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정예배 365-8월 1일] 바울의 지체 의식


201808010003_23110923986829_1.jpg
찬송 : ‘사랑하는 주님 앞에’ 220장(통 27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빌레몬서 1장 1∼3절


말씀 : 바울은 자신의 제자들을 대하는 자세가 매우 남달랐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자신의 제자였음은 물론 아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고전 4:17) 그런데도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고 지칭합니다. 가부장적 사회였던 우리나라만큼은 아닐지 모르나 지중해권 국가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문화권 생활에서 아들과 다름없는 제자를 형제로 대우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또한 자신의 제자였던 빌레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를 ‘동역자’라고 칭합니다. 이 단어 역시 바울이 얼마나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는지 알게 합니다. 나아가 빌레몬의 아내인 압비아에게는 자매로,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인 아킵보는 ‘함께 병사된’ 자로 지칭하는 것 또한 바울이 얼마나 고상한 인품을 지녔는지 말해줍니다.

바울이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은 지체의식을 가졌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머리이고 우리 각자는 신체의 여러 고유한 기관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롬 12:4∼5, 고전 12:12∼27, 엡 4:15)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상대에 대해 머리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피차 동등한 인격적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동역자’ 의식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 의식을 바울은 가족적 개념으로 승화했습니다. ‘형제’ 의식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권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이나 선배는 우리의 머리 역할을 하려 합니다. 유교의 권위주의 문화는 수직적 호칭을 사회법 혹은 불문율로 규정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생 된 자나 나이 차이가 많은 선배가 한참 어린 후배나 제자들을 ‘형제’라고 칭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문화에까지도 도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예수님만 머리이고 나이나 교회의 여러 직급, 은사의 차이를 떠나 모두 지체입니다. 신체 각 기관이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상호의존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맺듯, 이런 지체의식은 우리 모두를 ‘형제’ 또는 ‘동역자’로 대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몸 비유를 떠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자연스럽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났기에 이러한 호칭을 하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우리보다 신앙 경력이 짧은 성도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진정성을 갖는다면 자연스럽게 서로 ‘형제’로 ‘동역자’로 대우할 것입니다.

기도 : 주님,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교회 성도들을 가족으로 대우하고, 복음 사역을 같이하는 분들을 동역자로 존중하는 문화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권문상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교수)

약력=△한국외대, 총신대 신대원, 미국 풀러신학교, 영국 아버딘대학교(Ph.D.)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저서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적 공동체’ ‘초신자의 질문’ 등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