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 궁극이
  • 260
  • 0

1719, 20: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게 그런 줄 알고 이해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우리는 왜 못 쫓아내었습니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예수를 믿기는 존재적으로 확실히 믿는데 믿음성의 결핍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결핍성이 무엇이냐?

믿음 달라고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흘리고 자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창자가 꼬여지고 내 입에서 연기가 풀풀 나도록 뜨겁게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지는 것이냐?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주여, 주여, 주여하며 주여 삼창을 하고 소나무 뿌리를 몇 개 뽑으면 되느냐?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리면 오는 것이냐?

 

공동묘지에 가서 기도하면 영력이 커져서 오는 것이냐?

 

밑이 낭떠러지인 바위 끝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담력이 크다고 기특하게 여기셔서 번갯불이 피뢰침을 때리듯이 자기에게 그렇게 주는 것이냐?

 

40, 100일 밥을 굶고 떼를 쓰면 주는 것이냐?

 

믿음의 결핍성이란 내가 주님을 그 만큼 모른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모르면 모르느니 만큼 결핍성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믿음에 충만성입니다. 알아도 바로 알면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그 신앙의 소원 목적 중심사상이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 혹은 결합시키려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사람을 신적인 지혜 지식성적으로, 사람을 신적인 도덕성적으로, 사람을 신적인 능력성적으로 온전자로 닮게 하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아홉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 사고방식부터가 비뚤어진 것입니다. 장소와 상황이 그들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능력을 행하여 영웅소리 듣자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절대로 사람의 정신 사상이 바로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로 반듯하게 하나님 앞에 정립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충성봉사만 잘 하게만 해 놓으면 사람이 바로 된 것이냐?

 

믿음은 신의적인 믿음, 신념적인 믿음, 신뢰적인 믿음이 있는데 신념적인 믿음과 신뢰적인 믿음은 내 속에서 나올 수는 있는데 신의적인 믿음은 자기 속에서, 인간 속에서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신의적인 믿음은 주님을 아는 데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니고 진리이치를 듣는 것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아는 것만큼 진리충만이고 성령충만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로 충만이 아닌 것은 거짓으로 아는 것이요, 물불을 분별치 못하게 하는 귀신들의 운동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활동적인 큰 업적을 남겼더라도 분별력 있는 사람이 안 되었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은 눈에 안 보이게 생명력이 있는 역사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사람을 바로 세우고 만들어 놓는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했으니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산도 옮기고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 만한 믿음은 어디서 찾느냐?

겨자나무 밑에 가서 찾을 것이냐?

불집회에 가서 찾을 것이냐?

산기도 금식기도로 찾을 것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에게서 찾을 것이냐? 말하자면 성경에서 찾을 것이냐?

 

주님은 생명 믿음에 충만자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충만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도의 봉우리로 데리고 올라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까짓 거합니다.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져도 줍지 않습니다. 무관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뿌리를 박고 올라올 때는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무리 씨앗이 작아도 생명이 살아있듯이 진리의 한 이치가 별 것이 아니게 느껴져도 자기 밭에 갖다가 심기만 하면 커져서 새들이 깃들입니다.

 

아홉 제자는 씨앗이 될 수 있는 생명 진리 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습게 하찮게 여기는 신앙상태입니다.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산이 옮겨질 것이요 못할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만능의 큰 능력입니다. 만능의 큰 능력이 있다면 어디다가 써먹을까? 백두산이나 금강산을 어디다가 옮겨놓을까?

 

세상에서 산이 옮겨진다는 소리는 못 들어보았습니다. 성경에만 있지! 설령 산이 옮겨진다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무슨 힘으로 산을 옮기느냐? 불도저를 가지고 할 수 있나?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이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산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억지로 꺽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것을 가지는 것만큼 믿음이 생겨지니 인간의 교만은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 속에 교만이, 영웅성이 산처럼 잔뜩 쌓여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의 경우

 

헛소리 잘 하는 베드로에게 간질병자를 고쳐 달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간질병자를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초막 셋을 짓는 그 운동을 했을 것 같고,

 

아홉 제자는 그 초막 안에서 귀신을 쫓는 운동을 한다고 의샤의샤했을 것이고,

 

서기관들에게 귀신들린 자를 데려다 주면 성경을 가르치기는커녕 간질병자를 억세게 두들겨 패 죽였을 것 같고.

