한 불행중의 불행이다. 세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달라야 한다. ‘사랑’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려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해방이 되자 얼마 안있어서 조선기독교단이 형성되었다.

2. 불발탄 조선기독교단

결국 불발탄으로 끝났다. 광복이되자 친일파 목사 김관식이 벌벌떨었다. 기뻐하던 친일파 인사들도 있었다. 기독교회 안헤서도 마찬가지 였다. 1945년 7월에 한국의 모든 개신교를 통폐합시키고 군소교단은 없애버리고 형성된 것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교회를 통폐합시킨 것이다. 통폐합된 교회의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있고 교회가 있다. 신도주의가 중요하고, 타의로 교화잉 ?보다 더 높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갈 교파는 돌아갔는데, 남아있는 교파는 그대로 있었다. 가장 큰 일본기독교단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았다. 해방이후에 겨우 인준하였다. 천황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했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광복이 되니 친일파 인사들이 서울에서 교단을 하나 조성하였는데, 그것이 조선 기독교단이다. 일본교단과 내용은 같은데 이름만 바꾼 것이다. 송천근, 김관식(대다수의 친일파 부류들), 이종성(대구 친일파 행적을 뚜렷히 가졌던 인물) 등 이었다. 이들의 발상은 그 시대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과거사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오히려 연장시키려는 넌센스를 연출하였다.

‘광복이 되었는데 일본색 교단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 감리교의 이규갑 등이 퇴장하였다. 여기에 대해 민경배는 ‘하나의 교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고 한다. 에큐메니칼 하에서 하나의 교회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의 교회가 신앙고백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한국교회의 재건은 아니다. 그리고 민경배도 조선기독교단의 설립이 철저하게 친일파 인사들이 광복이후에도 일제시대때 누렸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정치적인 연합이었음을 말한다.

김양선은 ‘당시 교회 지도자가 없었기에 이들이 교회를 이끌 수밖에 없었다’는 교회 지도자론이 나온다. 이것이 장로교가 복구된 이후, 이북 5도는 대회로 모였다. 32회 총회가 한태영, 김관식 등의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 복구되고 조선신학교를 장로회 신학교로 인정하였으며, 신사참배를 취소한다고 결의하였다고 하였는데 총회록에는 없다. 김양선은 지도자가 없었기에 친일파 인사들이 교권을 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미움을 받았던 시각이다. 그래서 ‘한국기독교 해방십년사’ 김양선 자신도 친일파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총회에서 그 책에 대해 판매금지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과연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신학생들에게는 교회론적 통찰이 필요하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며, 교회의 지도력이라는 것이 무었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김양선과 친일파 사가들이 말하는 것은 교회를 기구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기구에 대해서 잘알고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교회는 기본적으로 신앙고백 공동체이다. 신앙고백적으로 확실한 인사들이 지도력을 가져야 하지 않았느냐? 남아있는 일제 잔제가 교회라는 것이 단순히 기구적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지킨다고 고생하였다’ 신앙고백적 교회가 아니라 조직체를 교회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오늘까지 내려와서 통합측이 주기철 목사 복권행사를 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역사 평가이다.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형성되었어냐 하는데 확인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영적이 통찰력을 가지고 바르게 지도하는 사람이 진짜 지도자이다. 서기, 총회장이 되어야 지도자라는 개념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3. 한국교회재건 원칙

광복이 되니 옥중에서 나온 출옥성도들이 평안 산정현 교회에서 모여 한국교회를 어떻게 재건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재건이라는 말은 당시 한국에 교회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재건은 기구의 재건만이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적인 재건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친일파는 기구만을 복권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의 신앙정체성을 확실하게 한 교회의 회복이었다. 영적이고, 신학적인 교회의 재건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김양선에 따르면, ‘두달간 신사참배하고 친일했던 목사들이 교회의 직을 사면하고 스스로 자숙하여 교회가 공동의회에서 목사를 청빙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을 내걸었다. 그렇게 함으로 과거사를 일단락 짓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선 목사(당시 출옥성도를 이끌었던 목사, 나이도 많았고 한문에 능통하고 박식하였다.)에 의하면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복권 필요성’에서 거기에 보면, 6개월 자숙하라는 것이 있다. 김양선의 것이 권위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조수옥 여사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두달이라는 말이 최근에 들었지 당시에는 이기선 목사가 하자는 대로 따라했다. ‘6개월 자숙해야 한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어쨋든 과거사를 일단락하자고 영적, 신앙고백적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복구

역사는 원칙이 정당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는 기득권을 가진 다수의 세력에 의해 움직여 갔다. 그래서 단순히 기구적인 복구, 43년에 없어져버린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북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합동, 기장, 통합, 고신 등이 나뉘어진 것이다. 고신도 51년에 쫓겨나 52년에 생기게 되었다.

