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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2> 영락교회서 예배 중 “38선 전역서 전쟁”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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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순회전도에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윤하영 목사님을 전남 여수에서 만났다. 윤 목사님은 내 고향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였다. 해방 직전까지 신의주제일교회를 담임했던 그는 성품이 곧고 타협을 모르는 민족주의적 종교인이었다.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온 윤 목사는 한때 미군정청 여론조사국장을 하다가 충북도지사를 역임했다. 정부 수립 이후엔 문맹퇴치운동 본부장이 됐다. 문맹이 많던 지리산 벽촌 사업을 위해 일꾼을 찾다가 여수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문맹퇴치와 무교회 지역 전도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을 모르지 않겠지?”

6월 중순까지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여수로 내려와 문맹퇴치 일꾼을 양성하라는 일방적 지시만 남기고 떠났다. 여수교회 김 목사님은 곧바로 나를 전도담당 동사목사로 청빙키로 당회에서 의논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50년 3월 14일 순천노회에서 강도사 고시를 받기로 했다.

당시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치선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300만 전도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남대문교회 평신도 야간신학교에서 길러낸 전도인들이 방방곡곡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빨치산은 총을 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전도인들은 성경과 찬송을 들고 지리산에서 신령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보고가 무교회면 퇴치와 문맹퇴치 병행의 절대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는 목사 안수식과 동사목사 위임식을 6월 14일 치르고 서울로 올라갔다. 아내는 여수에 있었다. 종로 기독교서회 4층 대한계명협회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뒤 영락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긴급광고를 들었다. “38선 전역에서 전쟁이 시작됐으니 모든 장병은 속히 부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서울은 온통 난리였다. 6월 27일 정부는 수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요동하지 말라고 방송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는 녹음테이프였고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벌써 대전으로 떠난 뒤였다. 어머님처럼 모시고 있던 처고모 라창석 권사님은 나에게 여수로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표를 구하러 서울역에 나갔다가 인민군과 탱크 행렬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군인들이 모두 어린 애들로 보였다. 열댓 살 정도나 됐을까. 적진에 들어오는 모습이 아니라 뭐가 뭔지 모르면서 허공을 보고 정신없이 걸었다.

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쟁을 만났다. 그날 붉은 군대의 탱크가 와서 형무소 문을 부수어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형무소 문을 부순 탱크 장교는 나의 셋째 삼촌의 둘째 아들이었다.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던 그는 인민군에 입대해 탱크부대를 이끌고 내려와 서대문형무소로 직접 온 것이었다. 항일 운동가였던 큰아버지의 수감 소식을 듣고 비분에 싸여 있다가 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전쟁이 보여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라 권사님은 남대문교회 맹관호 장로와 결혼하셨다. 맹 장로의 아들은 아내와 동갑내기였던 맹의순이었는데 그가 라 권사를 찾아와 어머니가 돼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라 권사님은 우리 내외가 어머님처럼 모셨는데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셨다. 맹의순은 착한 젊은이였다. 그는 나중에 포로가 되어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고백을 남기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공군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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