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2> 주님 음성 들은 아버지 “전쟁 난다, 남쪽으로…”


201801160001_23110923884493_1.jpg
연습용 지휘봉의 길이는 30㎝ 남짓이다. 연주회 때 사용하는 지휘봉은 이보다 조금 더 길다. 난 지휘봉에 인생을 걸었다. 음악과 함께해서 행복한 인생이었다. 온 가족이 음악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우리 때는 음악하면 피죽도 못 먹는다고 반대가 심했는데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음악으로 살며 자녀들 교육까지 시켰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나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의 온천리다. 집집마다 온천이 터져 나온다고 해서 온천리였다. 옹진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일이다. 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하며 한 명씩 노래를 시키셨다. 어릴 때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쑥스러워서 몸을 배배 꼬며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웬일인가.

“학원아.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그제야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선생님은 날 데리고 이 반, 저 반 다니면서 시범으로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 나와 음악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의 신앙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아버지는 주무시다가 벌떡 일어나셔서 어둠 속에서도 기도하시던 신앙인이셨다. 1949년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부터 짐을 싸서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곧 전쟁이 난다. 새벽기도 중 분명히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셨다. 전쟁은 실제 일어났고 그나마 인천으로 피했던 우리 가족은 전쟁 초기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고향은 황해도지만 성장 공간은 인천이었다.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던 난 중학생 때 불량배들을 만난 일이 있었다. 당시 교회 중등부 회계를 맡고 있어 현금이 있다는 걸 불량배들이 알아낸 것이었다. 교회 돈을 내줄 수 없어 돈이 없다고 버티자 무자비한 주먹세례가 이어졌다. 가지고 있던 공금을 다 뺏기고 기어서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며 날 권투 도장으로 데려가셨다. 스스로를 지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권투가 재미있었다. 음악가를 꿈꾸던 내 마음에 “아니다. 권투선수가 내 길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관장이 날 대회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스파링이 시작됐는데 그때 알았다. ‘권투선수로 성공하기엔 팔이 너무 짧다. 권투했다가는 평생 샌드백 신세 면할 수 없겠구나….’ 권투는 결국 취미로 끝났다.

하지만 권투를 배운 일은 훗날 지휘자로 성장해 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지휘는 운동신경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중학생 때 배운 권투가 잠자고 있던 운동신경을 깨워줬다. 또 하루 평균 8시간씩 서서 손을 휘두르는 게 지휘의 기본인데 권투로 기본기를 다지지 않았다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손을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지휘자에게 권투보다 적합한 운동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 불량배들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이력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인천공업고등학교’다. 음악하면 굶어죽기 딱 좋다고 생각하셨던 아버지가 인천공고를 권하셨다. 결국 아버지 뜻에 따라 인천공고 응용화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입학과 동시에 밴드부에 들어가게 됐다. 밴드부에선 테너 색소폰을 불었다. 밴드부 활동은 음악과 나를 이어주는 생명줄이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