 

5. 재건파

옥중에서부터 출옥성도 사이에 의견이 달랐다. 주로 동방요배에 관한 것이었다.

수진파라 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은 계명을 지키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지, 로마서에 보면 임금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냐, 일본 국왕은 멀리서 살아있는 것이기에 예의를 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재건파 사람들(김인희)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돈줄을 대었다. 재건파들은 한국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김인희, 최덕지 덕분이다고 말하고 있다. 단순하나 일리가 있다. 북한에서는 김인희를 중심으로 재건파를 구성하였다. 재건파는 동방요배 자체도 거부하였다. 나중에 수진파도 안되겠다고 돌아섰다. 재건파는 수진파가 동방요배를 처음에는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덕지 여사와 그의 딸이 동방요배한 한상동은 회개하라고 외쳐대곤 하였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생각해 보라.

재건파가 북한에 김인희 중심으로 세워졌는데, 최덕지 여사가 재건파로 넘어갔다. 당시 경남에 속한 도시는 부산에서 재건파를 형성하였다. 이 재건파는 기존의 교회는 우상숭배교회였기에 마귀당이다. 이들과 친교를 관는것까지 죄다. 동참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기성교회 신자인 것을 알면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가버리는 헤프닝이 있었다. 당시 주상수 목사가 재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분의 딸이 홍반식 목사의 부인이 되었다. 남편하고 몸만 같이 살고 정신과 신앙은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지냈다. 한동안 동침도 않고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상동 목사의 권유에 의해 그대로 살았다.

재건파는 고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절대 하나로 할수없다는 것이다.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상숭배한 교회를 불질러 버리기도 하였다. 예배당이 마귀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파는 참회하면 하나 될 수있다고 하였다.

대구서문로 교회는 당시 일제 신도사원이었다. 지금은 새로 지은 것이다. 기와집에다 절간 비슷하였다. 74년 수련회였다. 고려파는 당시 신도사원이었으면 어떻냐는 것이다.

재건파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 순장로교회라는 것이있다. 함흥지역에 있던 이덕실 목사라는 사람(신참에 반대하여 숨어 살았다. 부산으로 내려와 재건파와 맥이 같다고하여 합쳤다. 그러나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하여 분리하였다)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순장로교회를 세웠다. 지금도 고려파를 세우지 않는다. 고려파를 변질된 기독교로 본다.

재건파는 지금 110여개의 교회가 있다. 지금은 신세대 유학생들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재건파와 순장로교회도 고려파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려파와 가장 비슷한 교파는 순장로교회라는 것이 있다. 60여개의 교회가 있다. 이것이 북한판 고려파이다. 혁신 복구파이다. 북한에 남아있던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그룹과도 합하게 되기를 바란다. 가을에는 혁신 복구파의 지도자인 뉴옥에 있는 안도명 목사를 경건회에 세울까 생각도 든다. 이분이 쓴 책에 ‘한국교회 목회자 모델’을 소개한다. 한경직이냐(텐플턴 상받음) 아니다. 한경직은 뱀장어 꼬리에 참기름 바른자 같다. 목회자 모델이 매끄러운 것이냐, 영어냐 학식이냐고 하면서 한경직은 절대로 아니다고 하였다. 천거하라고 하면 한상동 목사이다. 한상동이 주기철목사와 어투와 비슷하다고 한다. 한상동 목사는 진실하다. 바르게 믿는다. 믿는대로 행한다. 이 사람이야 말로 한국교회 목회자의 모델이다. 고신에서 갈려져 나간 것이 백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성화론에 있어서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포용해야 한다. 흡수통합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시험에 반영할 책, 50주년 기념논문집에 실려있는 ‘고신교단 설립의 교회론적 기초’라는 책이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거기에 보면 고신역사와 관련해서 최초로 신학적으로 통찰한 것이다. 우리가 개선해야 할 부정적 개념속에는 배타성이 자리잡고 있다.

