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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25> 카터, 남한 목사와 北 부부장 함께 찾아오자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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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유엔대사를 지낸 한시해 부부장 일행이 미국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것은 1991년 5월 25일이었다. 이들은 북미기독학자총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홍동근 목사, 윌리엄캐리대 개발담당 부총장 위크맨 박사와 함께 워싱턴으로 갔다. 북한 대표 일행도 이어 워싱턴에 도착했다. 6월 5일 위크맨 부총장은 “아직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방문 시간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내일은 다른 약속을 하지 마시고 비워두십시오”라고 했다. 그날 밤 위크맨 부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애틀랜타로 가야 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 자택이 있는 플레인즈로 갑니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한 부부장과 참사관, 통역, 그리고 조 목사와 내가 동석합니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 전환점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고 계셨다. 다음 날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렌터카를 빌려 약속 시간 5분 전 도착했다. 전직 대통령의 사저는 작고 낡은 건물이었다. 나는 그 집이 저택의 수위실인 줄 알았다. 마중 나온 사람은 로잘린 카터 여사였다. 미국 대통령의 평범한 삶을 본 북쪽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남한 목사와 북한의 부부장이 직접 찾아온 것을 놀라워했다. 그는 내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지금은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가 앉았던 자리”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한 부부장에게도 말했다. “당신이 앉은 자리는 베이커 국무장관이 내 선거운동 계획을 가지고 와서 만나던 자리입니다.”

한 부부장은 “대통령 각하의 환대를 받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께서는 건강하신가요?”하며 응답했다. 둘의 대화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미국과 북한 간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카터의 평양 방문이 매우 필요하다는 얘기가 오갔다. 카터는 말했다.

“김 주석이 나를 초청하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나는 북한 관광이나 하고 돌아오는 여행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서 평양으로 가는 것은 거절합니다.”

“…?”

“김 주석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서울에 가서 한국 대통령(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나의 평양 방문의 뜻을 전하고 그가 김 주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휴전선을 통해 평양으로 가야 합니다.”

“각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휴전선은 군사분계선이지 국경선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귀국은 항상 ‘하나의 조국(One Korea)’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나는 국경을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으로서 남쪽 서울에서 휴전선을 넘어 북쪽 평양에 감으로써 한반도가 한 나라임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한시해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터는 덧붙였다. “내가 평양에 갔다 올 때는 한반도의 긴장과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풀릴 수 있는 큰 선물을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에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마치 목사처럼 이 모든 이야기를 기도로 마무리했다. 91년 6월 6일 오후 7시의 일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3년 후인 94년 6월 휴전선을 넘어 방북해 김 주석을 만났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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