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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24> 캄보디아 활동 10년 만에 빈민촌서 대학생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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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도 고아원을 설립하기 위해 신학교 동창인 김덕규 선교사와 현지 한국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있어 누군지 물으니 메콩강을 타고 내려와 구걸하는 캄보디아 빈민촌 아이들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그길로 무작정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까지 달려갔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겪은 내전의 여파로 빈민들이 도시 곳곳에 넘쳐났다. 귀국하자마자 2004년 1월 프놈펜에 지부장을 파견하고, 캄보디아 정부에 다일공동체를 NGO로 등록했다. 프놈펜 빈민촌에서 나눔과 섬김 사역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2005년 3월엔 의료진을 파견하고 다일치과클리닉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금도 군경을 동원해 강제 철거 및 이주를 자행한다. 그 과정에서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지만 킬링필드를 겪은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쫓겨난다. 2006년 5월 정부의 대대적인 철거로 인해 공항 뒤편 언동마을에 빈민이 모여들었고, 프놈펜 최대 빈민촌이 형성됐다. 당시 다일공동체 프놈펜 지부도 철거당했고, 우리는 가난한 이웃들을 따라서 언동마을로 함께 이동했다.

마을에는 희망을 잃어버린 이웃들이 가득했다. 매춘, 마약, 도박 등 범죄가 판쳤다.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민이 넘쳐났다.

온갖 질병을 앓으며 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오는 이들만큼 많았다. 경찰조차 들어오길 꺼려하는 그곳에서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녹색조끼 하나 입고 마을을 다니며 공동생활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많은 NGO가 들어와 주거개선 및 교육 사업 등을 통해 언동마을을 도왔다. 빈민이 많이 줄었고 교육받는 아이들도 늘었다. 길도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500여 가구는 처절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2006년 3월 17일, 프놈펜 북쪽으로 300㎞ 떨어진 씨엠립 톤레샵 호숫가에 새로운 ‘씨엠립 다일공동체’를 세웠다. 그곳 주민들은 일 년의 반 이상을 물 위에서 살 만큼 주거가 불안정했고, 아이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원 달러”를 외치거나 사진을 찍어 판매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도 밥이 필요했고 교육과 보건사업이 필요했다. 건물 하나 없이 노상에서 천막을 치고 개원예배를 드린 뒤 밥을 나눴다. 이후 교민들과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곳 아이들을 사람답게 키워 달라며 후원자가 돼주셨다. 그중엔 불교신자도 많다.

쉼 없이 밥과 빵을 나눴다.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했다. 할 수 있는 대로 유치원, 도서관, 방과후학교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다일클리닉을 통해 건강을 지켜줬다.

지금은 프놈펜의 분원보다 더 커졌다. 심지어 여행사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캄보디아 여행을 갈 때 씨엠립 다일공동체를 꼭 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처음에 왔던 어린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왔다. 대학에 진학해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당장 후원할 수 있는 분들을 수소문해 학생 8명의 대학 등록금을 납부하던 날, 다일가족들과 그 학생들 모두 울고 말았다. 이후 씨엠립 다일공동체는 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에게 꿈을 주는 NGO가 되자고 다짐하면서 ‘꿈퍼’ 사역을 시작했다.

여전히 씨엠립의 빈민촌에서는 수천 명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동시에 배움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정리=이사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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