재건파에 관해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민족적인 정신이 확실한 교회이다. 그러나 민족교회론자는 민경배등은 냉소하고 있다.

 

6. 고려신학교

고려신학교는 출옥 성도들이 옥중에서 왜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에 쉽게 무너졌는지를 생각하면서, 비록 일제의 강압때문만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었던 것은 진보주의적 신학자들이 교회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신학교에 대한 유감이 있었다. 해방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로서 조선신학교밖에 없었다. 일제의 위엄으로 세워졌으며, 친일파 행적이 찬란했고, 진보주의, 자유적 신학교로서 장로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신학, 평양신학교와 같은 학교를 세우겠다. 그러면서 총회안에 있지 않았던 것은 총회가 친일파아래 있었기 때문에 신학자체가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교회 안에 있으면서 노회의 인준만 받고, 총회의 관할을 받지 않기를 원했는데 생각만큼 평탄하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님이 고려 신학교의 총무였다. 설립될 당시 목사 안수를 받았던지 목사가 아니던지 그랬다. 애양원 교회는 38년 당시부터 목사로 불렀다. 아마 안수를 두 번 받지 않았는가? 당시는 주도적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 신학교 설립자는 아니지만 설립자와 다를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의 설립자가 아니라 정영창, 한상동이 설립자였다. 그러나 장기려는 설립자와 다를바 없이 활동하였다.

고려신학교 50년사(허순길)를 참조하라.

 

7. 경남법통노회

법통노회란 무엇인가? 왜 법통이 붙었는가? 오늘이 고려파의 역사적 정체성을 밝히는 핵심적인 단어이다. 경남노회라는 것은 광복이후 부산을 포함하였다. 김길창 비롯한 경남노회 복구위원회를 통해 회복이 되었다. 이것이 고려파 중심이던 친일파 중심이던 옛 평양신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역력하다. 문화적, 역사적 요인이 있다. 일제를 거치면서 광복이후에 신참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가고자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고 일어났고 강세를 보이는 주 원인중의 하나이다. 경남노회를 북구하였는데, 또 기독권을 쥘려고 하는 불순한 동기가 보인다. 어쨋든 회복되었다. 얼마 기간을 자숙을 하기로 하였다. 노회에서 결정하였다. 자숙을 하지 않은 목사는 자숙해야 하는데, 자숙하지 않은 목사가 노회장으로 뽑혔다. 김길창은 경성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남성여고도 그렇다. 일제시대의 경남 지방목사들을 일본식 침례를 행했던 사람인데 참회없이 나서니 ‘참회를 안한 사람이 노회장이 될 수있느냐?’는 것에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그럴 때 유명한 똥바가지 사건이 있었다. 김*애씨가 똥오줌통에 물을 담아 들어와서 당시 노회가 신참한 목사들이 문제를 걸고 수근수근하니 그 물을 교회당안에 뿌리면서 ‘이 개새끼들아, 신참안한 너희나 신참 한 우리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광복한 조국의 땅에서 친일파가 똥오줌 바가를 뿌렸다. 그것이 광복이후의 한국교회 상황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길창이 물러나고 주남선 목사가 앞에나가서 손양원목사를 모시고 집회부터 하자. 그래서 친일파 인사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남선이 취임하고 취임사에서 ‘수고하였다’고 말하였다. 위로적인 말을 하니 모든 노회가 은혜를 받고 통회하고 울면서 노회를 할수없을 정도로 부흥의 불길이 있었다. 그때 일어난 고신 부흥의 불길이 수년간 제주도까지 번졌다. 6·25가 일어났을 때도 초량교회에서 신참한 목사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서도 일어났다.