 

사실 이런 짓 비슷하게 교회 안에서 많이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사망운동이요 심판받을 운동들입니다.

 

1722, 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1621절의 수난의 예고는 장로와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넘기어진다는 것이고, 1722, 23절의 말씀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진다는 것입니다. 장로와 대제사장 서기관 다 사람들이지만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종교적 지도자들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말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은 30에 넘기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방군대의 손을 빌어 죽이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에 동조했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들어 우리에게 지금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사람의 손에 넘기어진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종교지도자들 손에 즉, 종교의 세력에 넘기어진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판단 평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세력 즉, 권세 권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진리 우선이 아니고 진리는 나중이고 종교적 권세에 의해서 진리가 판단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독자노선입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되고, 누가 안 알아준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안 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가만있어도 하나님 말씀입니다. 세상이 다 달라붙어서 부인하고 짓밟는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 성경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수결이 없고 타협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진다

 

종교지도자들의 옛 사람이 주격이 된 신앙사상에 성경이 이용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소원 목적에다 성경을 이용해 써먹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축복 받아 만사형통 된다고 하니까 헌금을 조금 내고 복음을 사는 격입니다. 속화된 교회는 그런 식으로 복음을 파는 격이고. 이렇게 되는 사상이 사람의 손에(세력에) 넘어가는 꼴입니다.

 

죽임을 당하고

 

복음의 정신 사상이, 진리생명이 완전히 없는 상태입니다. 교회에서 천국복음의 사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불신세상에서 하는 짓이나, 교회 안에서 하는 짓이나 전혀 분별이 안 되는 교회 안이 세상보다도 더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 세상세력화 되어 쇼장 만담장 세상놀이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상 타락적 인간사상이 주격이 되니 복음의 냄새가 전혀 안 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진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 예수하면서 예수를 세상에다 팔아먹고, 천국복음인 성경을 땅에다 던져버린 그 심판은 자기가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이 주격이 된 내 세상 안에서 내 세상에 이용을 당하고 있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가서 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어디 가서 무게를 잡고 있느냐? 아니면 그런 것 저런 것 아무 생각도 없이 남들이 교회를 하는 것처럼 자기도 한다고 하는 것이냐?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물론 역사적 당시로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사람들의 손에 죽는다는 사실에 근심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일 후에 살아난다고 말은 그랬지만 그것보다도 죽는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나? 자기들 처신에 더 걱정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작다 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근심을 했습니다.

 

