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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예배 365-5월 21일] 마음을 저울에 달아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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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내 맘이 낙심되며’ 300장(통 40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욥기 6장 1∼7절


말씀 : 이것은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반응입니다. 이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5:2)라고 한 그에게 무턱대고 자신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그 고난이 어느 정도이며, 그의 말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려해달라는 부탁입니다. “만일 나의 분함이 정말 무게로 달아지고, 나의 재앙이 한꺼번에 저울들에 올려지면 좋으련만! 진정 그것은 바다의 모래들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내 말이 거칠었노라.”(2∼3절 직역)

욥은 저울과 바다의 모래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지금 그는 보통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는 용어만 놓고 그 표현이 정제되지 못한 것을 타박한다면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서 멀어집니다. 개역개정이 ‘경솔하다’로 옮긴 말은 자칫 욥이 엘리바스의 말에 수긍하면서 3장에서 했던 말을 후회하는 듯 보이게 만듭니다. 이에 표준새번역은 3절을 본뜻에 맞게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로 옮겼습니다.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궁수에 비유했습니다. 마치 궁수가 화살을 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두려운 일이 자기에게 꽂혔으며, 자신은 거기 묻은 독을 마셨다고 했습니다. 맹수를 잡을 때 사냥꾼은 독화살을 쏘곤 합니다. 그것에 맞은 짐승은 제 아무리 힘 센 것이라도 몇 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지금 욥이 그런 상태입니다.

동시에 그 원인이 자신의 범죄에 있다고 하는 엘리바스와는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인과응보의 교리를 여과 없이 말하는 엘리바스의 훈계는 마치 먹을 풀이 없어 우는 들나귀에게, 꼴이 없어 굶주린 소에게 먹이를 주는 대신 울지 말라고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리만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소금을 넣지 않고 조리한 음식처럼 전혀 구미에 당기지 않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그가 하는 말에는 옳은 내용도 많습니다. 그가 욥과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같은 일을 경험했던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무게, 슬픔의 무게, 환난의 무게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것을 느끼는 정도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에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빌 1:8) 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같은 경험에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더라도 주의 심장을 가지고 산다면, 사람들을 대한다면 고통의 내용이나 무게가 다를지라도 얼마든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께서 주시는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기도 : 긍휼의 하나님, 저희에게 주님의 심장을 갖게 하소서.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현진 목사 (서울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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