고려신학교에서도 박윤선 목사의 설교중 한 학생이 참회하며 전교생이 하루종일 공부도 않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의 불길중에 출옥성도들은 영적, 신앙고백적 교회 재건에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친일파인사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가 ‘도대체 신참이 죄냐 죄가 아니냐?’고 하였다. 당시는 ‘신참이 우상숭배가 아니다’는 생각이 팽배하였다. 한상동 목사의 질문에 경남노회가 결의를 하였다. ‘다시는 신참의 말을 꺼내지 않도록’ 결의하였다. 꺼내면 치리하겠다는 것이다. 다음 노회가 구포에서 모였는데, 한상동 목사를 치리하기 위해서 모였다. 당시 여론이 친일파에게서 돌아서서 할수없이 물러서게 되었다. 김길창이 물러섰다. 당시 핵심이 고려신학교를 인중할 것이냐 아할것이냐의 문제였다. 다섯 번인가를 엎치락 뒷치락하였다. 그래서 김길창이 우리는 신앙양심이 다르다고 하면서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김길창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따로 모였다. 경남노회(사이비)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나중에 총회가 사이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경남노회가 합법성을 가졌다고하여 ‘법통’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고신을 분리주의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문제가 생기자 총회 정권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이비를 치리하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친일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두 개의 노회를 해체하여 세 개로 나누어라고 하였다. 경중, 경동, 경서로 나누었다. 그래서 다섯 개의 노회가 하루아침에 생겼다. 전권위원회가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더 찢어났다. 이것이 총회에서 받아주어야 하는 것인데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전권위가 행악을 저질렀다. 전권위가 위임을 받지도 않았다. 장로교회 노회 설립의 원칙은 동일하다. 기존 노회가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권위가 임의로 나누어 버렸다. 그러니 경남 법통노회 140-50개가 속하였고, 나머지는 오합지졸로 모이고 있었다. 그럴때에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 노진현이다. 지금의 합신의 동역인이다.

노회가 다섯 개가 되었다. 대구대일교회에서 총회를 열었는데 총대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 전권위의 아이디어(세 개로 나뉨), 적법성을 가진 법통노회, 친일파 노회가 있는데 어느 총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합법적인 노회를 받아야 함이 옳다.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해 대구제일교회에서 3박 4일동안 사탄의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6·25사변은 한국교회가 참회하지 않고 합법적인 경남노회(출옥성도 대다수)를 제거하기 위해 전권위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시의 총회안에 조선신학교의 문제로 갑론을박하였다. 박형룡과 조선신학교의 싸움이었다. 박형룡은 다섯 개를 다 거부하자, 조선신학교는 전권위만 받자는 것이다. 결국 정회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상 법통노회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정회와 함께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래서 김길창의 손을 들어주었고, 경동, 경중, 경서를 통폐합하였다. 새 경남노회를 부산진교회에서 모였다. 그로인해 법통노회는 ‘불법하는 자들아 참회하라’고 외쳤다. 정회하였던 총회를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였다. 자기들이 원하는 불법노회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에게만 미리 표를 나누어주었다. 이것도 모르고 법통노회는 참석하였으나 표가 없으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실상 경남법통노회를 제거되었다.

기존 노회설립법을 무시하고 합법적인 노회는 제거하고 불법적인 친일파 세력을 총회 총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고려파의 시작이다. 친일파에 의해 주도된 장로교회가 경남노회를 쫓아내었다. 김양선도 민경배도 김인수도 사실과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분리파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려파는 분리파가 아니라 교회정체성, 신앙고백적 정신을 이은 합법적인 노회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때가 전쟁 중은 1951년이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런후에 그래도 따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다음 총회까지 1년반을 기다렸다. 이학신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여 하나될 것을 원했지만 총회가 그전의 거절을 확인하고 분열을 결정하였다. 불가피하자 진주의 성향교회에서 모여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시작하였다. 이 배후에 교회론적 기초가 잘 되어야 한다.

그 와중에 고려파는 실제 60여개로 시작하였다. 50-60년대에 가장 왕성한 성장을 보였다. 600여개로 성장하였다.

 

8. 신행불일치 신학자 박형룡

박형룡이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와서 고려파가 불리해 보이고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보이자 떠났다. 전체를 책임지겠다. 정면으로 김재준과 맞붙었다. 그런 덕분에 한국교회의 메조리티가 설수있었다. 고신을 희생시키고 얻은 기여이다. 그러나 박형룡이 남긴 것은 신행불일치의 불행을 남겼다. 고려파를 떠날 때 설교는 ‘공적 권징’에 관한 것이었다. 박형룡은 공적 참회라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하지 않을수도 있다. 칼빈이 공적권징을 표지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표지 이상으로 중시하였음을 보아야 한다. 권징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제어장치이다. 박형룡은 권징을 있으면 좋지만 때에 따라서는 없어도 되는 이차적인 문제로 보았다. 박윤선은 일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양씨쌍비론을 폈다. ‘박윤성도 옳고, 박형룡도 옳다’는 것이다. 가르치면서 행하지 않은 신행불일치의 사람이다.

