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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차게 나팔을 불라 (삿 7: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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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로 가장 큰 절기가 '설날'과 '한가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양력을 기준으로 볼 때 매년마다 날짜가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철저히 "음력"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날은 떡국이고, 한가위는 송편으로 대표되는 음식문화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도 독특한 절기기준, 시간의 기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년, 새해는 양력으로는 9월이나 10월경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음력풍습처럼 저들도 나름대로의 절기기준을 지키다보니, 새해가
일정하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새해에 즐겨먹는 음식이 있는데 그것은 "사과에 꿀을 찍어먹는 풍습"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새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이 모든 일이 꿀처럼 달콤하게, 그리고 형통하게 잘 되길 바란다"는 뜻으로
이것은 성경적인 것과도 상관없고, 율법과도 무관한 순수 "전통문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새해를 지키는 전통문화 중에 성경에 근거하여 지키는 풍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새해에는 "뿔로 만든 나팔을 길게 부는 일"입니다.
이 뿔은 어느 지승의 뿔인가 하면 "수양의 뿔"입니다.
유대인들이 신년에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에 가서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잡아 제물로 드리려고 칼을 드는 순간,
하나님은 너무나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삭대신 제물로 드리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이레의 제물이 다름 아닌 "수양"이었습니다.
여기 여호와이레의 수양을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에 수양의 뿔을 길게 나팔 분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여호와이레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의 앞날 1년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식 것입니다.
"여호와이레"의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하는 의미로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1년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서로에게 상처주고, 서로에게 경계심을 갖고 살아가면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힘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일이
우리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은 강도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 갈 때
오히려 시간과 물질을 내어서 그 상처를 싸매어 주고, 짐승에 태워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준 어느 사마리아인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새해 아침을 알리는 유대인의 수양의 뿔나팔 소리는 "올 한해도 우리 모두에게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소서"
"혹 세상을 살아 가다가 상처받고, 버림받는다 할지라도 내게 치유의 기름을 부어주소서.
나를 싸매어 주소서. 나를 돌봐주소서"하는 간절한 기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새해 부는 수양의 나팔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나팔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모이게 하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성경에서 기억이 나는 장면이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시내산 앞으로 모을 때 나팔 부는 장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의 예수님 역사 속에서 나팔이 사용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을 떠나 "여리고성"앞에 당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명하시길
그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게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내리신 강한 명령은 '성을 돌때는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에 성을 돌면서 제사장이 일정하게 나팔을 부는 것은 허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여리고성을 돌때는 입을 다물게 하시면서, 제 7일째 되는 날에는 나팔을 불게 하셨을까요?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현명하신 결정이셨습니다.

여러분!
여리고성 함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만일 여리고성을 하루 한 바퀴씩 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있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저들의 입에서는 분명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여리고성을 하염없이 돌아야 하는 거지?"
"이러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 거야!"
"차라리 이럴게 아니라 이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이런 식의 대화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결코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도는 일은 실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평하는 것으로 치면 이미 저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없음으로 인하여
불평을 쏟아놓은 역사가 잇는 민족이었습니다.
성을 돌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했기에 망정이지 저들은 입이 쑥 나와 가지고 말은 못하고,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금하신 대신, 제사장이 제 7일째 되는 날, 나팔을 길게 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대로 나팔을 길게 불었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성 함락을 위하여 군사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함으로서 최선을 다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제사장만 나팔을 불고, 나머지는 아무소리도 하질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때 울려 퍼진 제사장의 나팔은
"하나님! 우리가 지금까지 철저히 하나님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마치 애북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가던 유월절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지나갔듯이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주권자이심을 저 여리고성 사람들로 알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의 의미가 강하게 울려 퍼진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여리고성이 앞길을 막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곧 나팔소리였습니다.
이 소리는 "내 앞의 장애물은 하나님이 다 무너뜨리실 것이다"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외침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의 선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새해에 부는 수양의 뿔나팔은 일단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 올 한해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소서"
다른 하나는 "하나님! 이제 내 앞의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 주권으로 다 무너질 줄 믿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해 첫 나팔의 강한 메시지는 오늘의 본문인 사사기 7장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때 기드온 사사가 모집한 군사의 수가 3만 2천명 이었습니다.
이 숫자도 미디안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습니다.
헌데 하나님은 300명만 남기게 하십니다.
전정에 임하기전에 벌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이일이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300명만 남기고 3만 1700명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나타나질 않습니다.
단지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 이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쫓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자긍하기를 내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국어사전에는 자긍이라는 말의 뜻풀이를 스스로 자랑함 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지고는 자긍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 원어상 자긍의 의미는 스스로를 영화롭게 한다, 스스로를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여기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갈아 나무를 베는데 사용한다고 합시다 도끼는 나뭇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만들었고 날을 세웠고 이 도끼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무꾼이 도끼를 창고에 넣어두기로 마음먹으면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끼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쇳덩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도끼는 자기능력으로 나무를 잘랐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사용했기에 나무를 자를 수 있을 뿐입니다.
만일 도끼가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내가 나무를 잘랐다 고하면 그것이 자긍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약속하시는데 저들이 자기들의 능력과 힘으로 승리한 줄로 착각하게 되는 것을
염려 하신 것입니다.

자고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즉 자기 스스로를 뽐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은 이후로
인류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무얼 이루어 놓는 것에 집착하는 습성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단 삼백 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하는 전쟁을 준비시키십니다.
이 전쟁에서 기드온이 삼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창이나 방패 대신에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나팔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공격무기도 방어무기도 필요 없이 오직 항아리, 횃불, 나팔만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이젠 어차피 300명 군사를 가지고 싸우겠다는 것도  무의미한 예기가 된 마당이니
무기를 들고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면서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그 이스라엘을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였습니다.
저들의 전쟁은 절박하리만큼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싸움이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기드온의 300명 군사는 미디안진영에 들어가 나팔을 부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뭔가 하실 줄 믿고 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저들은 나팔을 불면서 '이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팔만을 불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칼과 방패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계시고 모든 만물 중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합니다'하고 선포 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핵심은 결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함께 하였느냐가 관건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삼백명군사와 더불어 미디안과 싸운 이 전쟁의 핵심을
전쟁자체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이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전쟁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묘사한 바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을 쳐 죽이신 것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는 결코 자긍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절대 이룰 수가 없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장면은 유대인들이 왜 신년에 나팔을 부는 풍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새해에 부는 수양의 뿔나팔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표였던 것입니다.
올 한해에도 우리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주권이 널리 선포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하는 간절히 소망을 담아 외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신년절기 풍습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발견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함을 얻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죄 된 습성을 벗지 못하여서
죄책감과 후회를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2006년도에도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나무를 쓸어뜨릴 때 도끼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도끼 스스로 '내가 나무를 쓸어뜨렸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은
나무꾼이 도끼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해벽두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사용하셔야만 내가 일을 이룰 수 있음을 고백하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1.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올해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2. 여호와 하나님! 이제 내 앞의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 무너질 줄 믿습니다.
3. 여호와 하나님 올 한해도 내합으론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갑절이나 부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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