예수가 3일 후에 살아난다 했으니 우리가 볼 때는 희망이 있는 근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장로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리고는 세상사람들에게 점점 내어준 바 되고 죽어진다는 주님의 복음을 두고 현재적으로 진리의 종들은 하나 둘 세상을 뜨고, 교회는 세상화 되고,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짓밟혀진다는 사실을 놓고 근심을 하는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본 다니엘, 그리고 사도요한은 기절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들 하는 짓들을 보면 천국복음, 하늘나라를 전하시더라하는 주님의 복음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속화된 종들은 저게 뭔 소린가합니다. 전부는 어떻게 하면 예수 덕으로 등 따시고 배가 부를까그 연구입니다. 천국복음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생각도 없습니다. ‘마지막이 될수록 복음의 본질이 어떻게 변질될까? 불어오는 종교적 유행바람을 어떻게 견뎌볼까하는 이 근심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거짓 종 거짓 선지자 이단이나 사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가지고 자기 권세, 권력을 확보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후보자들은 또 그 뒤를 따르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는 죽었어도, 천국복음은 땅에 떨어지고 밟혀지고 뭉개지고 버림을 받았어도 주님은 심판주로 되살아나십니다.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으로! 택자들,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 때까지 우리의 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7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관세는 물품세이고 정세는 사람의 세입니다. 반 세겔은 20세 이상 50세까지 남자로 아달월(3) 14, 15일 경에 내는 성전세라고 합니다. 아달월 하면 부림절과 에스더 모르드개가 생각이 납니다. 승리를 거두게 되니 이스라엘은 모두 구출을 받고 기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네가 한 번 상상을 하던지, 추측을 하던지, 가정을 하던지, 현재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생각을 하던지 네 자유로 답변을 해 보아라!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타인에게니이다’ ‘그래? 바다에 가서 고기를 낚아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이 있을 것이니 갖다가 주어라해서 성전세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주님은 물질계를 창조하신 주님이십니다. 성전의 주인은 사실상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세를 내어야 하느냐? 인간들이 주님의 것을 사용하니 주님에게 세를 내어야지! 그런데 도대체 누가 주인행세를 하느냐? 그럼에도 잘못되어 있긴 하지만 저들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성전세를 내긴 낸 것입니다. 가르침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세상이 주격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세금을 내게 되어 있다.

 

타락된 세상은 임금이 관세와 정세를 받는다. 자기가 계획한 목적달성을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타락된 세상성이 들어와 주격이 되면 어떤 목적달성을 시키고자 하게 되고, 그러려면 돈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사람의 머리수와 물질의 재산, 부요성을 따지게 된다.

 

내 속에 옛 사람이 주격이 되면 자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사람의 신앙정신이 물질로 돌아가 버린다.

 

자기 속에서 진리가 왕이 되면 물질성과 인간 수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평안이 깃들고 기쁨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세상임금의 아들들은 세를 아니 내고 타인은 낸다고 한 말끝에 한 말이기 때문에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한 말도 되지만 그러나 또 주님의 그러하면이라는 말씀의 의도성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예수님까지 포함된 제자) 성전세를 아니 내어도 되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에서 성전세를 낸다는게 더 좋은 일이고 오해가 없는 떳떳한 일일 것입니다.

 

성전에 관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성전세를 낸다면 그 돈을 가지고 성전에 필요한 도구나 수리를 할 때 쓰지 않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말씀을 그 안에서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지!

 

우리는 진리와 관계된 택자들의 구원과 관계된 일이라면 물질을 써야 되겠습니다. 자타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진리와 관계가 없는 이방종교적 풍속 습관에 물질을 쓰는 면이 굳어져서 합리화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낚아서 입을 열어 돈을 낸 것은 이적이긴 하지만 주님은 원래 가난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전을 위해서 쓰는 면에서는 오해가 안 되겠금 진리를 전하는 면에서 그것 때문에 걸린다면 덕이 안 되겠기에 이적을 일으켜서라도 준비하여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성령이 계시는 전이신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면 이 전에 꼭 필요한 공급을 해 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종들을 먹이시는 까마귀를 동원한 것으로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의 몸이요 전을 자기의 신념적 종교성에서 나온 즉, 이방종교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폭식하는 것도 육이요,

자꾸 굶겨서 자기 몸을 회복 불가하게 만드는 것도 육이요.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술이라면 몰라도 일부러 먹기 좋다고 먹고는 얼굴이 벌개지고, 신분에 또는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면 죄다, 아니다하기 전에 신앙양심에 허락이 안 되는 일입니다.

 

속화된 말세의 교회들이 진리에서 깨달아져서 나온 것이 아니고 믿음없는 교역자들의 시대적으로 흐르는, 대세적으로 흐르는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간 조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 망치고, 주님 얼굴 더럽히고, 교인들 다 도망을 가고. 사랑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가정도 파괴되고.

 

극기 극복주의로 끌려갈 때는 이것도 세상인데 악령의 역사라고 보게 됩니다. (계속)


*************************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