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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 “손잡은 남북 정상…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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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방을 맞은 곳은 압록강 지류, 의주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고진강 물가 모래밭이었다. 1945년 8월 7일, 붉은색 딱지의 소집장이 배달됐다. 소집장은 조선반도 청년들을 전쟁터에 보내기 위해 특별 지원병을 모집하는 징병 영장이었다.

소집일은 8월 16일. 초등학교 훈도(교사)였던 나는 8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고진강가에서 원수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갈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학교 급사 소년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전쟁이 끝났어요. 천황이 울며 항복했어요!” 그때까지 듣기 어렵던 조선말이었다. 나는 맑고 새파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던 날도 시원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남북 관계가 풀리는 것 같아 기뻤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판문점 회담 소식을 접하면서 1991년 6월 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당시 유엔주재 북한대사였던 한시해 부부장 일행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았다. 북한 대표는 카터에게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와 줄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답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이 자기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분명히 말해줄 것, 그리고 서울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갈 것. 두 번째 말에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휴전선은 군사경계선이지 국경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터는 이어서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당신들(북한과 남한)은 항상 하나의 조국(One Korea)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나는 국경을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 대통령으로서 남쪽 서울에서 휴전선을 넘어 북쪽 평양에 감으로써 한반도가 한 나라임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카터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기도로 마무리했다.

“하나님 아버지,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 올 때는 한반도의 긴장,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풀릴 수 있는 큰 선물이 서로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은 그들의 범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셨고,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고국을 떠나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고레스 황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한 민족, 한 국가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한민족 분단의 비극은 이제 끝나야 한다. 나는 1946년 2월, 고향이 있던 북한 땅을 떠났다. 이후 교회 안에서 목회 사역을 했고 1978년, 통일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후암교회 담임을 내려놨다. 이것은 북한에서 태어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사시다 먼저 가신 선친의 유업을 잇는 일이기도 했다. 북한과의 접촉은 세계선교 사역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89년 1월 고향을 떠난 지 43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24회에 걸쳐 여러 모양으로 북한을 왕래할 수 있었다. 원한의 분단 시대를 종식하고 민족통일의 종이 울릴 그날을 기도한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약력=△1924년 평북 용천 출생 △장로회신학교, 미국 에즈베리신학대학원, 윌리엄캐리대학원(박사) 졸업 △후암교회 담임목사 △국제선교협력기구,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설립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 △김일성종합대(종교학과) 초빙교수 △조동진선교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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