 

9. 고신교단 설립의 교회론적 기초

반드시 읽어야 한다.

 

10. 합동과 환원

고려파와 승동측과의 결합이었고 제1회 총회장이 한상동목사였다. 잘못된 합병이었다.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환원을 하였다. 참았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환원이 정당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11.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중요한 교회사이다. 70-80년대의 잘못을 지적한다. 문부식!

 

12. 고신정신, 고신 멘탈리티

무엇이 고려파 정신인가?

 

13. “옛적같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허 박사때는 ‘옛적같게 하소서’였는데, 이제는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여야 하지 않을까?

 

 

목 차

 

I. 한국 교회의 효시1

1. 도마설1

2. 임진왜란설1

3. 경교설3

 

II. 천주교의 한국 전래와 수난5

1. 병자호란(1637)5

2. 이수광, “芝峰類設”(1614, “天主實義”(천주실의)), 이익의 “星湖사設”(성호사설)5

3. 이승훈: 최초의 한국인 영세자5

4. 이벽6

5. 진고개, 김범우 수난(1785, 제1차 수난)7

6. 辛亥敎難(신해교란, 1791, 제2차 수난)7

7. 辛酉敎難(신유교란, 제3차 수난): 황사영백서7

8. 己亥大敎難(기해대교란, 1839, 제4차수난): 헌종의 “斥邪倫音(척사윤음)”, 정하상의 “上帝上書(상제상서)”8

9. 丙午受難(병오수난, 1846, 제5차 수난), 김대건의 순교8

10. 丙寅敎難(병인교난, 1866), 불란서의 강화도 살상9

11. 辛未敎難(신미교난, 1871), John Rogers, 대원군의 척화비9

 

III. 개신교의 한국전래와 초기선교10

1. 칼 쿠츠라프(Karl Gutzlaff)10

2.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10

3. 서상륜(John Ross & John McIntyre)과 이수정11

4. 알렌(Horace Allen)12

5.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12

6. 각 교파 주한 선교사들12

7. 선교지 구분과 선교 정책13

8. 초기 신앙형태13

9. 네비우스(Nevius) 선교방법 : 자치, 자전, 자립14

 

IV. 한국장로교회의 설립과 부흥14

1. 장로교단의 조직(1907)14

2. 초기 선교와 성장16

3. 1907년 대부흥운동18

 

V. 한국장로교 신학사상20

1.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20

2. 조선장로교신학교와 ‘평양신학’21

3.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22

4. 김재준과 박형룡24

 

VI.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배교25

1. 황민화 이데올로기 Japenization25

2. 신사참배의 이교성과 제의성(祭儀性)26

3. 한국교회의 우상숭배와 백귀난행(百鬼亂行)27

4. 신인공노(神人共怒)할 무시무시한 죄악상28

5.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교회론적 성격30

6. 사탄의 도구 한국교회31

7. 대한판 가롯유다 행전31

 

VII. 수난 시대의 한국 교회32

1. 한국교회 사도행전32

2. 주한외국선교사들의 반응33

3. 충성된 증인 선교사 : 한부선34

4.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 50주년 기념 논문집에서 다루고 있다35

 

VIII. 신사참배거부운동36

1. 참배거부운동 : 교회36

2.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신학36

3. 신사참배거부운동과 민족주의37

4. 시온산제국38

5. 순천노회 수난교직자 사건38

6. 평신도들의 순교와 수난, 교직자들의 배도38

7. 대응양상의 차이39

 

IX. 한국교회 재건 운동40

1. 조국 광복과 과거사 청산 문제40

2. 불발탄 조선기독교단40

3. 한국교회재건 원칙41

4. 대한예수교장로회 복구41

5. 재건파41

6. 고려신학교42

7. 경남법통노회42

8. 신행불일치 신학자 박형룡44

9. 고신교단 설립의 교회론적 기초44

10. 합동과 환원44

11.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44

12. 고신정신, 고신 멘탈리티44

13. “옛적같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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